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버스 김용만의 클래식 프레너미 시리즈21

헝가리 민족음악의 존재증명 '버르토크 & 코다이' (1)

백인들의 대륙인 유럽 한가운데 섬처럼 박혀있는 단 하나의 몽골계 국가가 바로 헝가리(Hungary)다. 이 국호는 민간 어원으로는 훈족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현대 사학계에서는 거의 부정된다. 실제 어원은 머저르(그동안 마자르로 읽었지만, 현지 발음으로는 머저르)인과 가장 밀접하게 교류했던 튀르크계 '오노구르인(onogur-bolgárok)'으로 여겨진다. 

이 나라의 헝가리어 국호는 '머저로르사그‘(Magyarország)로 '머저르족의 나라'라는 의미이다. '머저르' 명칭은 9세기 중반 부족 연합으로 지금의 땅에 정착해 헝가리인의 기원이 된 핀-우랄계 일곱 부족 중 부족 연합의 지도자이자 헝가리의 시조인 아르파드의 부족이었던 '메제르(megyer)'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한국과는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처음 조우하여 클럽 514골, 국가대표 84골을 넣은 전설의 골잡이 푸슈커쉬(Puskás Ferenc)에게 멀티 골을 허용하는 등 9:0으로 대패했다. 2020년 토트넘의 손흥민이 번리전에서 70m 단독 드리블 끝에 넣은 원더 골로 FIFA가 그해 가장 아름다운 골을 뽑아 시상하는 푸스카스상(영어식 발음)을 수상하여 한국과 오래된 인연을 소환했다.  

960만 인구의 대부분은 헝가리인이지만, 집시 31만 명(3.2%), 독일인 18만 명(1.8%), 루마니아인 4만 명(0.4%), 슬로바키아인 3만 명(0.3%), 소수 불가리아인 외 공산주의 시절 넘어온 중국계, 베트남계등 아시아계 주민들도 있다. 지금도 주변국인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세르비아, 우크라이나 등에 꽤 많은 헝가리인들이 거주해 세계적으로 이민자 포함 약 1400만 명이 있다. 1990년대로 넘어가면서 소련의 해체 시기 공산 정부가 무너진 이후 헝가리는 1999년 NATO,  2004년 EU에 가맹해 현재는 서방권 나라가 돼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전성기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는 국호도 있었지만, 사실상 피지배 대상이었던 헝가리가 다시 뉴스의 전면에 나선 것은 1956년 공산권 최초로 대형 반소 시위였던 헝가리 혁명이 계기였다. 그리고 헝가리가 다시 뉴스에 등장한 것은 바로 헝가리 민족음악을 세계에 전한 이번 프레너미 시리즈의 주인공 버르토크와 코다를 통해서다. 

피아노 신동으로 태어나 민요에 이끌린 버르토크

젊은 시절의 버르토크 사진.
젊은 시절의 버르토크 사진.

벨라 빅토르 야노쉬 버르토크(Béla Viktor János Bartók·1881~1945)는 헝가리가 배출한 위대한 작곡가, 피아니스트, 민족음악학자로 20세기 가장 중요한 작곡가 중 하나로 여겨진다. 버르토크는 헝가리 왕국의 땅이었던 너지센트미클로시(Nagyszentmiklós) 지역의 하급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이 곳은 현재는 루마니아 영토인 산니콜라우 마레이다. 버르토크의 아버지(1855~1888)도 이름이 벨라였다. 어머니인 파울라 보이트(Paula Voit·1857~1939)는 독일, 헝가리, 슬로바키아 혈통을 가진 천주교인이었으나, 헝가리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벨라는 문장으로 말하는 법을 배우기도 전 어머니가 피아노로 연주한 다양한 댄스 리듬을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다. 4살 꼬마 벨라는 이미 피아노로 40곡을 연주할 수 있었고, 이듬해 어머니는 공식적 음악교육을 시작했다.

1888년, 아직 7살 아이일 때 농업학교의 교장이었던 아버지 벨라가 갑자기 사망했다. 그 후 어머니는 벨라와 그의 누이 에르셰베트(Erzsébet)를 데리고 나기쇨로시(Nagyszőlős· 현재 우크라이나 비노흐라디우)로, 그 다음에는 프레스부르크(Pressburg· 현재의 슬로바키아 공화국 브라티슬라바)로 이사했다. 벨라는 11살 때 피아니스트로서 나기쇨로시에서 첫 공개 독주회를 열었는데, 데뷔 연주회의 프로그램 중에는 2년 전에 쓴 짧은 작품도 포함되어 있었다. 1890년부터 4년간(9세~13세) 벨라는 31개의 피아노곡을 썼는데, 이들 중 대부분이 단순한 춤곡이었다. 나중에 청년이 된 벨라는 1892년 첫 공개 독주회에서 연주했던 '도나우 강의 흐름(A Duna folyása)'을 10부로 구성된 모음곡으로 만들 계획을 한다. 비평가들은 신동에게 호평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피아니스트 라슬로 에르켈(László Erkel)이 그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에르켈에게 배우던 시절 ’바흐에서 바그너까지‘ 작곡가들의 악보를 연구하기 시작했던 벨라는 이후 슈만과 브람스와 유사해졌다. 에르켈에게서 기초를 닦는 동안 어머니의 조언에 따라 카톨릭 성당 계열의 문법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마친 벨라는 1899년 부다페스트 왕립음악원에 진학해 1903년까지 위대한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였던 이슈트반 토만(István Thomán)에게 피아노를, 야노시 쾨슬러(János Koessler)에게 작곡을 배웠다. 

1899년 부다페스트 왕립음악원에 입학한 후 그는 거의 작곡을 하지는 않았으나 관현악을 연습하면서 바그너의 오페라에 완전히 익숙해졌다. 이 기간 그의 음악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결정적 계기가 연달아 일어났다. 음악원 재학중인 1902년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Also sprach Zarathustra)의 초연에서 만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음악은 그의 초기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다. 슈트라우스의 다른 교향시 '영웅의 생애(Heldenleben)'의 악보를 소유하고 있었고, 피아노로 편곡해 외워버릴 정도였다. 

2년 후인 1904년 여름 휴양지를 방문했을 때 벨라는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의 키베드(Kibéd) 출신 젊은 유모 리디 도사(Lidi Dósa)가 아이들을 돌보며 민요를 부르는 것을 우연히 들었다. 이때 받은 깊은 인상이 계기가 돼 그는 평생 동안 민요에 헌신하게 된다.

1907년부터 그는 프랑스 작곡가 클로드 드뷔시(Claude Debussy)의 영향을 받았는데, 그가 접한 드뷔시의 작품은 코다이가 파리에서 공부한 후 가져온 것이었다. 벨라의 대규모 관현악 작품은 여전히 ​​요하네스 브람스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스타일이었지만, 그는 이 시절부터 민속음악에 대한 관심이 커졌음을 보여주는 여러 작은 피아노 작품을 썼다. 이 새로운 관심의 명확한 징후를 보여주는 첫 번째 작품은 a단조의 현악 사중주 1번(1908)이다. 하지만 그의 젊은 시절 작품은 아직 대중음악과 로마 음악의 영향을 받은 고전적이고 초기 낭만주의 스타일이었다. 

슈트라우스의 영향을 받은 벨라는 10개의 장면으로 구성된 교향시인 '코슈트(Kossuth)'를 작곡했는데, 음악적 민족주의에 대한 관심을 반영했다. 1903년 발표된 벨라의 이 첫 주요 관현악 작품은 1848년 헝가리 혁명의 영웅인 라요시 코슈트(Lajos Kossuth)를 기리는 교향시였다. 1년 후 그는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랩소디‘를 작품 1로 하여 자신의 작품 번호를 매기기 시작했다. 

민족주의적 열의와 이전 작곡가의 영향을 초월하려는 열망에 이끌린 청년 벨라는 이듬해부터는 유모 리디 도사의 트란실바니아 민요에 대한 깊은 인상에서 비롯된 민속음악에 평생 헌신하게 된다. 이렇게 벨라는 자신의 음악을 확립해 갔다. 

어린 시절부터 민족음악 속에 자란 코다이 

절은 시절의 졸탄 코다이 사진.
절은 시절의 졸탄 코다이 사진.

졸탄 코다이(Zoltán Kodály·1882~1967)는 헝가리 작곡가인 동시에 민족음악학자, 코다이 음악 교육론의 창시자로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음악 교육자이며 언어학자, 철학자이기도 하다.  

졸탄 코다이는 버르토크보다 1년 반 늦은 1882년 헝가리 케치케메트(Kecskemét)에서 문화적, 지적 전통을 지닌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프리기예스(Frigyes)는 철도역장으로 바이올린을 좋아해 어린 졸탄의 음악적 감성을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했고, 어머니 파울리나 잘로베츠키(Paulina Jalovetzky)는 폴란드계로 문학과 예술에 대한 감성을 아들에게 심어주었다. 집안은 종종 아버지의 바이올린 연주로 가득했고 어머니는 민요를 불렀는데, 이 분위기는 졸탄이 고국 음악에 관심을 갖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헝가리 민족음악과 서양 고전음악 전통에 일찍 노출된 것은 그의 후기 작업의 토대에 당연히 영향을 줬다. 졸탄은 어린 시절 집안 분위기부터 음악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코다이 가족은 철도회사의 전근 명령에 따라 자주 이사를 다녔지만, 졸탄이 10대가 되자 아버지는 은퇴해 갈란타(Galánta)에 정착했고 나중에는 나기솜바트(Nagyszombat·오늘날의 슬로바키아 트르나바)로 이사했다. 졸탄은 갈란타에서 지역의 민속 음악에 매료되었고, 나기솜바트에서는 정식으로 음악 교육을 받기 시작해 피아노, 바이올린, 작곡 등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그는 젊은 시절 나기솜바트에서 합창단원으로 활동했으며, 그곳에서 첫 작곡을 했다. 

졸탄은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음악가였지만, 그의 공식적인 교육은 보다 전통적인 길을 따랐다. 지역학교에서 중등교육을 마친 그는 지금은 프란츠 리스트 음악원(Franz Liszt Conservatory)이 돼있는 수도 부다페스트의 왕립음악원(Budapest Royal Academy of music)에 진학해 한스 폰 쾨슬러(Hans von Kössler) 문하에서 작곡 수업을 들었다. 졸탄은 이 음악원에 진학하던 1900년 부다페스트 대학의 언어학부에도 동시에 들어가 대학 공부와 음악 공부를 병행했다. 

버르토크와 코다이가 음악원에서 1년 선후배로 지내던 시절 서로 알게 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재학 당시에는 특별한 교류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4년간의 음악원과 부다페스트 대학 언어학부 학업을 마친 후 1905년에 처음으로 졸탄은 외딴 마을을 방문하여 노래를 수집하고 축음기 실린더에 녹음했다. 이듬해인 1906년 그는 음악과 언어학적 관심이 집약된 헝가리 민요에 대한 논문 '헝가리 민요의 구조'를 썼다. 이 무렵 코다이는 음악원 1년 선배이자 동료 작곡가인 벨라 버르토크를 만났고, 자신의 민요 수집에 관련된 몇 가지 방법을 소개했다. 헝가리 민속 음악에 대한 두 사람의 공통된 관심은 20대의 열정으로 의기투합했다. 그들의 우정과 열정은 광범위한 현장 조사로 이어졌고, 시골을 여행하며 전통 노래를 수집하고 필사했는데, 이는 민족음악학에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헝거리 시골마을 민속밴드의 모습.
헝거리 시골마을 민속밴드의 모습.


그러나 그들의 작업이 열매를 맺기엔 아직 일렀다. 학구열에 목말랐던 졸탄은 1906년부터 1년 동안 파리에 머무르는데, 당시 오르가니스트 겸 음악교육자로 이름이 높던 파리 음악원 교수 샤를 비도르(Charles Widor)를 만났다. 그는 파리 음악원에 등록하지는 않았으나, 비도르와의 교류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파리에서 후기 낭만 시대의 수많은 음악뿐 아니라 드뷔시 등 시대를 앞서가던 현대 음악의 싹들도 미리 경험하면서 음악의 이론과 현장을 골고루 체험했다.

20대 중반에 코다이는 이미 민족음악 연구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작곡했는데, 전통적인 헝가리 멜로디와 유럽 고전 형식을 결합시켰다. '여름날 저녁(Summer Evening)'과 무반주 첼로 소나타와 같은 그의 초기 작품은 헝가리 시골 생활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다. 이는 뚜렷하게 국가적인 음악적 정체성을 만들고자 하는 그의 열망을 반영했다. 민족음악에 대한 체계적 연구와 접근은 이렇게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을 만나 이후 세계 음악 교육의 주요한 주제로 떠오르게 된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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