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버스 김용만의 클래식 프레너미 시리즈21

헝가리 민족음악의 존재증명 /버르토크 & 코다이' (3)

민족음악학(民族音樂學)은 민족학(ethnology)과 음악학(musicology)이 합쳐진 학문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서양 클래식이 아닌 음악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특히 비교음악학은 서구 열강의 식민지 음악과 서양 음악을 '비교'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식민지의 음악과 서양 음악과의 비교를 통해 ‘음악이 어떻게 원시적인 형태에서 서양 음악과 같은 진화한 형태가 되었나’의 해명이 목표이기도 해서 문화식민주의의 색채를 너무 강하게 띠는 경향이 있다. 이같은 이유로 최근에는 사용하지 않는 용어가 되었다.

민족음악학이란 용어는 1950년 네덜란드 학자인 얍 쿤스트(Jaap Kunst)가 제안한 것으로 문화적 맥락내에서의 연구가 강조되는 음악의 인류학(Anthropology of Music)이다. 민족음악학은 민속음악, 동유럽의 예술음악 및 구전되는 현대음악뿐만이 아니라 음악의 기원, 음악문화의 변화, 음악의 상징성, 음악에서의 보편성, 사회에서의 음악의 기능, 음악체계의 비교, 그리고 음악과 무용의 생태학적 토대 등의 관념적 문제들을 다루는 학문이다.

민족음악학자들은 보통 다른 문화의 음악을 연구하는데, 이것이 민족음악학을 음악사학과 구분짓게 하는 특징적인 요소다. 이 학문은 문화로서의 음악의 연구, 음악문화의 비교 연구로부터 인간 음악행위의 해석학적 연구(Hermeneutic Science of Human Musical Behavior)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민족음악학계의 국제학회가 조직되어 그중 두 개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는데, 국제민속음악학회 ICTM(International folk music council)는 1947년, 민족음악학회 SEM(Society for Ethnomusiclogy)는 1955년에 각각 조직되었다. 

미국 망명 후 힘든 노년 버르토크

벨라 버르토크(Béla Bartók·1881~1945)는 제1차 세계대전의 결과 그가 사랑했던 많은 지역인 트란실바니아, 바나트(그가 태어난 곳), 브라티슬라바(그의 어머니가 살았던 곳, 포조니) 등이 헝가리에서 분리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후계 국가들 간의 정치적 관계로 인해 헝가리 밖에서 그의 민속음악 연구가 금지되자 실망에 빠졌다. 

노년의 버르토크 부부 사진.
노년의 버르토크 부부 사진.


1926년 버르토크는 유럽과 미국 순회공연을 위해 피아노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중요한 작품이 필요했다. 특히 미국 작곡가 헨리 카웰의 공연에 연주된 피아노에서 강렬한 ‘톤 클러스터(tone cluster)'를 사용한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후 카웰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고 자신의 기법을 사용할 수 있도록 요청해 허락받았다. 첫 피아노 협주곡을 위한 준비 과정에서 그는 솔로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 ‘문 밖에서’ 외 9개의 소품을 썼고, 모두 클러스터를 두드러지게 활용했다. 클러스터는 피아노의 타악기적인 특성을 강조한 것으로써 단2도와, 단2도의 전위 음정인 장7도가 중심이 되어 화음 형태로 사용된 것이다. 

톤클러스터 기법을 그린 악보의 예.
톤클러스터 기법을 그린 악보의 예.


1927년 3월 그는 바르셀로나를 방문하여 리세우 극장(Gran Teatre del Liceu)에서 파우 카잘스 오케스트라(Orquestra Pau Casals)와 ‘피아노를 위한 랩소디’를 연주했고, 카탈루냐 음악궁전에서 코블라 바르셀로나(Cobla Barcelona) 콘서트에 참석했다. 비평가 호안 용게라스(Joan Llongueras)에 따르면 "그는 사르다나, 무엇보다도 우리 음악의 신선함, 자발성 및 생명력에 매우 관심이 있어 테노라와 티블의 메커니즘을 알고 싶어했고 코블라의 구성과 각 악기의 확장 및 특성에 대한 데이터를 요청했다"고 한다. 

그는 성숙해지면서 점점 더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았고, 결국 도달한 마지막 시기의 스타일은 정의하기 어렵지만 ‘동서양의 종합’이라고 할 수 있겠다. 버르토크가 쓴 현악 사중주 3번(1927), 4번(1928), 5번(1934)과 이후 ‘현악, 타악기 및 첼레스타를 위한 음악’(1936)과 ‘현악 오케스트라를 위한 디베르티멘토’(1939), 마지막 현악 4중주인 6번(1939)들은 그의 성숙한 스타일을 보여준다. 성숙한 시기에 버르토크는 비교적 적은 작품을 썼지만 상당수는 대규모 편성을 위한 곡들로 종종 고전적 형식을 고수했다. 

1940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유럽의 정치 상황이 악화되자 버르토크는 나치와 헝가리가 삼국 동맹에 따라 추축국 동맹에 참여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했다. 1933년 나치 집권 후 독일에서의 연주를 거부하는 등 버르토크의 반파시스트적 견해는 헝가리의 기득권과 갈등을 빚었다. 그는 1940년 10월 4일의 유언장에서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이름이 더 이상 국가행사에 사용되지 않을 때까지 자신의 이름을 딴 광장이나 거리가 없어지기를 요청했다. 버르토크는 먼저 자신의 악보들을 국외로 보낸 후, 1940년 10월 두 번째 부인 디타 파스토리와 함께 마지못해 미국으로 이주했다. 

1942년 디타 사이에 난 아들 페테르는 미국 해군에 입대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태평양에서 복무했고 나중에 플로리다에 정착하여 녹음 및 음향 엔지니어가 되었다. 반면 첫 결혼에서 태어난 장남 벨라 버르토크 3세는 헝가리에 남아 1980년대 초에 은퇴할 때까지 철도 공무원으로 일했다.

버르토크는 태평양 전쟁이 종전되던 1945년 사망 직전 미국 시민권을 획득했지만 미국은 결코 집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작곡하기도 어려웠다. 그는 미국에서 피아니스트, 민족음악학자, 교사로는 잘 알려졌으나 작곡가로는 잘 알려지지 않아, 미국에서는 그의 음악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그와 그의 아내 디타는 몇몇 콘서트를 열었지만 흥행은 실패했다. 헝가리에서 녹음을 몇 번 했던 버르토크는 미국에 온 후 컬럼비아 레코드에서도 녹음을 해 나중에 LP로 발매되었다.

다행스럽게 컬럼비아 대학 연구기금의 지원을 받아 수년간 버르토크와 디타는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민요를 대량으로 수집했다. 미국 초기의 경제적 어려움은 출판 인세, 교육 및 공연 투어로 완화되었고 친구와 지지자들 덕분에 돈과 일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지만, 버르토크는 자존심 때문에 종종 친구들이 여는 주머니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는 미국음악저작권협회(ASCAP)의 회원은 아니었지만, 협회는 버르토크의 마지막 2년간의 모든 의료비를 지불했다. 

버르토크는 1942년에 그동안 아팠던 오른쪽 어깨 증상이 심해졌고 열도 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젊은 시절에 겪은 결핵의 재발인 줄 알았지만, 1944년 4월 백혈병으로 진단받았을 때 할 수 있는 치료법이 거의 없었다. 건강이 쇠약해지면서 오히려 버르토크는 더 많은 창조적인 에너지를 찾았고, 부분적으로는 바이올리니스트 요제프 시게티(Joseph Szigeti·1892~1973)와 자신의 부다페스트 음악원 제자 출신 지휘자 프리츠 라이너(Fritz Reiner·1888~1963) 덕분인 마지막 걸작들을 만들어냈다. 

쿠세비츠키(Koussevitzky·1874~1951)가 지휘한 보스턴 심포니는 1944년 12월에 유작이 된 ‘오케스트라를 위한 협주곡’을 초연했는데, 버르토크 사후 가장 인기 있는 작품중 하나가 되었다. 1944년에 바이올리니스트 예후디 메뉴인(Yehudi Menuhin·1916~1999)도 솔로 바이올린을 위한 소나타를 의뢰했다. 1945년에 버르토크는 아내 디타의 42번째 생일에 깜짝 선물로 우아하고 거의 신고전주의적인 작품인 피아노 협주곡 3번을 작곡했지만, 그녀의 생일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9월에 악보가 완성되지 않은 채 사망했다. 비올라 협주곡도 시작은 했지만, 비올라 독주와 오케스트라 일부분의 스케치만 남았다. 

부다페스트의 소박한 버르토크기념관.
부다페스트의 소박한 버르토크기념관.


벨라 버르토크는 투병 끝에 1945년 9월 26일 백혈병 합병증으로 뉴욕에서 6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장례식에는 겨우 10명만이 참석했는데 미망인 디타와 아들 페테르 외에 제자였던 피아니스트 죄르지 산도르(György Sándor·1912~2005)가 있었다. 시신은 뉴욕 하츠데일의 펀클리프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1980년대 후반 헝가리 정부는 그의 두 아들 벨라 3세와 페테르와 함께 그의 유해를 발굴하여 부다페스트로 옮겨 매장할 것을 요청했고, 1988년 7월 7일에 그를 위한 국장을 마련했다. 그의 시신은 부다페스트의 파르카스레티 묘지(Farkasréti Cemetery)에 버르토크의 100번째 생일이었던 1982년에 사망한 디타의 유해 옆에 다시 안장되었다.

버르토크의 음악은 20세기 음악의 사운드를 극적으로 바꾼 두 가지 경향을 반영한다. 첫째, 작곡가들에게 지난 200년 동안 제공되었던 음계적 화성 체계의 붕괴와 둘째, 음악적 영감의 원천으로서 민족주의의 부활이었다. 그는 새로운 조성 형식을 찾으면서 헝가리 민속 음악과 카르파티아 분지의 다른 민속 음악, 심지어 알제리와 터키의 민속 음악에 관심을 보였고, 토착 음악과 기법을 사용한 모더니즘의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

세계의 음악교육학을 이끈 코다이 

졸탄 코다이(Zoltán Kodály·1882~1967)의 모든 작품들은 형식과 내용이 모두 독창적이다. 고전주의, 후기 낭만주의, 인상주의, 모더니즘 전통을 포함한 서유럽 음악 스타일에 대한 고도로 정교한 숙달과 헝가리의 민속 음악에 대한 깊은 지식과 존경이 혼합되어 나타났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주요 지정학적 변화와 타고난 소심한 기질 때문에 젊은 시절 별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다 1923년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헝가리 시편’(Psalmus Hungaricus)이 부다와 페슈트 두 도시의 통합 50주년 기념공연에서 초연되어 비로소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다.

부다페스트의 리스트 음악원 교수로 일하던 1919년 그는 돌연 징계에 회부되었으나 이듬해까지 걸친 청문회 결과 징계는 없었고 1921년 다시 음악원 교수로 복직해 교육과 작곡을 계속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다 ‘헝가리 시편’의 성공으로 그는 확실히 자리를 잡아 음악교육 측면에서의 관심을 더욱 깊이 실행하면서 1925년 ‘아이들을 위한 합창곡집’을 초연했다. 1929년에는 처음으로 교육 원칙을 공식화한 연구인 <어린이 합창단 원론>을 발표한다.

‘헝가리 시편’은 코다이를 해외공연으로도 이끌어 1926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공연이 이루어졌다. 그해 10월 부다페스트에서 초연된 <하리 야노쉬>(Háry János)는 이듬해인 1927년 바르셀로나에서 연주되었고, 직접 지휘한 ‘헝가리 시편’도 암스테르담에서 호평받아 12월에 첫 영국 연주여행을 갔다. 1930년 4월에는 토스카니니(Arturo Toscanini 1867~1957)와 뉴욕 필하모닉이 코다이의 작품 ‘여름날 저녁’(Summer Evening)을 공연했고, 11월에는 지휘자 프리츠 부시(Fritz Busch 1890~1951)가 드레스덴에서 ‘마로셰크의 춤’(Dances of Marosszék) 오케스트라 버전을 초연하며 그의 명성이 높아졌다. 2차대전 중인 1939년에는 빌렘 멩엘베르흐(Willem Mengelberg·1871~1951)가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허바우(Amsterdam Concertgebouw) 교향악단을 지휘해 공작 변주곡(Peacock Variation)을 연주하고 1941년에는 시카고 심포니가 의뢰한 협주곡이 초연되기도 했다.

코다이 음악극 '하리 야노쉬' 공연장면.
코다이 음악극 '하리 야노쉬' 공연장면.


페테르 파즈마니 대학교(Péter Pázmány University)에도 임용되면서 혼성 합창단을 위한 <마트라 그림책>(Mátra Pictures)을 완성한 코다이는 1932년 부다페스트 오페라극장에서 <물레 방>(Spinning Room)을 초연했고 50번째 생일을 기념하는 축하 콘서트를 선물받는다. 이듬해에는 <갈란타의 춤>(Dances of Galánta)이 초연된다. 이런 일련의 공로로 1934년 코다이는 국가 문학예술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1937년 출판된 <헝가리 민속음악>이 다양한 외국어로도 번역출간되면서 코다이의 국제적 명성이 높아지자 1943년 헝가리 예술과학 아카데미는 그를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제2차 세계대전의 포성이 헝가리를 덮칠 때에도 코다이는 부다페스트를 떠나지 않았다. 폭격으로 파괴되고 포위당한 가운데 나치에 대한 심정적 반대자였던 코다이는 1945년 2월 전쟁에 지친 국민들을 위해 부다페스트 오페라극장 탈의실에서 ‘짧은 미사’(Missa brevis)를 초연했다. 그는 이듬해 헝가리 문화예술위원회 회장으로 임명되는 등 헝가리 국민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다. 

1946~47년 코다이는 처음 미국으로 초청받아 자신의 작품 위주의 수많은 콘서트를 진행했고, 1947년 하반기에는 소련으로도 첫 연주여행을 갔다. 그해 헝가리 예술과학 아카데미 회장이 된 그는 4년간 임기를 수행했다. 회장 임기 마지막 해 그는 아카데미에 민족음악학 분과를 만들었고, 이듬해 칼로 민속공연단(Kálló Folk-Dances)과 함께 국립민속공연단(State Folk Ensemble)의 데뷔 공연을 해냈다. 

1940년대에 발전시킨 헝가리 음악교육 프로그램은 코다이 방식의 기초가 되었다. 코다이 자신은 포괄적인 방식을 기록하지 않았지만 음악교육에서 따라야 할 원칙을 확립했으며, 이러한 원칙은 2차 세계 대전 이후 음악교육자들에 의해 널리 채택되었다. 코다이는 스스로 창안한 코다이 수신호(hand signals) 등 자신의 음악교육을 헝가리는 물론 국제적인 컨퍼런스들에서 널리 전파했다.

1956년 소련의 위성국가 간섭에 저항해 일어난 최초의 대규모 민주화운동인 헝가리 혁명 당시 어느 시점에서 헝가리 노동조합연맹은 ‘그의 위대한 국내적 및 국제적 명성 때문에’ 코다이를 대통령으로 하는 정부를 구성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으나, 혁명은 12일만에 소련군의 무자비한 탄압 아래 진압되었다. 그러나 소련은 시위의 재발을 고려해 코다이를 건드리지 않았다.

한편, 코다이의 가정사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1954년 다리가 부러진 엠마를 간호하기 위해 코다이는 병원으로 이사하다시피 했으나, 1958년 결국 결혼 48년만에 사망했다. 그는 그 사이에도 친구 버르토크의 피아노 전곡 라디오 공연(1955년 1월 1일)을 기획하고 음악원에서 ‘지리니의 찬가’(Hymn of Zrínyi)를 초연했으며, 1955~1956년 사이 버르크를 기념하는 음악축제를 이끌었다. 엠마 사망 후 13개월이 경과한 1959년 12월, 코다이는 리스트 음악원에서 19세의 학생으로 재학 중이던 사롤타 페체리(Sarolta Péczely)와 결혼해 1967년 부다페스트에서 84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행복하게 살았다.

코다이의 국제적 명성은 점점 더 높아져 1960년에는 영국을 방문해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고, 자신의 작품들에 대한 녹음을 여름 내내 감독했다. 그러나 건강이 안 좋아진 그에게 이해 말 심장마비가 찾아와 고통을 받아야 했다. 이듬해 8월 코다이는 캐나다 퀘벡에서 국제 민속음악학회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1962년 코다이의 80번째 생일에는 부다페스트와 전 세계에서 대규모 축하 행사가 열려 위대한 음악교육자의 업적을 기렸다. 두 해 뒤에는 음악교육의 세계 최대단체인 국제음악교육협회(ISME International Society for Music Education)의 부다페스트 총회에서 명예 회장으로 선출되어 그의 음악교육법이 전 세계에 영향을 미침을 다시 한 번 증명했다. 1965년 그는 빈에서 헤르더상(Herder Prize)을 수상하고 미국으로 두 번째 여행을 했으나 건강은 조금씩 더 악화되고 있었다. 1966년에는 미국으로 다시 초청받아 스탠포드 대학에서 특별 강연을 했고 마지막 완성작인 '라우데스 오르가니'(Laudes Organi)가 애틀랜타에서 초연되었다.

부다페스트 소재 규모가 큰 코다이박물관.
부다페스트 소재 규모가 큰 코다이박물관.


1967년 그는 다시 찾아온 심장마비로 손쓸 새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혁명 중에 대통령으로 추대될 만큼 헝가리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듬뿍 받았던 그의 장례식에는 엄청나게 많은 부다페스트 시민들이 장례식장에 줄을 이어 그의 타계를 추모했다. 그가 그토록 헌신했던 어린이합창단의 추모곡 노래와 수만명의 애도행렬 후 그의 시신은 부다페스트의 파르카스레티 묘지(Farkasréti Cemetery)에 안장되었다. 나중에 친구 버르토크의 시신도 미국에서 옮겨져 그와 가까운 곳에 다시 안장되었다.

그의 출생지인 페치(Pécs) 시는 1976년 그의 명예를 기리기 위해 센트 이스트반(Szent István) 광장에 실물 크기의 청동 조각상을 세웠다. 조각가 임레 바르가(Imre Varga)는 조각상의 뒷면이 대성당을 향하고 옛 어린이 놀이터를 마주 보도록 배치했는데, 이는 어린이를 위한 음악 교육에 평생 헌신한 코다이를 상징한 것이었다. / 뉴스버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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