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대부분은 가부장제 아래의 역사이고 따라서 영웅이나 정치 사회 분야의 위인들은 거의 남자다. 미에 대한 인간의 본성 위에 세워진 예술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로 20세기 여성해방의 거센 물결이 밀려오기 전까지 위대한 예술가들 대부분은 남자였다.예술가들의 고민은 언제나 다른 예술가들과는 다른 작품이면서 인정받고 감동을 주는 작품을 창작하는 것이었다. 완전히 다른 소재이거나, 격렬한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것이거나, 예상을 뒤엎는 기막힌 반전이 있어야 동종 업계의 경쟁자들에게 인정받고, 나아가 해당 예술의 수용자들에게도
서양 클래식 음악의 역사는 종교음악으로부터 형성됐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의 음악적 이상은 인공적인 악기 소리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로만 불려지는 다성부의 합창음악이었다. 창조주의 손으로 직접 빚어 만든 인간의 목소리야말로 절대자이자 창조주인 하나님을 찬양하는데 가장 적합하다는 이유였다.르네상스 음악의 뒤를 이어 등장한 바로크 음악은 음악사학자들이 대개 1600~1750년으로 본다. 음악의 역사 중 가장 연도가 명확한 시대인데, 공식적으로 첫 오페라 공연이 있었던 해가 1600년이고, 바로크 음악 최후의 집대성자 요한 제
일찍부터 천재로 성공하는 것이 더 나은가, 차근차근 쌓아올려 마침내 성공하는 것이 더 나은가 하는 질문은 학문과 예술 뿐 아니라 비즈니스와 권력의 세계에서도 늘 논쟁거리다. 일단 사람들은 신동과 천재에 먼저 끌리기 마련이다.천재의 대표 모차르트는 3살 때 피아노 연주를, 5살 때 작곡을 시작해 6살 때 첫 공개연주회를 했다. 베토벤은 4살 때 피아노를 시작하고 7살 때 작곡을 시작했다. 미술계의 대표 미켈란젤로는 13살에 전문 조각가로서의 훈련을 시작해 조각과 회화, 건축 각 분야에서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걸작들을 남겼다. 과학으로
지금은 작곡자와 연주자가 완전히 다른 분야로 정착되어있는 분위기지만 불과 1세기 전만 하더라도 작곡자는 연주자를 겸하고 있었다. 오르가니스트 바흐, 피아니스트 겸 바이올리니스트 모차르트, 피아니스트 베토벤으로부터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까지 대부분의 작곡가들이 연주자로도 활동했다. 하지만 18세기 후반부터 작곡과 연주가 서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음악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지면서 작곡가들에게 전문적인 공부가 요구되었고, 연주보다 작곡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했다. 다른 측면에서는 공연이 늘면서 연주로 돈을 버는 전문적인 연주가
사람들은 음악, 특히 클래식 음악은 모든 예술 가운데 천부적인 재능이 가장 필요한 분야라고 생각한다. 신동이 가장 많이 나오는 분야 역시 음악이기도 하다. 음악 신동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들게 된다. 정확한 음정을 인식하고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인 절대음감, 미묘한 음악적 차이를 구별할 수 있는 청음력, 복잡한 악보를 빠르게 암기하고 연주할 수 있는 기억력, 악기를 연주하는 데 필요한 손가락과 팔의 섬세한 움직임을 조절할 수 있는 신체능력, 음악의 구조와 작곡 기법을 이해하고 자신만의 음악을 창작할 수 있는 지적인 능
'벨르 에포크'(Belle Epoch) 시대의 풍요와 번영이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던 서유럽 사람들에게 제1차 세계대전은 엄청난 정신적 충격을 주었고, 음악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1914년 뜨거운 여름, 사라예보를 방문하던 오스트리아 제국 페르디난트 황태자의 암살은 전 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다. 25년 후의 2차대전과 달리 프랑스는 4년간 이어진 서부전선의 교착 상태로 파리가 점령당하지는않았다. 하지만 끝없이 이어지는 참호전은 수천만 젊은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다. 전쟁은 프랑스 음악가들에게 강한 애국심을 불러일으켰고, 전쟁의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스캔들(Scandal)은 늘 필수적인 소재다. 치욕적인 평판이나 소문, 또는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을 의미하는 스캔들은 서양의 많은 단어들이 그렇듯이 그리스 신화에서 유래한다. 거꾸로 매달아 올리는 함정을 뜻하는 그리스어 스칸달론(scandalon)이 어원이다.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전쟁의 신 아레스와 바람을 피우다가 이를 질투한 남편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몰래 쳐둔 그물 함정에 걸려 다른 신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에서 비롯되었다.20세기 이후의 언론들에서 가십 거리를 제공하
프랑스에는 ‘똘레랑스(tolerance)'라는 특별한 용어가 있다. 영어에서 관용(寬容)을 의미하는 단어와 스펠링까지 같지만, 프랑스어로 쓰면 또다른 의미가 있다.“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그 의견을 주장할 권리를 박해 받는다면 함께 싸울 것이오.” 프랑스 철학자 볼테르(Voltaire)의 이 명언은 똘레랑스 정신을 가장 명료하게 설명하는 문장이기도 하다. 좁은 뜻으로는 남의 잘못이나 허물을 너그러이 용서하는 것을 뜻한다. 넓게는 자신과 다른 특성을 가진 사람의 인격권과 자유를 인정하는 것으로 통용되며, 현대 사
성당과 교회는 중세 이후에도 음악가들에게는 늘 중요한 자리였다. 오케스트라와 오르간, 성가대가 있었고 새로운 작품에 대한 수요도 있었기 때문이다.라이프치히의 성 토마스 교회가 위대한 바흐의 보금자리였고, 빈의 성 슈테판 성당은 하이든과 슈베르트가 소년성가대원으로 어린 시절을 보내던 곳이었다. 루터교 지역이었던 뤼벡과 함부르크 등은 교회의 파이프오르간만으로도 북스테후데 등 음악가들을 불러들였다. 이탈리아는 말할 것도 없었고, 가톨릭의 주요 영토였던 프랑스 역시 성당은 음악가들의 보금자리였다. 오펜바흐 같은 흥행사가 아닌 이상 음악가들
프랑스는 세계사에서 참으로 독특한 나라다. 고대 말 게르만의 대이동 시절 동쪽에서 이동해온 프랑크 족이 세운 나라가 로마제국의 뒤를 잇는 신성로마 제국이다. 샤를르마뉴는 로마 교황이 대관을 해준 첫 신성로마 황제로 등극했다. 중세에는 그 프랑크 족의 신성로마제국이 로마 교황을 아비뇽으로 납치해 약 70년간 로마와 아비뇽 두 곳에 교황이 존재하게 만들었다.근세 초기 유럽을 휩쓴 종교개혁의 와중에 카톨릭을 견지한 프랑스는 36년에 걸친 위그노 전쟁을 치렀고, 영화 의 배경이 된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을 겪으며 국가의
지난해 가을은 이렇게 몰릴 수도 있나 싶을 정도로 세계정상급 오케스트라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는데, 올해는 상대적으로 조금 심심해 보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올해같은 경우야말로 숨은 보석들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일지 모른다.재해 없이 풍성한 결실을 기대하는 가을 가을의 시작은 서울시향과 함께다. 핀란드 지휘자 한누 린투가 7년 만에 다시 돌아오고, 2019년 서울시향 ‘올해의 음악가’로 선정됐던 크리스티안 테츨라프가 상반기 독주회에 이어 다시 서울을 찾아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협연한다. 린투와 동향 작곡가 카이야 사리아호의 관현악곡
2023년의 클래식 음악계는 코로나19가 엔데믹(풍토병)화한 뒤 상당한 회복세를 보였다. 조성진이나 임윤찬 같은 젊은 스타들은 아이돌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유튜브 등에서 고음질 서비스가 가능해지면서 클래식 음악의 저변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측면이다. 하지만 음반시장은 현저히 줄어 음반사들은 확실한 스타들 이외에는 제작을 할 지 말 지를 두고 고민을 거듭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지난해 11월은 세계정상급 오케스트라들이 한꺼번에 몰려와 애호가들의 경제적 부담은 컸으나 코로나 기간에 없다시피 했던 기회에
2023년의 클래식 음악계는 회복과 희망의 기대로 부풀었다. 코로나19와 그 변이의 세계적 유행으로 인해 지난 3년간의 세계는 우왕좌왕하며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전염병의 습격에 어찌할 줄 몰라 했다.그러나 면역도 어느 정도 확보된 것으로 추정되는 시점이 되자, 다시 일상회복의 요구가 높아졌다. 그동안 여행을 못 나갔던 사람들의 보복소비 심리가 나타나면서 항공업계는 비싼 티켓가격에도 불구하고 회복의 기쁨을 누렸다. 보복소비 심리가 클래식 공연 시장에도 나타났는지, 세계의 많은 아티스트들과 오케스트라들도 일제히 해외공연의 물꼬를 틔웠
오늘날 러시아의 국제적 영향력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가 없을 만큼 강력하다.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의 본산이었으나 1991년 소련의 붕괴로 공산주의의 종말을 선언했고, 이제는 사실상 권위주의 국가가 되었다. 가장 거대한 영토에 묻혀있는 석유와 가스 등 천연자원의 부국으로 세계 경제의 한 축이 되었는데, 거대한 동토 시베리아는 아직 개발할 엄두도 못내고 있어 그 잠재력이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다.공연예술에서의 영향력은 더욱 거대한데, 특히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자 부문과 발레 무용수 부문에서 러시아 출신들의 지분은 다른 모든 나라를 합
예술 분야에서 음악, 미술, 연극, 영화 어느 쪽이나 광대한 나라 러시아의 영향은 지대하지만, 특히 발레의 경우 20세기와 21세기에 작품과 음악은 물론 무용수와 안무가에 이르기까지 압도적이라 할 만했다. 차이코프스키는 거기에 가장 주요한 역할을 수행한 음악가로 손꼽힌다. 1689년까지 러시아에는 발레가 없었다. 발레라는 용어 자체가 이탈리아어 춤추다(ballare)에서 온 만큼 발레는 15~16세기 이탈리아의 르네상스 궁정에서 시작되어 프랑스로 전해졌다. 태양왕 루이 14세는 자신이 발레 무용수였을 뿐 아니라 1661년 왕립무용학
예술은 자연의 모방에서 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정교한 인공적인 작업이 되었다. 세련되고 웅장한 작품일수록 시간과 비용과 노력이 많이 든다.예술가에게도 먹고사는 일은 늘 당면 문제였으며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필요했다. 경제적 보상과 무관하게 순수한 예술혼으로 작품을 완성한다고 생각하는 절대적 예술이란 사실상 낭만주의의 이상으로 지나갔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작품 세계를 꽃피운 예술가 뒤에는 든든한 후원자가 있었다. 예술가를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후원자 ‘패트론’(patron)은 아버지를
여성들의 집밖 활동이 사회적 제약을 받고 있던 긴 시기에 역사적으로 위대한 음악가들은 모두 남성들이었고, 남성적인 웅장함을 표현한 음악들이 많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성성이 느껴지는 섬세한 음악은 남성적 악장들 사이에 끼어있는 느리고 아름다운 2악장들이 많다. 낭만시대에 이르러 음악가들은 그 창작의 고통과 영감을 사랑에서 찾는 이들이 많았다. 낭만시대 문학의 대표자인 독일의 시인 괴테는 80대의 나이에도 10대 소녀에게 사랑을 느꼈고, 희곡 에는 그 사랑과 청춘에 대한 욕망이 녹아들어 있다.낭만시대 오페라들의 상당수는
19~20세기에 식민지 경쟁과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범은 민족주의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제국주의라고 사람들은 믿어왔다. 영어로는 내셔널리즘(nationalism)이지만, 번역에 따라 민족주의, 국가주의, 국민주의라고도 표기되는 이 것은 지난 70년간 가장 핫 이슈였다. 민주주의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등장한 많은 신생 독립국의 기본 이념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갈등은 계급갈등과 함께 사회의 혼란을 야기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학자들은 관심을 쏟아 연구했다. 서구 절대왕정의 붕괴에 따라 국민국가가
러시아 음악은 13세기~16세기까지 이어진 무스코비(Muscovy) 시대에 동방정교회의 종교 음악과 오락용으로 사용되는 세속 음악으로 분화 발전했다. 비잔틴 제국의 전통을 이어받은 종소리와 합창에는 지금도 중세음악의 흔적이 남아있다. 17세기 우크라이나 지역의 니콜라이 딜레츠키(1630?~1680)는 러시아 최초의 작곡법 책 (Grammatika musikiyskago peniya)을 남겼다. 단순한 다성음악 위주의 정교회 음악은 1917년 러시아 혁명기까지 교회에서 불려졌다.18세기에 위대한 차르 표트르 1세가 서양
러시아는 현재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전쟁으로 세계의 눈총을 받고 있지만, 러시아는 말 그대로 대국이다. 과거 구소련 시절 2,240만㎢ 세계 제일의 넓은 영토를 자랑하다 소련 해체후 지금은 1,710만㎢로 줄어들었다 해도 2위인 캐나다보다 700만㎢ 이상 더 큰 나라다. 과학기술은 냉전시대 미국과 경쟁의 결과로 세계 2위를 자랑하고, 현재 전쟁에서 위신이 상처를 입었지만 군사력 역시 절대1강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다. 심지어 핵무기 숫자는 미국보다 2,000여 기 가까이 많다. 밀과 원유-가스 수출도 세계 3위권 안에 있을 정도로 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