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버스 김용만의 클래식 프레너미 시리즈20
오케스트라 색채의 마술사들 '림스키-코르사코프 & 라벨' (2)
서양음악의 낭만주의 시대가 개막된 이후 관현악과 오케스트라는 급격히 발전해 지금의 오케스트 형태를 확립했다. 오케스트라 악기들의 발전 과정은 서양 음악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각 악기군의 역사와 발전은 매우 흥미롭다.
바이올린 계열의 악기들은 중동의 라바브(rabab)와 그에 영향을 받아 출현한 유럽 중세의 레벡(rebec)이 조상이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 아마티 가문과 같은 제작자들에 의해 바이올린이 확립되고 명기들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의 바이올린은 주로 교회 음악과 궁정 음악에서 사용되었다. 바로크에서 고전주의 시대로 넘어오며 바이올린은 오케스트라의 중심 악기로 자리 잡았고, 소나타, 협주곡, 교향곡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 시기에 바이올린 제작 기술이 더욱 정교해졌다. 낭만주의 시대 천재 파가니니(Nicolo Paganini)의 출현으로 바이올린의 역할과 기교가 더욱 확대되었으며, 이후 20세기의 천재 하이페츠(Jascha Heifetz)가 몇몇 기법을 제안하는 등 지금까지 다양한 음악 스타일과 연주 기법이 발전해왔다.
비올라의 경우 바이올린보다 먼저 형태가 정립된 악기지만, 바이올린보다 화려한 맛이 떨어져 인기는 별로 없었다. 20세기에 소련에서 유리 바쉬메트(Yuri Bashmet)라는 걸출한 비올리스트가 배출되면서 비로소 독주악기로서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크 시대에 바소 콘티누오(basso continuo)를 담당하던 비올라 다 감바(viola da gamba)에서 유래한 첼로는 17세기 이탈리아에서 그 형태를 갖추었다. 고전주의 시대에는 교향곡과 실내악에서 중요한 저음 파트를 담당했고, 저음의 필요성이 커지면서 나타난 더블베이스는 이보다 큰 음역을 제공하며, 오케스트라의 저음을 보강했다. 첼로는 비교적 일찍부터 독주악기로서의 가능성이 실험되었지만, 더블베이스는 그렇지 못하고 저음반주용의 역할에만 충실했다. 오히려 독주악기로서의 가능성이 나타난 곳은 재즈음악이었다. 20세기 후반 클래식음악에서 독주악기로서의 가능성을 제시한 것은 7대째 더블베이스 연주자인 개리 카(Gary Karr)였다.
러시아 5인조 발라키레프에게 배운 림스키-코르사코프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Rimsky-Korsakov·1844~1908해 러시아 국민음악 5인조의 중심이었던 7살 위의 발라키레프(Mily Balakirev·1837~1910)와 조우한다. 카닐레의 방식은 일방적 레슨이 아니라 함께 2중주를 하고 토론하는 방식이었다. 이 자리에 발라키레프가 합류해 니콜라이의 재능을 알아챘다.
발라키레프는 곧 젊은 니콜라이를 큐이(César Cui)와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에게 소개했다. 모두 20대였지만 작곡가로 알려진 이들과의 만남은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었다. "이전에는 딜레탕트한 친구들 모임에서만 들어봤던, 나에게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은 참으로 특별했다. 그들과 악기 연주, 부분 작곡 등에 대한 실제적이고 전문적으로 토론하는 기쁨은 대단해서 금방 빠져들 수밖에!“
1862년 러시아 해군의 수리와 항해학교를 졸업한 니콜라이는 돛대가 3개인 중형 범선 알마즈(Almaz) 호에 항해사로 배치되어 복무를 시작했다. 발라키레프는 림스키-코르사코프가 항해 사이 러시아에 머무를 때 기초적인 수업을 해주며 작곡을 격려했다. 백과사전적 지식인이었던 발라키레프는 역사, 문학, 비평 분야를 접하며 니콜라이가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도록 촉구했다. 니콜라이가 발라키레프에게 자신이 작곡한 교향곡 e플랫 단조의 도입부를 보여주자, 그는 정식 음악교육 유무와 상관없이 계속해서 작업하도록 격려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알마즈호를 타고 2년 8개월 동안 항해하는 동안 교향곡의 세 악장을 완성한 뒤 귀환하기도 전에 악보를 발라키레프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교향곡 작업에 사로잡힌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피아노를 사서 배에 실었고, 기항지마다 내려서 악보를 샀다. 근무시간이 아닐 때는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의 악기론 논문과 호메로스, 윌리엄 셰익스피어, 프리드리히 실러,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작품을 읽었다. 그는 항해하며 뉴욕, 런던, 리우데자네이루를 보았지만, 외부의 음악적 자극이 부족하여 항해가 길어질수록 음악에 대한 갈증이 약해졌다. 이국적인 나라들이 그를 매혹하기 시작했지만 해군 복무는 결코 그를 기쁘게 하지도 못했고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성격에 적합하지도 않았다.
1865년 5월 장기간의 항해를 마치고 상트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육상 임무는 매일 2시간씩의 사무 업무였다. 그러다 1865년 9월 발라키레프와의 접촉을 통해 다시 음악에 익숙해지고 나중에는 빠져들게 되었다. 발라키레프의 제안에 따라 그는 부족했던 Eb 단조 교향곡의 스케르초에 삼중주를 추가하고 교향곡 전체를 재편성했다. 이 교향곡의 초연은 그해 12월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발라키레프의 지휘로 이루어졌다.
림스키-코르사코프와 발라키레프 사이의 편지들은 교향곡에 대한 일부 아이디어가 발라키레프에게서 유래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발라키레프는 단순히 악곡을 수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종종 피아노로 재구성하곤 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발라키레프의 가르침 혹은 관계를 이렇게 회상했다.
”나와 같은 학생은 발라키레프에게 초기 단계에서 제안된 구성, 예를 들어 처음 4~8마디를 먼저 제출했다. 발라키레프는 초기 구상을 재구성하는 방법을 제시하며 즉시 수정 작업으로 이어갔다. 그는 첫 2마디를 칭찬하고 다음 2마디는 비난하면서 나를 혼란시켰다. 내 구성의 생동감과 풍부함은 무시되기 일쑤인 반면 빈번한 개작을 요구받았다. 자기 비판의 냉철한 통제 하에 작곡시간은 계속 길어지고 또 길어졌다.“
하지만 아마추어였던 림스키-코르사코프에게 이런 군대보다 더했던 초기의 엄격한 훈련이 나중에 전문적 교육을 받은 음악가들보다 훨씬 독창적인 관현악 음색을 작곡기법으로 뒷받침하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당시에는 그것을 몰랐을 뿐이다.
파리음악원에서 두 번이나 퇴학당한 라벨
조셉 모리스 라벨(Joseph Maurice Ravel·1875~1937)은 1889년 유명 피아노 교수 에밀 드콩브(Émile Decombes)의 문하생이 되어 최초의 공개 연주회에 데뷔했다. 이 데뷔를 계기로 소년 모리스는 자연스럽게 전문 피아니스트를 꿈꾸게 되었다. 부모 역시 그의 꿈을 응원해주었고, 모리스는 프랑스 최고의 전문 음악교육 기관인 파리음악원 입학시험에 도전했다. 그해 11월, 모리스는 쇼팽을 연주해 외젠 앙티옴(Eugène Anthiome) 교수의 피아니스트 예비과정에 합격했고, 이듬해 정규과정 학생이 되었다.
라벨은 1891년 음악원내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것 말고는 그다지 눈에 띄는 학생은 아니었다. 반면 작곡가로서는 보이지 않게 발전에 발전을 거듭한 시기였다. 음악학자인 오렌슈타인(Arbie Orenstein)은 라벨에게 1890년대는 "청소년기에서 성숙기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성장의 시기"라고 평가했다. 그는 피아노 교수 베리오(Charles-Wilfrid de Bériot)의 특별한 격려를 받아 눈에 띄지는 않았지만 탄탄한 발전을 이루었다. 또 페사르(Émile Pessard) 교수를 통해 화성학의 진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음악학자 켈리(Barbara L. Kelly)에 의하면 "라벨 자신의 방식에 따라서만 가르칠 수 있었다". 나중에 그의 스승인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é)는 라벨을 이해했지만 1890년대 음악원의 보수적인 교수진에게 용납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라벨은 결국 1895년에 퇴학당하고 만다.
파리음악원 재학 당시에도 라벨은 비녜스(Viñes)나 코르토(Cortot) 등 동급생들만큼 피아노에 몰입하지는 않았고, 이미 작곡가로서의 야망이 더 커져 있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시인 베를렌(Paul Verlaine)과 마로(Clément Marot)의 시에 맞춰 작곡한 '어둡고 깊은 잠(Un grand sommeil noir)' 및 '에스피넷을 연주하는 안느(D'Anne jouant de l'espinette)], 피아노 곡 ‘고풍스런 미뉴엣(Menuet Antique)'과 ‘네 손을 위한 하바네라(Habanera)' 등이 있다.
이 무렵, 부친은 피아니스트로서 성공하는 것에 대한 열망이 희미해진 아들에게 실망하기보다는 카페 피아니스트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던 에릭 사티(Eric Satie)에게 자신의 아들을 소개했다. 젊은 라벨은 드뷔시와 더불어 사티의 독창성과 재능을 인정한 최초의 음악가 그룹이 된다. 사티는 보수적인 파리 음악계에서는 클래식 피아니스트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음악 형식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실험은 라벨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이들의 친분은 후에 라벨과 사티를 인상주의 음악의 범주로 분류하는 연구자들이 나타나게 한 계기가 되었다.
1897년 라벨은 음악원에 재입학하여 포레(Gabriel Fauré)에게 작곡을 공부하고, 앙드레 게달게(André Gedalge)에겐 대위법을 배웠다. 이 두 교수는 전임자들과 달랐고, 특히 포레는 그를 높이 평가했으며 작곡가로서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동료 학생인 칼보코레시(Michel-Dimitri Calvocoressi)에 따르면, 라벨은 "모든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라고 평가할 만큼 인정도 받았다. 하지만 음악원에서 라벨의 입지는 젊은 천재의 음악적, 정치적으로 진보적인 전망을 곱게 보지 않은 음악원장 테오도르 뒤부아(Théodore Dubois)의 적대감 때문에 오히려 나빠졌다. 그는 포레 문하에서 공부하는 동안 ‘셰헤라자데 (Shéhérazade)' 서곡과 단악장 바이올린 소나타를 포함하여 몇 가지 중요한 작품을 썼지만 1900년에 다시 퇴학당했다. 라벨은 1903년 스스로 음악원을 포기할 때까지 청강생으로 수업에 참여했다.
이렇게 다양한 음악적 자극을 받은 라벨은 우선은 자신의 주종목이었던 피아노를 통해서 기존의 문법을 벗어나려는 실험들을 시도한다. 같은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이던 드뷔시와 사티와의 만남은 자신의 방향을 더 확실하게 이끄는 요인이 되었다. 피아노를 통한 초기의 실험은 나중에 관현악에서도 새로운 색채를 시도하며 오케스트라 음색을 확장하려는 노력의 씨앗이 되었다. [뉴스버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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