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들 배경에는 패권주의와 이데올로기가 있었다. 제국주의 서구 열강들의 패권다툼에서 비롯된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이성적 존재라고 여겨졌던 인류가 사실은 파괴적이고 허무한 존재였다는 정신적 각성이 일어났다. 근대주의는 한계를 노출했고, 이를 극복하려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도들이 펼쳐졌다.20세기 후반기는 이데올로기 대결로 특징지어진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로 세계는 동서방과 제3 세계로 나뉘어 체제경쟁을 해왔다. 40년에 걸친 경주 끝에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고 독일이 통일되면서 이데올로기의 우열은 분
1917년 볼셰비키 혁명과 5년간의 적백내전을 거쳐 공산주의 연방을 이룩한 소비에트 연방은 1927년부터 1953년까지 스탈린의 지배기에 들어갔다. 그는 거대한 경제 계획을 세웠고 강력히 밀어붙인 결과 소련은 농노제 하 제국 시절의 농업국가를 벗어나 미국에 필적하는 공업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제도 역시 국민들의 불만을 불러일으켰다. 그가 세운 관료체제 하의 ‘노멘클라투라’라는 계층은 대숙청에 기여하였는데, 이로 인해 어마어마한 인원이 사망하거나 시베리아의 강제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스탈린 통치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을 논할 때 두 번의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은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는 핵심사건이다. 1917년 2월과 11월 두 번의 혁명을 거쳐 러시아제국이 붕괴되고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완수했지만, 5년간의 적백내전(제국지지파 백군과 공산주의 적군간의 전쟁)을 거친 후에야 소비에트 정권은 안정될 수 있었다. 공산주의 체제의 안정화를 이루자 소비에트 정권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강요하며 노동자 농민의 정치성과 관련 없는 예술가들의 창작 활동을 제한했다. 특히, 서구적인 음악 스타일이나 개인주의적인 표현을 하는 예술가들은 더욱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을 논할 때 두 번의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은 어디에서도 빠지지 않는 핵심사건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장기화로 생활이 더욱 어려워진 러시아 민중들은 생존권을 쟁취하고자 하였는데, 1917년 3월 8일 페트로그라드(Petrograd) 시위는 1917년 혁명의 봉화가 되었다. 그날은 국제 여성의 날이었는데, 여성들이 빵과 우유를 요구하며 시위하자 노동자들이 8만명이나 가담했다. 전쟁에서 돌아오거나 진압을 거부한 일부 사병들이 이 시위에 참여하면서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농민 소비에트(soviet)’로 단결하는
20세기 초 유럽 문화예술에 ‘러시아 혁명’을 불러온 발레 뤼스(Ballet Russes)는 처음에는 파리의 모가도르 극장(Théatre de Mogador)을 주무대로 활용하다 1차대전 후 몬테카를로(Monte Carlo)로 이동하였다. 전통적 고전 발레에 일대 변혁을 일으킨 발레 뤼스의 무용수 및 안무가의 리스트에는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 바슬라프 니진스키(Vaslav Nijinsky)와 브로니슬라바 니진스카(Bronislava Nijinska) 남매, 안나 파블로바(Anna Pavlova), 이다 루빈
1917년 러시아 혁명은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으로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과 더불어 20세기를 변혁시킨 최대 사건이다. 1차대전의 종식에도 영향을 미쳤지만 러시아 사회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파시즘과 나치즘이 등장하면서 2차대전이 일어났고, 이후 미소 경쟁의 냉전 체제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20세기 초 예술 역시 ‘러시아 혁명’이라 부를 만한 변혁의 물결이 밀려왔다. 발레 뤼스(Ballet Russes)가 1909년부터 20년간 활동하며 문화예술계를 뒤집어놓았기 때문이다. 발레 뤼스는 러시아 미술, 음악, 발레를 서구에 소개했고 미하일
러시아 문화와 예술은 넓은 의미로 살펴보면 오랜 역사 속에서 러시아인이 이루어 놓은 모든 정신적·물질적 성과물을 총칭한다. 러시아의 지리적 환경, 역사와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으며 의식주 문화나 문학, 러시아인의 의식 구조와도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다.러시아 제국은 표트르 대제의 개혁 이후 차례로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문화의 대대적 수입이 이루어지며 급격한 서구화로 접어들고, 나폴레옹의 원정 실패 이후 자본주의의 유입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서구화의 이면에는 러시아 본래의 것, 슬라브적인 바탕이 파괴되는 반작용을 낳을 수
러시아는 9세기 노브고로드 공국 성립 후 19세기까지 1천년에 이르는 긴 세월동안 유럽의 변방 취급을 받았다. 오랜 시간에 걸쳐 동방의 시베리아까지 영토는 확장되었지만 얼어붙은 동토는 쓸모가 없었고, 러시아는 늘 겨울에 얼지 않는 항구인 부동항을 찾아 동쪽으로 서남쪽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제국의 세력이 커지면서 그들은 문화적으로도 무시당하지 않는 수준에 도달하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슬라브 민족의 나라가 슬라브라는 이름을 쓰지 않은 이유는 노예(slave)를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된 이름이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셀주크와
민족음악학(民族音樂學)은 민족학(ethnology)과 음악학(musicology)이 합쳐진 학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서양 클래식이 아닌 음악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특히 비교음악학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 음악과 서양 음악을 '비교'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식민지의 음악과 서양 음악과의 비교를 통해 ‘음악이 어떻게 원시적인 형태에서 서양 음악과 같은 진화한 형태가 되었나’의 해명이 목표이기도 해서 문화식민주의의 색채를 너무 강하게 띠는 경향이 있다. 이같은 이유로 최근에는 사용하지 않는 용어가 되었다.민족음악학이란 용어는 1950
유럽 한가운데 박힌 단 하나의 몽골계 국가 헝가리(Hungary) 사람들은 기원후 원년부터 우랄 산맥을 넘어 아주 느리게 서쪽으로 남하했다. 그러다 9세기가 되어서야 오늘날의 헝가리 영토인 중부유럽 카르파티아 분지 일대로 들어왔다. 800년대 머저르족의 푸스타 초원 이주 정착에 따라 895년경 판노니아 평원에 헝가리 대공국이 성립되면서 역사에 처음으로 헝가리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유목 생활을 영위하던 머저르족은 푸스타 초원에 정착한 이후 슬라브족들을 흡수하고 요새를 건설하며 농경 민족으로 변모했다.헝가리 대공국은 서기 1000년에
백인들의 대륙인 유럽 한가운데 섬처럼 박혀있는 단 하나의 몽골계 국가가 바로 헝가리(Hungary)다. 이 국호는 민간 어원으로는 훈족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현대 사학계에서는 거의 부정된다. 실제 어원은 머저르(그동안 마자르로 읽었지만, 현지 발음으로는 머저르)인과 가장 밀접하게 교류했던 튀르크계 '오노구르인(onogur-bolgárok)'으로 여겨진다. 이 나라의 헝가리어 국호는 '머저로르사그‘(Magyarország)로 '머저르족의 나라'라는 의미이다. '머저르' 명칭은 9세기 중반 부족 연합으로 지금의 땅에 정착해 헝가
서양음악사를 보면 작곡가들은 자신의 음악적 영역을 넓혀 보기 위해 무진 노력을 기울였다. 브람스는 베토벤이 다 해버려서 교향곡은 더 이상 할 것이 없다고 불평했지만, 그 이후에도 슈베르트, 브루크너, 말러, 쇼스타코비치는 베토벤과 같거나 더 많은 교향곡을 발표했다. 낭만음악의 끝무렵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전의 세계와 그것을 지탱해 온 철학이 끝났다고 생각한 음악가들은 이전과 다른 정신세계를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현대음악과 전자음악은 그러한 시도에서 태어났다. 새로운 매체와 사운드, 형식들에 대한 시도가 비록 일반 시민 청
서양음악사에서 오케스트라와 합창의 편성은 계속적으로 확장되는 양상을 보였다. 서유럽은 대항해 시대와 지리상의 발견을 통해 식민지를 개척했고, 식민지와의 무역을 통해 어마어마한 부를 가져왔다. 비싼 유지 비용이 들었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은 교회와 궁정을 벗어나 신흥 부자계급인 부르주아들을 새로운 소비계층으로 받아들였다.음악이 부르주아들의 필수 교양이 되고, 오페라극장과 콘서트홀이 하루가 다르게 늘어났을 때, 오페라단과 오케스트라는 교회와 궁정의 품을 떠나 시민의 품으로 나아갔다. 티켓을 돈 내고 사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오페라의 규모
서양음악사에서 시대구분은 앞쪽에서는 대체로 정수가 맞아떨어지는 것들이 많았다. 아르스 안티콰(Ars Antiqua)가 1000~1300년 아르스 노바(Ars Nova)가 1300~1450년, 르네상스(Renaissance)가 1450~1600년, 바로크(Baroque)가 1600~1750년이었기 때문이다.그 다음 고전음악 시대의 종언은 베토벤의 죽음(1827년)으로 보아야 하느냐 최초의 낭만주의 표제음악 환상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이 초연된 1830년으로 보아야 하느냐의 논쟁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진행중이
서양음악의 낭만주의 시대가 개막된 이후 관현악과 오케스트라는 급격히 발전해 지금의 오케스트 형태를 확립했다. 소규모의 궁정 오케스트라로부터 시작된 다양한 오케스트라 악기들의 발전 과정은 서양 음악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자본주의가 유럽에 정착하고, 식민지에서 물산이 쏟아져 들어오며 이전에 귀족들만 즐기던 음악은 부르주아 전반에 갖추어야 할 교양으로 바뀌었다. 오페라극장과 콘서트홀이 도시마다 경쟁적으로 지어졌으며, 음악 청중의 저변도 넓어졌다. 더 많은 청중을 수용하게 된 극장과 콘서트홀의 규모가 커지면서, 자연히 오케스트라의
서양음악의 낭만주의 시대가 개막된 이후 관현악과 오케스트라는 급격히 발전해 지금의 오케스트 형태를 확립했다. 소규모의 궁정 오케스트라로부터 시작된 다양한 오케스트라 악기들의 발전 과정은 서양 음악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각 악기군의 역사와 발전 역시 매우 흥미롭다. 고대 그리스 문명에서도 현악기 리라(lyra)와 함께 연주된 그림이 전해지는 플루트는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에는 몸체가 목재여서 지금도 목관악기로 분류된다. 원래 리코더처럼 연주하던 플루트는 바로크 시대에 옆으로 눕혀서 부는 오늘날 형태의 트래버스 플루트로 변신했다.
서양음악의 낭만주의 시대가 개막된 이후 관현악과 오케스트라는 급격히 발전해 지금의 오케스트 형태를 확립했다. 오케스트라 악기들의 발전 과정은 서양 음악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각 악기군의 역사와 발전은 매우 흥미롭다. 바이올린 계열의 악기들은 중동의 라바브(rabab)와 그에 영향을 받아 출현한 유럽 중세의 레벡(rebec)이 조상이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아마티 가문과 같은 제작자들에 의해 바이올린이 확립되고 명기들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의 바이올린은 주로 교회 음악과 궁정 음악에서 사용되었다. 바로크에서 고전주의 시대로
서양음악의 낭만주의 시대가 개막된 이후 관현악과 그 관현악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는 급격히 발전해 왔다. 그러나 관현악이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사실 불과 300여년 정도로 클래식 음악의 역사에 비추어 보면 짧은 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음악역사학자들이 대체로 1600년 정도까지라고 르네상스 음악시대는 순수한 인간의 목소리를 가장 이상적인 음악재료로 생각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성악이 대세였다. 문학과 미술에서 먼저 일어난 인문주의의 각성이 음악에도 스며들면서 바로크음악 시대에는 교회음악보다 세속음악을 통해 인간적인 면모를 추구하는 경향이 생
장기간 유럽 세계에 수출되어 찬란하게 빛나던 이탈리아의 문화적 영향력은 유럽 각국의 신흥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에 따라 점점 힘을 잃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반혁명 동맹군에 참여했던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왕국은 알프스 산맥을 넘은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에게 1796년 대패를 경험한다. 이어서 1799~1800년의 2차 대프랑스 동맹에도 참여했지만 동맹군은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온 나폴레옹 군에게 또 패했다. 이후 분열된 이탈리아는 힘을 잃어 조그만 교황령 말고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사실상 식민지배를 당해야 했다.나폴레옹 1세가 몰락으
정치와 음악은 늘 음악의 역사에서 논쟁거리였다. 클래식 음악에는 연주장과 음악전문가들이 필요해 중세 이후 경제적인 뒷받침이 가능한 대성당들이나 왕과 귀족의 궁정을 통해 유지되어왔다. 르네상스 말기부터 지중해 무역으로 부유했던 베네치아에서 비로소 음악 대중화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클래식 음악은 주소비층이 부르주아로 넘어가며 왕과 귀족이 아니라 국가와 지방정부, 그리고 빈곤을 벗어난 중산층 시민들로 확대되어 갔다. 입헌군주제 하에 선거를 통해 의회를 구성하는 민주주의가 확산되면서 고대 로마제국의 빵과 서커스는 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