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버스 김용만의 클래식 프레너미 시리즈 22

격변기 러시아 낭만주의자들 '라흐마니노프 & 프로코피예프' (4)

20세기 초 유럽 문화예술에 ‘러시아 혁명’을 불러온 발레 뤼스(Ballet Russes)는 처음에는 파리의 모가도르 극장(Théatre de Mogador)을 주무대로 활용하다 1차대전 후 몬테카를로(Monte Carlo)로 이동하였다. 

전통적 고전 발레에 일대 변혁을 일으킨 발레 뤼스의 무용수 및 안무가의 리스트에는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 바슬라프 니진스키(Vaslav Nijinsky)와 브로니슬라바 니진스카(Bronislava Nijinska) 남매, 안나 파블로바(Anna Pavlova), 이다 루빈슈타인(Ida Rubinstein), 리디아 로포코바(Lydia Lopokova), 알리시아 마르코바(Alicia Markova), 타마라 카르사비나(Tamara Karsavina), 미하일 포킨(Michel Fokine), 마틸데 크셰신스카야(Mathilde Kschessinskaya), 세르주 리파르(Serge Lifar), 레오니드 마신(Léonide Massine) 등 레전드들이 즐비하다. 

발레 뤼스의 파리 모가도르극장 공연 사진.
발레 뤼스의 파리 모가도르극장 공연 사진.


발레 뤼스와 함께 한 작곡가들 역시 프로코피예프는 물론 드뷔시, 라벨, 사티, 레스피기, 풀랑크, 다리우스 미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등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그중 가장 특징적인 경우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로 그가 무명으로 작곡을 막 시작할 무렵 발레 뤼스를 만든 디아길레프에게 발굴되었다. 이들 외에도 당연히 체레프닌, 보로딘, 발라키레프, 아렌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차이코프스키 등 러시아 작곡가들의 음악이 러시아적인 발레에 사용되었고, 슈만, 베버, 로시니, 레스피기, 파야(Manuel de Faya) 등도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발레 뤼스와 함께 한 디자이너와 화가들 역시 화려하다. 레옹 박스트(Leon Bakst), 알렉상드르 브누아(Alexandre Benois), 조르주 브라크(George Braque),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빌리빈(Ivan Yakovlevich Bilibin), 위트리요(Maurice Utrillo), 첼릿츄(Pavel Tchelitchew), 여성 패션의 혁명가 코코 샤넬 등이 활약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클레오파트라>, <불새>, <셰헤라자데>, <사육제>, <페트루슈카>, <목신의 오후>, <장미의 정령>, <봄의 제전>, <살로메의 비극>, <황금닭>, <삼각모자>, <잠자는 숲속의 공주>, <뮤즈와 아폴론> 등 아직도 공연되는 작품들이 수두룩하다. 

1929년 디아길레프가 사망한 후 발레단의 재산이 채권자들에게 넘어가자 무용수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디아길레프의 유산을 계승하기 위해 1932년 카자흐의 바질 대령과 몬테카를로 오페라 극장 지배인인 R. 블룸이 발레 뤼스 드 몬테카를로를 조직해 주로 디아길레프 시대의 레퍼토리를 공연했다. 안무가 겸 무용수인 마신과 바질의 불화로, 바질이 발레단에서 나와 원조 발레 뤼스를 새로 창립하면서 2개로 분열되어 경쟁하면서 두 발레단은 1940년대 중반까지 미국의 발레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몬테카를로의 발레 뤼스는 1962년까지, 새 원조 발레 뤼스는 1952년까지 존속했다.

피아노협주곡 2번으로 역전시킨 라흐마니노프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Vasilyevich Rachmaninoff·1873~1943)는 1900년 무렵 우울증과 자기 비하로 작곡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때 가족의 친구이자 아마추어 음악가이기도 했던 정신과 의사 니콜라이 달(Nikolai Dahl)로부터 성공적인 치료를 받은 후 전문적인 도움을 제안했고, 라흐마니노프는 아무 저항 없이 동의했다. 1900년 1월과 4월 사이에 라흐마니노프는 매일 달과 함께 최면 치료를 포함해 수면 패턴, 기분, 식욕을 개선을 통해 작곡 열망을 되살리도록 구성된 치료를 받았다. 

몇 달 되지 않은 그해 여름, 라흐마니노프는 "새로운 음악적 아이디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고 느꼈고, 작곡을 성공적으로 재개했다. 치료 후 첫 번째 완전 완성작인 피아노 협주곡 2번은 1901년 4월에 완성되어 달에게 헌정되었고, 초연 때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이 작품으로 작곡가는 평생 동안 수상한 다섯 개의 글린카상 중 첫 수상과 1904년에 500루블의 상금이 걸린 상을 받았다. 영국의 Classic FM에서 연간 ‘명예의 전당’ 차트를 시작한 후 첫 15년 동안의 차트 순위를 합산한 결과, 이 작품이 영국 국민이 가장 좋아하는 클래식 작품 1위를 차지했다. 이 곡은 세계 곳곳에서 꾸준한 인기를 얻었다. 심지어 섹시 여배우 마릴린 먼로가 출연한 영화 <7년만의 외출>에도 적극적으로 사용되어 클래식을 모르는 사람들도 알 정도였다.

라흐마니노프는 달의 정신적 치료를 받기 전 자신을 돌봐준 사촌 여동생 나탈리아 사티나(Natalia Satina)와 연애를 시작했는데, 그가 머무르던 이바노프카의 영지는 바로 그녀 가문의 것이었다. 나탈리아와의 연애는 초기에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조건 때문에 고통스러웠지만 라흐마니노프는 포기하지 않았고, 달의 치료로 호전되어 마침내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성공으로 여건이 좋아지자 약혼에 이를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은 가문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제도의 벽에 부딪쳤다. 사촌간이었기 때문에 러시아 정교회의 교회법에 따라 결혼이 금지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라흐마니노프는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지도 않았고 고백성사도 안했는데, 이는 사제가 결혼 증명서에 서명할 때 반드시 확인하는 조건이었다. 3년간의 약혼 후 1902년 5월 12일에 라흐마니노프는 나탈리아와의 결혼식을 감행했다. 교회의 반대를 피하기 위해 부부는 군 경력을 활용하여 모스크바 교외 군영 내의 군 예배당에서 피아니스트 선배 실로티(Siloti)와 첼리스트 아나톨리 브란두코프(Anatoliy Brandukov)를 증인으로 간이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이바노프카 영지의 작은 집을 결혼선물로 받았고, 신혼여행으로 유럽 전역을 3개월간 여행하고 돌아와 모스크바에 정착했다. 결혼 1년 후인 1903년 5월 첫 딸 이리나(Irina Sergeyevna Rachmaninova ·1903~1969)가 태어났다. 

딸 이리나를 사이에 둔 라흐마니노프 부부의 사진.
딸 이리나를 사이에 둔 라흐마니노프 부부의 사진.


유부남이 된 라흐마니노프는 성 캐서린 여자대학과 엘리자베스 연구원에서 음악 교사 자리를 얻었다. 교사보다 좀 더 음악에 집중할 직업을 원했던 라흐마니노프는 1904년 볼쇼이 극장에서 지휘자로 두 시즌 동안 일하기로 동의했다. 재직 기간 동안 그는 엄격한 규율을 강요하고 높은 수준의 연주를 요구하면서 엇갈린 평판을 얻었다.  바그너의 영향을 받아 포디움에 선 채로 지휘하는 현대적 관습을 세웠고, 피아노 연주도 함께 하곤 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오페라인 <인색한 기사>(The Miserly Knight)와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Francesca da Rimini)를 초연했다.

그러나 2번째 시즌인 1905년 혁명을 둘러싼 사회적, 정치적 불안이 극장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해 직원들이 시위를 벌이며 임금과 근무 조건 개선을 요구했다. 라흐마니노프는 정치에 관심이 없었으나 혁명 정신은 근무 조건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들었다. 첫 시즌에 50회, 두 번째 시즌에 39회의 공연을 지휘한 후 1906년 2월에 라흐마니노프는 사표를 냈다. 그는 새로운 작품을 완성하고자 가족과 함께 이탈리아 장기 여행을 떠났지만 아내와 딸에게 병이 들자 이바노프카로 돌아갔다. 라흐마니노프는 이미 학교 교사도 사임한 상태라 돈이 문제가 되었고, 그에게 남은 건 작곡뿐이었다.

러시아의 정치적 혼란에 점점 더 불만스러워진 라흐마니노프는 작곡을 하기 위해서는 떠들썩한 분위기를 떠나야 한다고 판단해 1906년 11월 가족을 데리고 모스크바에서 독일 드레스덴으로 갔다. 라흐마니노프와 나탈리아는 곧 이 도시를 좋아하게 되어 1909년까지 머물렀다. 러시아로 돌아온 것은 이바노프카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한 경우뿐이었다. 

가끔씩 우울증과 무관심, 자기 신뢰가 떨어진 기간이 있었지만, 라흐마니노프는 교향곡 1번의 재앙과도 같았던 초연으로부터 12년 후인 1906년에 교향곡 2번(Op. 27)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1907년 5월 디아길레프의 러시아 콘서트 시즌에 참여하기 위해 파리를 방문했다. 자신의 피아노 협주곡 2번에서 솔리스트로 나선 그의 연주와 C#단조 전주곡의 앙코르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여기서 아르놀트 뵈클린(Arnold Böcklin)의 <망자들의 섬>(The Isle of the Dead)을 흑백으로 재현한 것을 보고 영감을 얻어 관현악곡인 Op. 29를 썼다. 라흐마니노프는 1908년 초에 교향곡 2번의 초연에 대한 열광적인 반응 이후 자존감을 되찾았고, 그로 인해 두 번째 글린카 상과 1,000루블의 상금을 받았다. 이렇게 라흐마니노프는 영혼의 독감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가끔씩 다시 찾아오는 이 증세는 그후로도 그에게서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았다.

러시아 혁명 속 음악을 위해 탈출한 프로코피예프 

세르게이 프로코프예프(Sergei Sergeyevich Prokofiev·1891~1953)는 1910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더욱 궁핍한 물질적 여건이 되었지만, 어머니는 그가 계속 공부할 수 있도록 약간의 지원을 해주었다. 러시아 전역에 만연한 긴장된 폭풍 전야와 같은 분위기는 그에게 회의적인 감정과 낭만적 이상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었으나 본질적으로 건강한 삶에 대한 그의 견해는 흔들리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직전, 그는 런던과 파리를 방문하여 발레 뤼스를 포함한 최신 예술을 접했다. 과부의 외아들이라서 전쟁 징집에서 면제된 프로코피예프는 음악원으로 돌아와 오르간을 공부했고, 토카타를 작곡했으며 상트 페테르부르크와 다른 곳에서 콘서트에 출연했다. 프로코피예프의 혁명 전 작품들은 강렬한 탐구욕의 영향으로 점점 더 복잡해졌다.

발레 뤼스를 통해 선진적인 예술가들을 접한 프로코피예프의 재능은 빠르게 발전했다. 프로코피예프는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작곡, 특히 초기 발레를 공부했다. 러시아 모더니즘 시인들의 문학작품, 폴 세잔(Paul Cezane)과 파블로 피카소의 러시아 추종자들의 그림, 그리고 쓸모없는 자연주의에 대항하여 실험적인 작품을 만든 마이어홀드(Meyerhold)의 연극적 아이디어에 매료되었다. 프로코피예프는 1914년 디아길레프를 알게 됐는데, 이후 10년 반 동안 디아길레프는 영향력 있는 조언자가 되었다.

프로코피예프는 고대 슬라브 신화를 주제로 작곡한 발레 <알라와 롤리>(Ala and Lolli 1914년작)가 디아길레프로부터 거부당하자 그는 관현악을 위한 <스키타이 모음곡>(Scythian Suite for orchestra)으로 재작업했다. 이 곡의 1916년 초연은 스캔들을 일으켰지만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그의 작곡 활동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다시 디아길레프의 의뢰로 만들어진 발레 <광대>(Chout)는 프로코피예프가 러시아 음악을 쇄신하려는 탐구적인 실험에 자극제가 되었다. 디아길레프와 그의 안무가 레오니드 마신(Léonide Massine)은 <광대>가 발레 대본과 부합하는 발레음악이 되도록 도왔지만, 그들의 요구는 지나치게 많고 까다로워 작곡에 많은 시간이 걸렸다. 결국 <광대>(Chout)는 한참 시간이 지난 1921년 5월 17일에야 파리에서 초연됐는데, 결과는 공을 들인 만큼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프랑스의 문호 장 콕토(Jean Cocteau)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모리스 라벨을 포함한 청중으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다. 스트라빈스키는 이 발레를 "즐겁게 들을 수 있는 현대 음악의 유일한 작품"이라고 불렀고, 라벨은 이를 "천재의 소산"이라고 평했다.

프로코피예프 오페라  마린스키극장 공연 장면.
프로코피예프 오페라 마린스키극장 공연 장면.


디아길레프는 오페라는 쇠퇴하는 중이고 발레가 더 중요하다고 주장했지만, 프로코피예프는 오페라를 포기하지 않았다. 1911~1913년에 쓴 <맛달레나>(Maddalena) 다음으로 1915~1916년에 도스토예프스키(Fyodor Dostoyevsky)의 중편소설을 각색한 <도박꾼들>(The Gambler)을 작곡했지만 1917년 2월 혁명으로 초연이 무산되었다. 무소르그스키의 오페라 전통을 이어받은 프로코피예프는 미묘한 서정성, 풍자적 악의, 서사적 정확성, 극적인 임팩트를 능숙하게 결합해냈다. 이 기간 프로코피예프는 D플랫 장조 1악장 협주곡(1911)과 극적인 4악장 G단조 협주곡(1913) 등 2개의 초기 피아노 협주곡으로 확실한 인정을 받았다.

1917년은 두 번의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해로 2월에 차르 니콜라이 2세가 축출되자 프로코피예프는 상트 페테르부르크 거리에 나와 승리의 기쁨을 표현했다. 마치 사회적, 국가적 쇄신의 감정에서 영감을 받은 듯 1년 만에 2개의 소나타, 바이올린 협주곡 1번 D장조, 고전 교향곡, 합창곡 ‘그들은 일곱이다’ 등 엄청난 양의 작곡을 해냈다. 웅장한 피아노 협주곡 3번 C장조도 시작했고, 18세기 이탈리아 극작가 카를로 고치(Carlo Gozzi)의 희극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 새로운 오페라 <세 개의 오렌지의 사랑>(The Love for Three Oranges)에 착수했다. 그러나 프로코피예프의 고전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1번 D장조 Op. 19는 혁명의 혼란으로 인해 각각 1918년 4월 21일과 1923년 10월 18일에야 초연이 이루어졌다. 

혁명의 해 여름 프로코피예프는 러시아의 좌파 예술 활동을 이끈 예술노동자 조합에 가입했다. 어머니와 함께 중앙아시아에 가까운 코카서스 지방에 피해있는 바람에 9개월 동안 수도와 단절되었던 그는 1918년 봄에야 귀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음악이 조합활동에 설 자리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프로코피예프는 일시적으로 러시아를 떠나 해외 순회연주 여행을 하기로 했다. 

프로코피예프는 1918년 5월 교육 인민위원인 루나차르스키로부터 공식 허가를 받고 미국으로 향했다. 그는 "당신은 음악의 혁명가이고 우리는 삶의 혁명가요. 우리는 함께 일해야 하지만, 당신이 미국에 가고 싶어한다면 방해하지는 않을 거요"라며 허가해 주었다. 그는 1차대전으로 혼란스러운 유럽 대신 동쪽으로 머나먼 시베리아를 횡단하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곳에서 음악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고단한 여정을 견디게 했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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