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너미 시리즈5

'피아노의 시인 쇼팽 & 건반의 절대자 리스트' (4)

쇼팽과 리스트의 시대는 천재들이 쏟아진 시기였다. 이성을 내세운 계몽주의와 엄격한 형식미를 강조한 고전주의에 대한 반작용으로 찾아온 흐름이 낭만주의다. 자유롭고 감정을 앞세운 일탈도 어느 정도 허용됐던 낭만주의에서는 억눌렸던 천재성의 분출도 가능했다. 게다가 산업혁명과 부르주아의 출현이라는 물적 경제적 환경까지 조성되면서 예술분야의 천재들이 다수 배출되었다.

흔히 사람들은 한 가지에만 집중해도 결과를 이루기가 쉽지 않다고들 한다. 천재의 경우에도 하나에만 몸바쳐 업적을 이루라고 한다. 그러나 천재란 원래 사람들의 상식적인 기준을 넘는 사람들이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이들의 일탈까지 어느 정도 용인되었으니 다양한 천재들이 나온 것은 당연한 일. 그래서 천재들 중에는 여러 가지 분야에서 동시에 재능을 나타낸 경우도 있다. 지금처럼 새로운 정보가 정신을 차릴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나오던 시기가 아니라서 가능했을 지도 모른다. 그 천재들이 남긴 유산은 아직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피아니스트들에게 최고의 유산 쇼팽

쇼팽을 마지막꺼지 챙겼던 제인 스털링의 초상화
쇼팽을 마지막꺼지 챙겼던 제인 스털링의 초상화

조르주 상드와 헤어진 후에 형편이 나빠진 쇼팽을 챙긴 것은 스코틀랜드 출신 제자 제인 스털링(Jane Sterling 1804~1859)이었다. 부유한 가문에서 13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제인은 10대에 양친을 여의고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다. 늘씬한데다 나이에 비해 어려 보였으며 예뻐서 30번 넘게 청혼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하고, 일찍 과부가 된 언니 어스킨 부인과 고향 스코틀랜드와 파리를 오가며 생활했다.

1842~1843년경 쇼팽과 처음 만났으나 1844년에 가서야 쇼팽의 편지에 나타나는데, 음악과 예술에 관심이 많아 서로 존중하는 사이가 되었다. 쇼팽이 상드와 결별한 것이 명백해지자 상드처럼 6살 연상이었던 제인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다. 혼자가 된 쇼팽의 비서 겸 매니저로 상드 이상의 보살핌을 제공했다.

1848년 2월 파리에서의 마지막 연주회를 마친 쇼팽은 대기실에 오자마자 제인에게 기대어 쓰러졌다. 심신이 모두 극도로 지친 그는 그 후 심하게 앓아누웠다. 그 기간 제인은 바르샤바에 있는 쇼팽의 가족들과도 연락했다. 파리 2월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고립된 쇼팽이 무더위 속에 고생하자 자신의 고향 스코틀랜드로 초대했다. 파리 귀환후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쇼팽의 아파트 월세도 내주는 등 그를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쇼팽은 제인의 마음을 잘 알았지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늘씬한 체구에 표정은 엄숙했고 옷도 짙은 색의 진중한 빛으로 입었던 그녀는 정성을 다했지만, 이미 상드에게 지쳐버린 쇼팽은 건강까지 잃은 상태에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여력이 없었다. 

1849년 10월 17일, 쇼팽은 "어머니...나의 어머니..."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쇼팽이 숨을 거두자 주치의에 의해 부검이 진행되었다. 쇼팽이 바라던 대로 심장은 바르샤바로 보내지기 위해 적출되었고, 시신은 마들렌느 성당의 지하에 안치되었다. 쇼팽의 바람대로 장례식에서 모차르트 <레퀴엠>을 연주하려 했으나, 마들렌느 성당은 여성이 노래한 사례가 없어 난색을 표했다. 장례식이 2주나 연기된 끝에 여성 솔리스트가 장막 뒤에서 노래를 부르기로 하고 진행되었다. 성당 주위에 수천 명이 몰려 초대권을 가진 사람만 장례식장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쇼팽은 파리의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제인은 쇼팽이 사망한 후 장례비용도 부담했고, 장례식 참석차 파리에 온 누나 루드비카의 여행 비용은 물론 쇼팽이 쓰던 피아노까지 바르샤바로 보내주었다. 제인은 자신의 손으로 정리한 쇼팽의 유품을 경매를 통해 매입한 뒤 고향 스코틀랜드로 가져가 보관하였다. 쇼팽의 가족이 유작을 출판하려 할 때, 자신이 소장한 미발표 악보도 제공하고, 쇼팽 연구자들에게는 자신이 수집한 자료를 개방해주었다. 쇼팽의 1주기까지 상복을 입어 쇼팽의 미망인이냐는 이야기까지 들었던 그녀는 쇼팽의 가족에게 부탁하여 바르샤바의 흙을 가져다 쇼팽의 무덤 주위에 뿌렸다. 제인은 쇼팽에게 지도받은 나름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였지만 쇼팽의 사후 일년간 피아노를 연주하지 않았고 평생 독신으로 살다 세상을 떠났다.

누나 루드비카가 챙긴 쇼팽의 유품 중에는 수첩에 끼워진 조르주 상드의 머리카락도 있었다. 장례식 후 루드비카는 쇼팽의 심장과 상드가 보낸 200여통의 편지를 포함한 유품을 고국으로 가져가려 했다. 프랑스 국경을 지날 때 경비는 편지 상자를 의심하며 압수했다. 2년 후인 1851년,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원작자 알렉상드르 뒤마(Alexandre Dumas 1824~1895)가 우연히 같은 초소를 지나다 그 편지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뒤마는 친구인 상드에게 그 소식을 알렸고, 상드는 편지를 넘겨받아 몽땅 태워버렸다. 수천 통 남아있는 상드의 편지 중에 쇼팽에게 보낸 편지가 없는 이유다. 

쇼팽의 심장이 안치된 바르샤바 성 십자가 성당의 내부
쇼팽의 심장이 안치된 바르샤바 성 십자가 성당의 내부

루드비카는 더 소중한 쇼팽의 심장만 챙겨가서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에 대한 유태인들의 최대 저항이었던 1943년 4월 바르샤바 봉기 당시 이 성당은 독일군의 포격으로 초토화되었다. 하지만 쇼팽의 심장은 무사했는데, 이 심장을 안전하게 옮기도록  지시한 이가 봉기 당시 유태인 학살을 주도한 독일군 장교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였다.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독일군이 쇼팽의 심장을 약탈한 후 들끓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 지켜냈다는 식으로 선전한 것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쇼팽의 심장은 다시 성 십자가 성당에 안치되었다.

쇼팽은 당대에 피아노 솜씨는 인정받았으나 작곡가로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그의 대담한 전조와 불협화음, 생소한 기교 등은 당시 파리 음악계에서 그를 제대로 된 음악교육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추정할 정도였다. 쇼팽은 피아노로 다양한 음색을 구현하기 위해 페달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또 장식음도 선율처럼 들리도록 사용해 이후 피아니스트들이 이 템포를 자유롭게 쓰는 루바토(tempo rubato) 기법에 영향을 주었다. 

작곡가로 환영받지 못한 또 다른 이유로는 당시 악보 출판 업계에서 원하던 스타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가볍고 경쾌하지만 부르주아 여인들이 주류인 아마추어들이 쉽게 연주할 수 있는 전형적인 곡이 아니라, 내면성과 임기응변의 해석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리스트만큼 화려한 면도 찾기 어려웠다. 반면에 구세대 교육을 받긴 했지만 훌륭한 예술가였던 모셸레스는 한때 그의 연습곡에 대해 '기교적으로 어렵고 비예술적인 부분에서 나의 손가락은 돌아가지 않았다'라고 고백했다.

슈만 등이 쇼팽 음악의 우수성을 계속 주장하자 음악가들도 조금씩 그에게로 돌아섰다. 쇼팽의 테크닉은 오히려 리스트에 의해 보급되었고, 얼마 가지 않아 낭만음악의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모두가 인정하는 피아노 음악의 대표 작곡가로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작품은 피아노 중심으로 전개되었고, 피아노 이외의 작품은 많지 않다. 피아노협주곡에서조차 관현악은 아주 보조적인 위치에만 머물러 있다. 반면 리스트는 교향시를 창시하고 여러 곡을 작곡하는 등 관현악에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음악계 전체에 다양하게 공헌한 리스트

19세기 아직 영화와 TV와 레코드가 없던 시절 대중문화 최대의 팬덤을 가진 아이돌 스타는 리스트였다. 그러나 리스트는 아이돌을 넘어 낭만음악의 중심이었다. 리스트의 첫번째이자 유일한 피아노 스승이었던 체르니(Karl Czerny)와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는 그를 무료로 가르쳤다.

파리음악원 입학 무산 후 12세의 리스트는 개인교습으로 파에르(Paer)에게 작곡을, 라이하(Reiha)에게 음악 이론을 배웠는데 파리의 테아트르 이탈리엥 음악 감독이었던 파에르는 어린 리스트의 오페라 <동상슈>를 위촉했다. 이와 같은 어린 시절의 경험은 그가 스타로 떠오른 후 다른 동료 후배 음악가들에게 아낌없이 온정을 베풀 수 있는 배경이 된다. 

1830년 12월에 초연된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에 대해 청중의 반응은 상당히 엇갈렸지만 리스트는 갈채를 보냈다. 4년후 리스트는 환상교향곡의 피아노 편곡판을 자비로 출판하고 연주회에 올렸다. 베를리오즈의 관현악 악보 출판은 이듬해에야 이루어졌다. 베를리오즈의 표제음악에 영감을 받은 리스트는 교향시 장르를 창시하는데, ‘파우스트 교향곡’은 베를리오즈에게 헌정되었다.

1832년 쇼팽의 파리 데뷔 연주회에 간 리스트는 쇼팽의 재능을 대번에 알아보고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 음악계에서 널리 소개했다. 쇼팽도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자신의 에튀드를 그에게 헌정하기도 했고, 대중연주회를 싫어했지만, 리스트와 함께 여러 번 무대에 올랐다. 알다시피 조르주 상드를 쇼팽에게 소개한 것도 리스트였다.

리스트가 쓴 쇼팽전기의 표지
리스트가 쓴 쇼팽전기의 표지

쇼팽 사후에도 리스트는 최초의 쇼팽 전기를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했고, 연주회에서 쇼팽의 곡을 자주 연주했다. 한편 리스트는 슈만과도 교류했다. 당대 작곡가로서는 인정을 덜 받았던 슈만은 리스트가 연주회에서 자기 곡을 연주하자 고맙다는 편지를 보냈고 아를 계기로 교류가 이어졌다. 다만 리스트를 싫어했던 클라라 때문에 자주 만나지도 못했고 낭만의 선봉이던 리스트와 음악적 입장이 달라 결국 멀어졌다. 그러나 1854년, 슈만이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자녀 8명을 홀로 키우던 클라라가 리스트에게 연주회 요청을 했으며, 리스트는 흔쾌히 함께 그 공연을 주관하는 대인배의 풍모를 보여주었다. 

리스트는 바그너와 애증의 관계였다. 1840년대 초 파리에서 만나자마자 바그너의 재능을 알아본 리스트는 그의 인간성과 별개로 천재성만큼은 인정했다. 1849년 드레스덴 봉기 실패 후 피난길에 오른 바그너에게 리스트는 힘을 써서 중립국 스위스에 보금자리를 마련해주었다.

바그너는 오페라를 상연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라 리스트가 대신 <로엔그린>의 초연을 지휘해주고 이후로도 지원했다. 1860년대 들어 종교관 및 음악 노선의 차이에 더해 바그너와 리스트의 둘째 딸 코지마의 불륜 문제가 터지는 바람에 둘의 사이는 한동안 틀어졌다. 1867년부터 5년동안 서로 등돌리고 살다가 1872년 바그너가 화해요청과 함께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정초식에 초대하면서 관계가 회복되기 시작했다.

브람스와도 인연이 연결된다. 바이올리니스트 레메니와 함께 방문하자 리스트는 브람스의 <스케르초 E플랫 단조> 자필 악보를 초견으로 완벽하게 연주해보이면서 교류가 시작됐다. 리스트는 진보적 낭만주의, 브람스는 보수적 낭만주의의 대표적인 음악가로 추종자들이 서로 대립하면서 교류는 어정쩡한 것이 됐다.

요제프 단하우저가 그린 리스트와 친구들. 쇼팽과 베를리오즈, 마리 다구가 포함되어 있다
요제프 단하우저가 그린 리스트와 친구들. 쇼팽과 베를리오즈, 마리 다구가 포함되어 있다

북유럽 음악의 선구자 그리그도 리스트를 멘토로 삼았다. 리스트는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에 대해서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스칸디나비아 혼이다"라고 극찬하며 소질이 있으니 앞으로도 쭉 이렇게 하라고 격려했는데, 그리그에게 큰 힘이 됐다고 한다. 

카미유 생상스와는 1861년에 처음 만나 함께 연탄(4핸즈) 치는 것을 즐기거나 편지로 교류했다. 리스트가 <죽음의 무도>를 피아노로 편곡한 데 대한 답례로 생상스 역시 리스트 작품 몇개를 편곡했다. 생상스의 가장 유명한 교향곡인 오르간 심포니는 리스트에게 헌정됐다.

클로드 드뷔시는 1886년 로마에서 리스트와 만나 인상주의의 여명과도 같은 그의 작품 <에스테장의 분수>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드뷔시의 <물의 반영>과 모리스 라벨의 <물의 유희>도 이 작품의 영향을 받았다. 리스트는 심지어 변방인 러시아에도 관심을 가져 전독일음악협회의 음악제에서 거의 매년 차이코프스키, 러시아 5인조, 루빈슈타인 등 러시아 작곡가들의 음악이 연주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발라키레프의 교향시 <타마라>,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피아노 협주곡, 보로딘의 교향시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가 리스트에게 헌정됐다.

그가 얼마나 오지랖 넓은 사람이었는지에 대한 일화가 있다. 병든 아버지와 어린 동생을 먹여살리느라 어려운 형편에 있던 한 여성 피아니스트가 리스트의 수제자라고 거짓말을 하고 연주회 광고를 냈다. 우연히 그 도시에 리스트가 방문하게 되었는데, 거짓말이 들통나게 된 그녀는 먼저 리스트를 찾아가 사죄했다. 그러자 사정을 들은 리스트는 연주할 곡을 쳐보라고 한 후, 원포인트 레슨을 해주었다. "이제 나에게서 배웠으니 틀림없는 내 제자다. 연주회를 포기하지 말고 떳떳하게 연주하라." 격려는 물론 공연에도 직접 출연해 찬조 연주까지 해주었다고 한다.

리스트의 작품 목록에는 평생에 걸쳐 단 1개의 오페라를 포함, 수십개의 합창곡과 교향시, 수십곡의 성악곡과 몇곡의 실내악곡, 1천여 곡에 다다르는 피아노곡이 들어있다. 자신의 장기인 매우 기교적이고 화려한 곡들 외에 눈에 띄는 것은 700여곡에 이르는 피아노 편곡판이다. 리스트는 “피아노는 그 자체로 오케스트라다”라는 선언대로 많은 관현악 곡들, 오페라 등을 피아노 한 대로 표현해냈고, 이로 인해 피아노 음악은 큰 발전을 이루게 된다. 그의 피아노 편곡판은 단순한 편곡이 아니라 해당 작품의 정수를 꿰뚫어 재창조한 작품에 가깝다.

또 그 당시 비싼 연주회에 자주 가기 어려운 일반인을 위해 피아노 편곡판을 만들어 자주 무대에 올렸다. 잘 알려지지 않은 작곡가의 곡을 편곡하거나 연주해서 알리기도 했다. 특히 베토벤 교향곡 9곡을 모두 피아노로 편곡했는데, 거의 모든 음표를 놓치지 않느라 고난이도를 자랑한다. 이 곡들은 지휘 전공자의 수업에 필수다.

리스트는 교향시(symphonic poem)라는 장르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엄격한 형식미를 추구하는 절대 음악인 교향곡과 대비해 이 교향시는 다른 예술분야 작품에서 얻은 인상이나 작곡자 스스로의 영감에 기반한 표제음악이다. 리스트 이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생상스, 시벨리우스 등 많은 관현악 대가들이 이 방면에 걸작을 남겼다.

리스트가 활약하던 시기는 악기의 발전과 부르주아의 음악 소비층이 함께 진행된 낭만주의의 초창기이자 전성기였다. 멘델스존, 쇼팽, 슈만 등 천재들이 쏟아져 나오던 가운데 리스트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잘생긴 용모에 남다른 연출력, 놀라운 체력과 경쟁 상대가 없던 연주실력, 고고한 상류층 사교계 여성들을 팬덤으로 끌어들인 사교성, 선후배 음악가들과 교류하고 지원한 통 큰 대인배 스타일 등 스타의 모든 요소를 다 갖췄다. 음악사 전체를 통틀어도 리스트와 대적할 인물은 없다.

오늘날의 피아노 리사이틀 형식을 만들고 정착시킨 리스트의 연주회를 그린 펜화.
오늘날의 피아노 리사이틀 형식을 만들고 정착시킨 리스트의 연주회를 그린 펜화.

반면 리스트는 그의 실력에 반한 유럽 각국의 왕족, 황제들이 하사하는 귀족 칭호나 부와 명예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대우가 소홀하면 왕족의 연주요청을 거부하거나 모욕을 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음악인들에게는 아낌없이 베풀었다. 리스트는 근거지인 바이마르로 각지에서 몰려든 후배들에게 자신이 창조한 기교, 운지법, 작곡법 등을 언제나 공개하고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리스트의 후기 작품은 위에 말한 대로 드뷔시, 라벨과 같은 인상주의 악파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부조니, 스크리아빈, 라흐마니노프 등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교향시와 헝가리 집시 음악에서 발굴한 광시곡은 후기 낭만주의 및 국민악파 작곡가들의 중요한 음악장르가 되었다. 

리스트는 생전에 자신의 최고 발명품으로 리사이틀(recital)을 꼽았다. 당시 연주에는 찬조 출연자가 반드시 있었는데, 리스트는 혼자서 연주 전체를 책임졌고, 자신의 연주는 모두 암보로 연주했다.

청중에게 얼굴을 보이기 위해 피아니스트가 무대 안쪽에 앉던 형태를 청중과 가까이 하기 위해 피아노를 옆으로 돌렸다. 관현악곡의 사운드를 피아노로 구현하기 위해 피아노 뚜껑을 열어 음향반사판 기능을 부여했다. 피아노 한 대만으로 초절정 기교와 서정적 음악성, 관현악곡의 거대한 사운드를  청중에게 모두 선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그가 정립한 피아노독주회 형태는 초반에 연주자들에게 부담을 준다고 반응이 시원치 않았으나, 점차 정착해 오늘날 리스트가 만든 이 형태로 모든 피아노 독주회가 진행되고 있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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