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버스 김용만의 클래식 프레너미 시리즈19
이탈리아 후기낭만의 광휘 '푸치니 & 레스피기' (6)
정치와 음악은 늘 음악의 역사에서 논쟁거리였다. 클래식 음악에는 연주장과 음악전문가들이 필요해 중세 이후 경제적인 뒷받침이 가능한 대성당들이나 왕과 귀족의 궁정을 통해 유지되어왔다. 르네상스 말기부터 지중해 무역으로 부유했던 베네치아에서 비로소 음악 대중화의 싹이 트기 시작했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클래식 음악은 주소비층이 부르주아로 넘어가며 왕과 귀족이 아니라 국가와 지방정부, 그리고 빈곤을 벗어난 중산층 시민들로 확대되어 갔다. 입헌군주제 하에 선거를 통해 의회를 구성하는 민주주의가 확산되면서 고대 로마제국의 빵과 서커스는 근대 유럽에서 빵과 극장으로 재현됐다. 그리고 20세기에는 빵과 영화관으로 변신했다.
이 과정에서 음악과 조각을 포함한 건축은 정치적 선전의 도구로 이용됐고, 예술가들 역시 자신의 예술을 정치적 표현의 통로로 사용했다. 고전음악 시대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과 <마술피리>를 통해 프리메이슨인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드러냈고, 베토벤은 교향곡 제3번과 ‘웰링턴의 승리’로 자신의 정치적 지향점을 드러냈다.
20세기에 들어와 독일의 나치,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소련의 공산당이 집권하며 이들은 국민들의 감정에 가장 강한 호소력을 불러일으키는 음악을 효과적인 선전의 도구로 이용하려 했다. 음악가들도 원하든 원치 않든 강력한 권력의 때로는 노골적이고 때로는 은근한 요구를 피해 가기 어려웠다. 이 요구에 적극적으로 부응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음악 활동의 유지를 위해 마지못해 소극적 협조를 한 사람도 있고, 음악을 통해 간접적으로 저항의 의지를 담아낸 경우도 있었다.
음악이 가장 강력한 국민적 영향을 끼쳤던 나라 이탈리아에서 베르디는 <나부코>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으로 독립의지를 자극해 독립 이탈리아 왕국의 상원의원이 됐고, 이후 푸치니도 상원의원에 올랐다. 레스피기는 자신이 음악원장을 맡았던 산타 체칠리아를 국립음악원으로 만드는데 무솔리니와의 만남을 이용했다. 무솔리니와 파시스트의 통치는 2차 대전의 패배로 끝났지만, 산타 체칠리아 국립음악원은 오늘날에도 그 명성과 권위를 유지하고 있다.
정치에 무관심했으나 상원의원이 된 푸치니
쟈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1858~1924)는 도리아 스캔들로 골치를 썩는 와중에도 벨라스코(David Belasco)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오페라 <서부의 아가씨>(La fanciulla del West) 작업을 진행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의뢰로 완성된 이 작품은 1910년 12월 10일 전설적인 테너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와 한때 푸치니와 스캔들이 있었던 소프라노 에미 데스틴(Emmy Destinn) 주연으로 초연되었다. 토스카니니가 지휘한 공연은 성공적이었으나 팬들이 바라던 아리아가 거의 없다시피 해서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아리아 중 하나인 ‘그녀가 나를 믿어주기를’(Ch'ella mi creda)은 오페라 테너들의 인기곡 앨범에 자주 포함되곤 했는데,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군인들이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이 아리아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거침 없던 푸치니도 이 작품에서는 “오페라를 쓰는 것이 어렵다”고 인정했다. 세기 전환기의 전형적인 오페라들의 대표자였던 그는 새로운 세기가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닌 문제들과 함께 무자비하게 전진하고 있는 격변기 가운데 있었지만, 사실 제1차 세계대전과 같은 동시대의 사건이 어떤 변화를 초래할지 이해하지 못한 채 토레 델 라고의 집에 칩거했다.
50대 후반으로 접어든 푸치니는 2년간의 작업 끝에 1916년 주세페 아다미(Giuseppe Adami)의 대본으로 오페라 <제비>(La Rondine)의 악보를 완성해 1917년 3월 27일 몬테카를로(Monte Carlo) 대극장에서 초연하기로 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초연이 불발된 것도 모자라 푸치니의 후원자였던 줄리오(Giulio)의 뒤를 이어 리코르디 출판사의 대표가 된 아들 티토(Tito)는 이 작품을 "나쁜 레하르(Lehár, 빈의 오페레타 작곡가)"라며 악보의 출판을 거부했다. 리코르디의 라이벌인 로렌조 손조뇨(Lorenzo Sonzogno)가 중립국인 모나코(Monaco)에서 초연했지만, 흥행은 시원찮았다. 푸치니는 죽을 때까지 그의 후기 오페라 중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이 작품을 계속해서 수정했다. 사실 <제비>는 처음에는 오페레타로 구상되었으나 푸치니는 대화를 생략하여 작품의 형식을 오페라에 더 가깝게 만들었고, 현대에 와서는 "경쾌한 왈츠 곡, 눈길을 끄는 팝 스타일의 멜로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사랑노래의 연속적인 직조물"이라고 평가를 받는다.
푸치니가 환갑을 맞은 1918년 <3부작>(Il trittico)이 뉴욕에서 초연되었다. 죽음의 은폐에 관한 세 편의 단막 오페라의 모음으로 구성된 <3부작>은 파리 사람 그랑 귀뇰 스타일의 끔찍한 에피소드<외투>(Il tabarro), 감상적 비극 <수녀 안젤리카>(Suor Angelica), 희극 <쟈니 스키키>(Gianni Schicchi)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푸치니는 초연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듬해가 되어서야 푸치니는 국제무대에 복귀해 1920년 <3부작>의 런던 초연에 모습을 보였고 이어 빈에서 <3부작>과 <제비>의 독일어판 초연에 나타났다. 그러나 해외에서의 명성에 비해 조국 이탈리아에서는 <서부의 아가씨> 이후 작품들 공연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푸치니의 새로운 음악언어는 외면당했다.
한편, 바그너나 베르디와 달리 푸치니는 정치에 적극적이지 않았으나, 이것이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1차대전 직전인 1914년 여름 절친했던 푸치니와 토스카니니는 격렬한 논쟁 끝에 거의 10년 동안 서로 등을 돌렸다. 푸치니는 1915년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간 전쟁을 반대하면서도 1913년 체결한 오스트리아 극장과의 계약에 따라 <제비> 공연을 추진해 '전쟁 중 공연'이라는 비판을 받았고, 결국 계약은 취소되었다. 푸치니는 전쟁 참여와는 상관이 없었지만 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개인과 가족에게 개인적으로 도움을 제공하는 식으로 자신의 뜻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1919년 푸치니는 제1차 세계대전 승리를 기리는 파우스토 살바토리(Fausto Salvatori)의 송시에 작곡을 의뢰받아 '로마에 바치는 찬가‘(Inno a Roma)를 만들었다. 로마 건국 기념일인 1919년 4월 21일에 하려던 초연은 6월 1일로 연기되어 체조 대회 개막식에서 연주되었다. 이 곡은 파시스트(Fascist)를 위한 곡은 아니었지만 파시스트 당의 퍼레이드나 공개 행사에서 널리 연주되었다.
푸치니는 1923년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와 접촉했는데 파시스트당은 푸치니에게 명예당원증을 보냈다. 그러나 푸치니가 실제로 파시스트당의 일원이었다는 증거는 모호하다. 이탈리아 상원은 전통적으로 국가에 대한 문화적 공헌을 기려 소수의 의원을 임명해왔는데, 푸치니는 베르디가 누렸던 이 영예를 얻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를 위해 푸치니가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 같지는 않다. 또 푸치니는 비아레조(Viareggio)에 국립극장을 설립하고 싶어했는데, 이 역시 정부 지원이 필요한 일이어서 무솔리니를 두 번 만나 협조를 구했다. 국립극장 프로젝트는 결실을 맺지 못했지만, 푸치니는 죽기 몇 달 전에 상원의원(senatore a vita)으로 임명됐다.
푸치니가 무솔리니를 만났을 당시인 1923년 말 무솔리니는 총리직에 오른 지 약 1년이 되었지만, 그의 파시스트당은 1924년에 저지른 총선의 폭력과 부정행위로 볼 때 아직 이탈리아 의회를 완전히 장악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무솔리니가 1925년 1월 3일 하원 연설에서 대의 정부의 종말과 파시스트 독재의 시작을 선언했을 때 푸치니는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파시스트당을 이용한 레스피기
오토리노 레스피기(Ottorino Respighi·1879~1936)는 1916년 여름 발레 뤼스(Ballets Russes)의 단장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i Diaghilev)를 만나기 위해 비아레조(Viareggio)를 방문했다. 디아길레프는 바로크 시대와 고전 시대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작품인 <기발한 부티크>(La Boutique fantasque)를 상연하기를 원했고, 레스피기는 발레를 위해 로시니(Gioachino Rossini)의 작품을 편곡해주었다.
1917년 3월에 드디어 레스피기의 첫 연작 교향시 〈로마의 분수〉(Fontane di Roma)가 로마의 아우구스테오 극장에서 안토니오 과르니에리(Antonio Guarnieri)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계획은 원래 1916년 후반기였지만, 해당 공연 전반부에서 연주된 바그너의 음악에 대한 청중의 적대적인 반응 때문에 후반부 연주가 무산되었기 때문이었다. 레스피기는 자신의 노력에 비해 미적지근한 초연 반응에 실망했다. 하지만 이후 실내악 팀을 조직해 이탈리아와 스위스 순회연주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와 12월에 세 개의 관현악 모음곡 중 첫 번째 작품인 <고대의 노래와 춤곡>(Ancient Airs and Dances)을 초연했다. 모음곡 중에는 다양한 16세기 이탈리아 작곡가의 류트 곡 편곡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콘서트후에 총보가 분실되는 바람에 레스피기는 악기별 파트악보로부터 총보를 다시 적어야 했다.
레스피기에게 작곡가 경력의 전환점을 만들어준 것은 위대한 지휘자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였다. 그는 1918년 2월 레스피기를 찾아와 밀라노에서 열릴 12번의 콘서트에서 연주할 작품을 선택해 달라고 요청했다. 레스피기는 초연 한 번 이후 묻혀있던 <로마의 분수>를 골랐다. 4개의 교향시로 구성된 <로마의 분수>는 이번에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레스피기는 순식간에 20세기 초 이탈리아의 주요 작곡가로 떠올랐다. 이렇게 토스카니니와 장기적인, 때로는 소란스러운 관계가 시작되었다. 몇 달 후 레스피기는 악보 임대 및 공연 저작권의 40%를 받는 계약을 리코르디 출판사와 체결했다.
1918년 초겨울 유럽을 휩쓸며 엄청난 사망자를 발생시킨 스페인 독감에 걸렸지만 다행스럽게도 비교적 가볍게 넘어간 레스피기는 1919년 여름에 디아길레프로부터 두 번째 의뢰를 수락하고 발레 뤼스를 위한 음악을 만들었다. 발레 뤼스는 레스피기가 작업한 치마로사(Domenico Cimarosa)의 ’여자의 책략‘(Le astuzie femminili)의 개정판과 일련의 춤곡을 가지고 1920년 파리에서 초연무대를 올렸다.
레스피기는 이어서 파이지엘로(Giovanni Paisiello)의 <마님이 된 하녀>(La serva padrona)도 다시 손질해 넘겼지만, 디아길레프는 전막으로 만드는 대신 일련의 다양한 노래와 춤의 일부로만 사용했다. 이 악보는 90년간 사라졌다 발견되어 2014년 볼로냐에서 다시 전곡이 연주되었다.
1921년 1월, 레스피기와 엘사는 바이올리니스트 마리오 코르티(Mario Corti)와 함께 첫 콘서트 투어를 시작해 이탈리아 전역을 돌고 프라하, 브르노, 빈까지 여행했다.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장이 남은 학기 수업을 위해 돌아오라고 할 정도로 투어는 길어졌다.
이 해 레스피기는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클라우디오 구아스탈라(Claudio Guastalla 1880~1948)와 평생의 우정을 시작했다. 구아스탈라는 새로운 오페라에 맞는 대본을 쓰겠다고 제안했다. 맘이 맞는 파트너를 만난 레스피기는 기꺼이 작업에 나서 그의 첫 오페라인 <벨파고르>(Belfagor)를 완성해 1923년 4월 밀라노에서 초연했다. 이 작품은 마키아벨리(Machiavelli) 이야기를 기초로 각색되어 과르니에리(Guarnieri)의 지휘와 마리아노 스타빌레(Mariano Stabile)가 주역으로 출연했다.
구아스탈라는 후속 오페라 4편 모두의 대본을 썼을 뿐 아니라 레스피기의 오페라 이외의 작품에도 영향을 주었다. <벨파고르>보다 한 달 앞서 지휘자 프리츠 라이너(Fritz Reiner)는 미국 신시내티에서 ’고전 춤곡과 이리아‘(Antiche danze e arie per liuto) 모음곡 2번을 지휘했다.
1922년 1월,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의 반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레스피기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콘서트 투어를 시작했다. 레스피기는 1922년부터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의 파시스트 정부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이었고 그의 국제적 명성이 높아지면서 어느 정도 자유가 주어졌지만, 동시에 정권이 그의 음악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방조했다. 그러면서도 토스카니니와 같은 노골적인 반대자들이 정권하에서 계속 활동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듬해 레스피기는 산타 체칠리아를 국가 지원을 받는 국립음악원으로 승격시키고 원장에 취임했다. 사실 그는 시간을 잡아먹는 행정 업무를 싫어해 1926년에 원장직을 사임했지만 1935년까지 작곡 교수직은 유지했다.
<로마의 분수>(Fountains of Rome) 초연 7년 후, 레스피기는 후속 교향시 연작 <로마의 소나무>(Pini di Roma)를 완성하여 1924년 12월 아우구스테오 극장에서 초연해 갈채를 받았고, 이 작품은 그의 가장 유명하고 널리 연주된 작품이 되었다. 1925년에 레스피기(Respighi)와 세바스티아노 루치아니(Sebastiano Luciani)는 <오르페우스>(Orpheus)라는 제목으로 음악사 초등 교과서를 출판했다.
1932년 파시스트 정부는 레스피기에게 이탈리아의 과학 및 문화 분야에 기여한 저명한 인사들에게 수여되는 최고의 영예인 이탈리아 왕립 아카데미(Reale Accademia d'Italia) 회원 자격을 부여했다. 같은 해 레스피기는 피체티(Pizzetti), 알체오 토니(Alceo Toni), 쥬세페 물레(Giuseppe Mulè)를 포함한 여러 작곡가가 참여한 반(anti)모더니스트 그룹에 참여했다. 그러나 나중에 레스피기는 이탈리아 문화예술 및 교육계에 기여한 것과는 별개로 파시스트의 협조자라는 정치적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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