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슨 황, 이재용, 정의선의 치킨집 결의에 부쳐

10월 30일 서울 삼성동 인근 깐부치킨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 그룹 회장이 회동할 것으로 알려지자 상가 앞 도로가 취재진과 시민들로 붐비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탁현민도 못 해낼 깐부 회동의 청중 동원

삼국지연의의 도원결의를 자연스럽게 연상시키는 장면이었다. 시대가 서기 2세기 후반에서 21세기 전반부로, 무대가 중국 화북지방의 복숭아밭에서 서울 강남의 치킨집으로, 제물이 검은 소와 흰 말에서 순살치킨과 치즈스틱으로, 맹세의 내용이 황건적 토벌에서 전 세계 인공지능(AI) 시장 평정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주인공들의 얼굴도 당연히 달라졌다. 유비, 관우, 장비 3인의 의형제에서 황인훈(미국식 이름 젠슨 황), 이재용, 정의선 세 억만장자 겸 기업인으로.

우리나라에서 며칠 전 개최된 '2025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성사된 황인훈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이른바 깐부 회동 이야기다.

세 기업인의 이례적인 소맥 번개 모임은 이 회장의 선친인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과 황 최고경영자 사이의 개인적 인연을 비롯해 무수한 뒷얘기를 낳았다. 황인훈이 한국의 주요 정보통신기술(ICT) 업체들에게 26만장의 최신형 그래픽처리장치(GPU)를 공급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해당 기업들은 물론이고 주식시장에서까지 훈풍이 불고 있다.

소싯적에 용산 전자상가 일대를 직접 누비면서 잔뼈가 굵었다는 무용담을 자랑스레 털어놓은 황인훈의 통 큰 납품 약속은 1970년대에 대한민국 경제를 두 차례나 휘청거리게 했던 오일쇼크의 충격과 공포를 여전히 생생하게 기억하는 세대에게는 마치 원유를 가득 싣고 중동 산유국에서 출발한 수십만 톤의 초대형 유조선이 우리나라 항구에 막 입항했다는 소식처럼 들렸으리라. 반도체가 첨단산업의 쌀로 자리매김했다면, 엔비디아가 압도적 시장 점유율을 만끽해온 그래픽처리장치는 인공지능 시대의 혈액처럼 귀한 대접을 받는 양상이다.

빠르고 명민한 디지털 시대의 총아일 인공지능 분야가 아니라 느리고 둔탁한 아날로그 시대의 마지막 잔재처럼 여겨지는 정치 컨설팅 업종에 한 발을 걸쳐놓은 필자는 주류적 분석과는 상당히 엇나가는 이단적 접근법을 시도하고 싶어졌다. 제각기 손에 휴대전화를 들고서 깐부 회동 광경을 열심히 찍고 있던 수많은 평범한 청년들의 존재가 무척이나 인상적인 까닭에서였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근처 사무실에서 일하는 직장인일 테고, 일부는 취업준비생 또는 학생들일 테고, 또 일부는 단순한 호기심 차원에서 현장을 찾은 누리꾼들일 터이다. 확실한 사실은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불미스러운 돌발사태에 대비해 각자의 고용주를 수행·경호하러 온 엔비디아,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3사 직원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다수 구경꾼은 자발적으로 모여들었다는 점이다. 작게(?)는 수조 원에서 크게는 수십조 원에 이르는 천문학적 액수의 자산을 보유한 내로라하는 글로벌 기업 총수들이 자기 돈은 단 1원도 쓰지 않고서 적잖은 숫자의 청중을 동원하는 데 성공한 셈이다.

이날 회동의 절정은 세 사람이 코엑스에서 열린 '지포스 게이머 페스티벌' 행사에 나란히 모습을 드러냈을 때였다. 무대에 오른 황인훈과 이재용, 정의선이 마이크를 잡고서 입을 열 때마다 장내는 뜨거운 환호와 우렁찬 박수 소리로 가득했다. 역시나 자발적 함성이고 갈채였고, 청중의 대부분은 치킨집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2030 청년세대였다.

혹자는 이들이 혹시 떡고물이라도 생길까 하여 10월 30일 저녁에 강남으로 몰려왔다고 주장하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요즘 젊은 친구들은 실리와 계산에 관해서라면 영악할 정도로 정확하고 빈틈없다. 뭐라도 생길 데와 국물도 없을 곳을 철저하게 구분할 줄 안다.

2025년 10월 30일 목욕일 밤, 세 기업인의 일거수일투족은 다수의 유튜브 방송 채널과 주로 젊은이들이 방문하는 인터넷 커뮤니티 웹사이트를 통해 실시간으로 생중계되다시피 했다. 시청자와 접속자가 폭주했다.

나는 그 순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참여정부 중반 체념 반, 탄식 반으로 말했던 유명한 명제가 문득 귓가에 맴돌았다.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지금은 권력보다도 몇 배는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요소가 위치를 이동했다. 민심이 시장으로 넘어간 것이다. 그것도 하필이면 앞으로 살아온 날들과 비교해 살아갈 날들이 훨씬 더 많은 청년세대의 민심이.

한번 가정해보자. 만약 같은 날, 같은 시간대에, 같은 장소에서 민주노총 위원장, 한국노총 위원장, 고용노동부 장관 3인이 깐부 회동 먹방을 진행했다면 과연 청년들이 몇 명이나 이걸 보려고 그곳으로 달려왔을까? 필자가 한 가지는 자신감을 갖고 단언할 수가 있겠다. 머리가 진즉에 반백이 된 나이든 노조원들이 단체로 특정한 색깔의 조끼 맞춰 입고서 노동계 인사들의 회합 장소 앞에 그야말로 조직적이고 일사불란하게 집결했으리라고. 그 조직성과 일사불란함이 남한 사회의 조직노동을 한층 더 흘러간 물처럼 보이게 만들었으리라고.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10월 30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엔비디아의 그래픽카드(GPU) '지포스' 출시 25주년 행사 단상에 올라 경품 추첨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국가는 어떻게 버림받는가

시장의 반대말은 통상적으로 국가이다. 한국의 국가기관은 행정부와 사법부와 입법부 순서대로 추레한 몰골을 차례차례 드러냈다.

행정부는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에 비겁하게 맹종함으로써 도덕적 파산을 맞이했다. 국가 사법기구의 양대 축일 검찰과 법원은 윤석열 일당이 자행한 친위 군사쿠데타 기도를 추상같이 엄벌하기는커녕 도리어 감싸다가 여론의 욕받이 신세가 되고 몰았다. 윤석열이 선포한 비상계엄을 신속하게 해제해 잠시 주가를 올리는 듯했던 입법부 즉 국회는 독립된 국가기관의 역할을 팽개치고 수퍼챗에 눈먼 저질 유튜버 노릇을 불사한 일부 국회의원들로 말미암아 예전의 악명을 오롯이 회복했다.

국가가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심란하고 우울한 세상에서 청년들이 시장에 마지막 기대와 희망을 거는 일을 그들이 군사독재의 폭정을 겪지 않은 탓으로, 악덕 재벌의 횡포를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무조건 매도할 수 있을까? 현재의 중장년 세대가 민주화 운동에 나서자 당시의 기성세대는 6·25를 겪지 않아 철이 들지 않아 날뛴다는 식으로 그때 청년들의 진지한 문제의식을 다짜고짜 폄하했다.

서두의 도원결의로 다시 돌아가자. 유비, 관우, 장비 3형제는 한날한시에 죽기를 맹세하며 의형제를 맺었다. 반면, 황인훈과 이재용과 정의선은 상대가 망하면 같이 망할 생각이 터럭만큼도 없다. 경쟁자의 불행을 나의 행복으로 최대한 활용하려 각종 기획안과 사업계획서를 어서 내놓으라고 부하 임직원들을 끊임없이 닦달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민심이 시장으로 확연히 넘어간 일을 여야를 막론하고 기성 제도정치권 구성원들은 인식할 능력도, 인정할 의지도 없다는 점이다. 이재명 대통령은 내년도 정부 예산안을 설명하는 국회 시정연설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산업화의 고속도로를 깔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보화의 고속도로를 낸 것처럼 AI 시대의 고속도로를 구축하겠다고 역설했다.

이 대통령이 권력에 뒤이어 민심마저 사장으로 넘어간 상황에서 기업에 의존하지 않고 AI 고속도를 제때 완공할 수 있을까? 이재명 정부의 보수화와 용산 대통령실의 우경화를 질타하기 전에 정청래 현 대표를 위시한 집권 여당인 더불어민주당 사람들은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 이후 지난 반년 동안 본인들이 무엇을 했는지를 냉정하게 돌아볼 필요가 있다,

공희준은 “산업의 쌀이 반도체라면, 모든 콘텐츠의 쌀은 글”이라고 믿으며 정치평론과 인물비평을 중심으로 PC통신 시절부터 SNS 시대인 지금까지 글쓰기에 전념해왔다. '강남좌파', 먹고사니즘' 같은 21세기 한국사회의 시대상이 담긴 촌철살인의 신조어를 만들어낸 진짜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수만 평전>  <지금은 강남시대>  <보수의 종말>  <퇴진하라> 등의 책을 만들었다.  

※ 뉴스버스 외부 필자와 <오피니언> 기고글은 뉴스버스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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