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버스 김용만의 클래식 프레너미 시리즈 20
오케스트라 색채의 마술사들 '림스키-코르사코프 & 라벨' (6)
서양음악사에서 시대구분은 앞쪽에서는 대체로 정수가 맞아떨어지는 것들이 많았다. 아르스 안티콰(Ars Antiqua)가 1000~1300년 아르스 노바(Ars Nova)가 1300~1450년, 르네상스(Renaissance)가 1450~1600년, 바로크(Baroque)가 1600~1750년이었기 때문이다.
그 다음 고전음악 시대의 종언은 베토벤의 죽음(1827년)으로 보아야 하느냐 최초의 낭만주의 표제음악 환상교향곡(Symphonie Fantastique)이 초연된 1830년으로 보아야 하느냐의 논쟁이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진행중이다. 겨우 3년 차이에 지나지 않지만 전자의 주장은 1750년 위대한 바흐의 서거가 바로크의 종말인 것처럼 고전음악 시대도 일관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후자의 경우 완전히 새로운 형식과 스타일의 선언으로 새 시대를 정의해야 한다는 주장을 근거로 한다. 둘 다 타당한 지점이 있다.
낭만음악의 시대가 어디까지이고, 현대음악의 시작을 언제로 보아야 하느냐 역시 음악사학자들의 논쟁이 계속되는 주제다. 현대미술이라는 용어가 그렇듯이 현대음악도 특정한 사조나 작풍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정확히 언제부터가 '현대'인지도 모호하다. 현대음악의 시기는 대략적으로는 19세기 후반 혹은 20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조차도 100년도 더 된 과거로써 '현대'라 칭하기가 궁색해졌기 때문에, '20세기 음악'이라고 우회적인 용어를 채택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대음악은 현대미술과는 다르게 대중들로부터 관심을 받는 데에 실패한 영역으로 여겨진다. 현대미술을 점 하나 찍고 수 억원을 부른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현대미술이 멋지다고 비싼 값을 치르며 수집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현대음악은 전문적인 연주자들마저 자신의 레퍼토리는 바로크부터 낭만파까지라고 말하는 경우도 상당수다. 미술작품과 달리 현대음악은 집중력과 시간을 요구하면서도 특별히 경제적인 가치도 매겨지지 않아 대중의 외면을 받았다. 게다가 20세기 중반 이후 TV와 음반산업의 성장으로 순식간에 시장을 먹어버린 대중음악은 현대음악을 극도로 초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현대음악 안에서도 음악사적 가치와 대중의 호응을 받은 작품들이 전멸하지는 않았다. 림스키-코르사코프와 라벨은 그 전환기에 우뚝 선 존재들이다. 그들은 20세기 음악의 선구적 역할을 했고 그 전환기에 훌륭한 작품들을 선물했다.
새로운 러시아 민족음악 그룹을 형성한 림스키-코르사코프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Nikolai Andreyevich Rimsky-Korsakov·1844~1908)는 러시아 국민음악파로 음악생활을 시작했지만, 차이코프스키의 조언을 받아들여 전통적 음악기법을 공부하면서 폭이 넓어졌다. 그리고 그 한계를 넘어 당대의 관현악법을 첨단에서 이끄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해갔다.
1877년 중반,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오랫동안 가장 좋아했던 이야기였던 니콜라이 고골(Nikolai Gogol)의 단편 <5월의 밤>에 대해 점점 더 진지해졌다. 아내 나데즈다는 약혼한 날부터 함께 이 이야기를 읽고서 오페라를 쓰도록 격려했다. 1878년 초 그는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해 11월 초에 오페라를 완성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이 작품에 스스로 중요성을 부여한 이유는 작품에 대위법 음악이 많이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위법의 족쇄를 벗어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 오페라를 민요와 같은 선율적 어법으로 썼고, 글린카(Glinka) 스타일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작곡했다. 다음 오페라인 <눈 처녀>(The Snow Maiden)를 쉽게 썼음에도 불구하고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무소르그스키가 1881년에 그리고 보로딘이 1887년에 사망하면서 정신적 고갈로 인해 창작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이 기간에도 쉬지 않고 무소르그스키의 작품을 편집했고 보로딘의 <이고르 공>의 오케스트레이션을 마쳤다.
하지만 힘든 일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1882년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모스크바에서 후원자 벨랴예프(Mitrofan Belyayev)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19세기 중후반 러시아에서 문화예술 후원자로 떠오른 신흥산업재벌 중의 하나였고 그를 통해 철도왕 사바 마몬토프(Savva Mamontov)와 직물 제조업자 파벨 트레티야코프(Pavel Tretyakov)도 만났다. 러시아의 더 큰 영광을 믿었던 그들은 귀족적이기보다 슬라브 원주민적인 재능, 국제적인 예술가보다 민족주의 예술가를 지원하는 경향이 더 컸다. 러시아 예술과 사회의 주류 역시 민족주의가 고조되는 분위기였다.
1883년까지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수도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벨랴예프의 저택에서 매주 열리는 ‘4중주의 금요일(Les Vendredis)'의 정기적인 참석자였다. 당시 10대였던 알렉산드르 글라주노프(Alexandr Glazunov)의 음악적 미래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벨랴예프는 1884년에 글라주노프 교향곡 1번과 갓 작곡한 관현악 모음곡을 올린 공연을 주최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 콘서트와 리허설을 통해 러시아 음악의 공연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고, 벨랴예프가 이를 받아들여 일련의 시리즈가 만들어졌다. 러시아 관현악 콘서트는 1886~1887 시즌에 시작되어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아나톨리 랴도프(Anatoly Lyadov)가 번갈아 지휘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무소르그스키의 <민둥산의 하룻밤>(A Night on the Bold Mountain) 개정판을 완성해 개막 콘서트에서 지휘했다. 이 콘서트 시리즈는 그를 창작의 고갈로부터 벗어나게 해주었다. 그는 이 공연 시리즈를 위해 교향적 모음곡 <세헤라자데>(Scheherazade), ‘스페인 기상곡’(Capriccio Espagnol)과 ‘러시아 부활절 서곡’을 썼다. 그는 이 세 작품에 대해 "대위법을 사용에서 상당한 감소를 보여주고...내 작곡의 기술적 관심을 유지하는 모든 종류의 형상의 강력하고 거장적인 발전으로 대체되었다"고 평가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러시아 관현악 콘서트뿐만 아니라, 벨랴예프로부터 러시아 작곡가들을 위한 다른 프로젝트에 대한 조언과 지도 역시 요청받았다. 벨랴예프 역시 그를 고려하여 “음악적인 문제를 포함해 모든 것에 대해 나에게 상담하고 모든 사람이 나를 벨랴예프 그룹의 수장으로 인정했다”고 림스키-코르사코프는 회고했다. 벨랴예프는 1884년 글린카 상을 제정해 매년 수상자를 선정했고, 1885년에는 음악출판사를 설립하여 보로딘, 글라주노프, 랴도프(Lyadov)와 당연히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작품들을 자비로 출판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 자금, 출판 또는 공연을 지원할 작곡가를 고르기 위해 벨랴예프는 림스키-코르사코프와 랴도프, 글라주노프로 자문위원회를 구성했다.
그가 주축이 된 벨랴예프 서클의 작곡가들은 이전의 러시아 5인조(The Five)와 마찬가지로 민족주의적 성향을 띠어 민속 음악과 이국적인 멜로디, 화성 및 리듬 요소를 활용한 독특한 러시아 스타일의 클래식 음악을 지향했다. 다만 5인조와 달리 이 작곡가들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상트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수년 동안 학문적이고 전통에 기반한 작곡법을 연구했듯이 충분한 음악적 배경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림스키-코르사코프는 벨랴예프 서클의 작곡가들에 대해 "진보적이다... 기술적인 완벽함에 큰 중요성을 두지만... 또한 더 안전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현대음악의 혁명기를 함께 한 라벨
조셉 모리스 라벨(Joseph Maurice Ravel·1875~1937)은 1910년 독립음악협회의 결성을 주도하여 파리 음악계의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작곡가로는 회장으로 위촉된 포레와 드뷔시, 무명이던 헝가리 출신 코다이가 영입됐고 연주자로는 자신과 포레, 슈미트(Florent Schmitt), 블로흐(Ernest Bloch), 피에르 몽퇴(Pierre Monteux) 등이 참여했다.
관현악에서 뛰어난 모습을 보이던 라벨은 1912년 3편의 발레 작품을 초연했다. 첫 작품은 ’나의 엄마 거위(Ma mère l'Oye)'의 편곡되고 확장된 버전으로 1월에 테아트르 데자르(Théâtre des Arts)에서 개봉되었다. 메르퀴르 드 프랑스(Mercure de France)가 "완전히 매혹적이며 미니어처의 걸작"이라고 평하는 등 평가는 훌륭했고 음악은 콘서트 레퍼토리에 빠르게 진입했다. 이 곡은 파리 초연 후 몇 주 만에 런던의 퀸즈 홀에서 연주되었고, 같은 해 말 프롬스 공연에서도 반복 연주되었다. 명성높은 더 타임스(The Times)는 "작품의 매혹...아주 실제적인 것이 아무것도 없이 떠다니는 것처럼 보이는 신기루의 효과"를 칭찬했다. 뉴욕 관객들도 같은 해 이 작품을 감상했다.
1912년 두 번째 발레는 <아델라이데 또는 꽃의 언어>(Adélaïde ou le langage des fleurs)로 ’고상하고 감상적인 왈츠‘(Valses Nobles et sentales)에 안무되어 4월에 샤틀레(Châtelet) 극장에서 개막했다. 두달 후 같은 극장에 올려진 <다프니스와 클로에>(Daphnis et Chloé)는 라벨의 관현악 중 가장 큰 규모로, 완성하는 데 엄청난 수고와 수년의 시간이 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09년경 파리 문화계에 충격을 주고있던 러시아 발레단(Ballets Russes)을 위해 임프레사리오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가 의뢰한 것이었다. 발레 뤼스의 안무가인 미하일 포킨(Mikhail Fokine) 및 디자이너인 레옹 박스트(Léon Bakst)와 함께 작업을 시작한 라벨은 개별 곡을 지속적인 음악으로 대체하는 현대적인 댄스 접근 방식으로 명성을 얻은 포킨에게 관심이 커져서 먼저 안무 구상에 대해 자세히 논의한 후 음악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창작 협력자들 사이에 잦은 의견 차이가 있었고, 작업이 늦게 완료되는 바람에 초연에 대한 리허설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던 작품이었다.
초연 때 관객들의 반응이 엇갈렸던 <다프니스와 클로에>는 이듬해 몬테 카를로와 런던에서 성공적으로 부활했지만 여전히 반응은 별로 좋지 않았고 공연은 빠르게 막이 내려졌다. 발레를 완성하느라 노심초사한 라벨은 건강에 큰 타격을 입었다. 신경쇠약이 발병해 초연 후 몇 달 동안 휴식을 취해야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라벨은 1913년에 거의 작곡을 하지 않았다. 그는 무소르그스키의 미완성 오페라 <호반시치나>(Khovanshchina)의 공연 버전에서 스트라빈스키(Stravinsky)와 협력했다. 이해 그의 작품은 소프라노와 실내악 앙상블을 위한 ’말라르메의 세 개의 시‘(Trois poèmes de Mallarmé)와 두 개의 짧은 피아노 작품인 ’보로딘 스타일로‘(À la manière de Borodine)와 ’샤브리에르 스타일로‘(À la manière de Chabrier)였다.
현대음악의 중요한 분수령이었던 문제의 1913년, 라벨은 드뷔시와 함께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봄의 제전> 드레스 리허설에 참석한 음악가에 포함되어 있었다. 스트라빈스키는 나중에 라벨만이 그 음악을 즉시 이해한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라벨은 이 작품의 초연이 드뷔시의 오페라 <펠레아스와 멜리장드>(Pelléas et Mélisande)의 초연과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간주될 것이라고 예측했고 그 예상은 들어맞았다. 그들은 기존의 전통에 어마어마한 충격을 주며 등장한 현대음악의 동시대를 살았고 그 시대를 열어젖힌 주역들 중의 하나였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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