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너미 시리즈5
'피아노의 시인 쇼팽 & 건반의 절대자 리스트' (3)
예술적 재능이 넘치는 젊은 남성 주위에 풍부한 감성과 사춘기적 도전 충동 또는 욕구 불만이 있는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 있다면 스캔들이 날 만한 충분한 환경은 이미 갖춘 셈이다. 시대를 불구하고 이와 같은 조건에서는 늘 스캔들이 일어났다.
중세의 음유시인들과 귀부인들로부터 시작된 스캔들은 현대에도 젊은 비르투오조(virtuoso 기교가 뛰어난 연주자)나 오페라 히어로(주로 테너가 맡는 남자 주인공)들이 그 면면한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물론 21세기에는 음악가들보다는 주로 배우와 가수, 그리고 인간 신체가 보여줄 수 있는 극한의 퍼포먼스를 자랑하는 프로 스포츠선수들이 더 주목을 받고 있다.
아직 프로 스포츠가 존재하지 않던 19세기 중반의 주요한 스캔들메이커는 당시 대중 오락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예술 분야, 특히 음악이었다. 특히 새로 떠오른 부르주아 부자들에게 음악이 필수교양이 되면서 음악가들과 부르주아 여인들의 접촉 기회가 넓어졌으니, 이는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스캔들이 시작되는 장소는 고전시대 은밀한 저택의 피아노 교습실에서 낭만시대에는 소규모 음악회가 열리는 살롱으로 확대되었고, 리스트의 시기에 이르러서는 대담하게도 대중 공연장의 주인공 분장실까지 활용되기도 했다.
이미 널리 알려진 쇼팽과 조르주 상드의 사랑은 파리 사교계 인사들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데 오래 지속된 가장 기묘한 사랑으로 손꼽혔다. 그러나 쇼팽의 사랑은 사실 상드 하나만은 아니었고, 그것이 사랑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반면 최고의 셀럽이었던 리스트는 주위에 우글대는 수많은 여성팬들을 뿌리치고 단 하나의 여인을 선택해 빛나는 커리어를 뒤로 한 채 사랑의 도피를 감행함으로써 당시 최대의 스캔들을 뿌렸다. 나중에 영혼의 반려자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을 만나 사랑의 극과 극을 보여준 특별한 경우이기도 했다. 이번 주는 음악 역사상 가장 독특했던 두 음악가의 사랑이 어떤 궤적을 그렸는지 찾아가 본다.
남장 여자 조르주 상드와 사랑한 쇼팽
1830년 다시 한 번 빈 음악계에 도전하려는 쇼팽을 위한 고별 연주회가 열렸는데, 콘스탄치아 그와드코프스카(Konstancja Gładkowska)가 찬조 출연해 로시니의 아리아를 불렀다. 사실 그가 바르샤바를 떠나는 이유가 짝사랑 그녀에게 차마 고백을 못하고 차라리 그녀가 없는 곳으로 가면 고민도 안하게 될까 해서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파리 정착 후 댄디한 미남이었던 쇼팽은 파리의 사교계 여인들의 관심을 받지만, 친구 리스트와는 달리 그녀들에게 별로 눈길을 주지 않았다. 1836년, 연주 여행차 드레스덴을 방문한 쇼팽은 그의 마음을 움직인 폴란드 소녀를 만난다. 바르샤바에서 알고 지내던 친구의 여동생 마리아 보진스카(Maria Wodzinska)였다. 26살의 쇼팽은 향수 때문이었는지 9살 연하 보진스카와 급격히 가까워져 비밀리에 약혼하기까지 이른다. 하지만 약한 체질인데다 잦은 여행으로 쇼팽의 건강이 나쁜 것을 눈치챈 보진스카 주변 사람들은 쇼팽과의 결혼을 반대했다. 결국 보진스카는 폴란드로 돌아갔고, 그후 거의 1년만에 파혼의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소설가 조르주 상드(George Sand 1804~1876)와의 사랑이 다가온다. 마리 다구(Marie D’Agoult) 백작 부인은 리스트와의 스위스 도피 여행에서 돌아와 파리에 살롱을 다시 열었다. 같은 건물 아래층에 살던 상드는 이 모임의 단골 멤버였다. 리스트가 쇼팽을 모임에 데려온 것은 1836년 10월, 쇼팽이 파리에 온 지 5년쯤 지났을 무렵이고 보진스카와의 짧은 인연이 끝나가던 때였다.
폴란드에서 귀족 자제와 어울려 자랐고, 파리에서도 명망 있고 예의 바른 귀족 가문의 여인들을 주로 보아온 쇼팽에게 칙칙한 남장에 시가를 피워대며 거침없는 언행을 일삼는 상드의 모습은 호감은 커녕 오히려 불쾌했다. 알려진대로 그녀를 거쳐 갔던 남성 목록에는 유명 작가, 시인, 정치인, 의사, 음악가 등이 올라 있었으며 그 목록은 길었다.
반면 상드의 눈에 쇼팽은 귀여웠다. 그녀는 친구에게 “쇼팽 씨는 진짜 소녀가 아닌가요”라고 물으며 재미있어했다. 첫 결혼에서 남편 뒤드방 남작에게 상처를 받은 상드는 자유 연애를 결심하고, 당시 수동적이었던 여성들과 반대로 적극적으로 남성을 리드하면서 연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래서인지 만나는 남자마다 비교적 허약했으며, 특이하게도 예술가가 많았다. 쇼팽은 이 조건에 딱 부합하는 사람이었다. 많은 연애 경험을 바탕으로 인내와 끈기로 쇼팽의 마음을 사로잡은 상드, 그녀는 2명의 자녀를 둔 이혼녀에다 쇼팽보다 6살이나 연상이었다.
상드는 기타와 하프시코드를 연주할 수 있었고 파리로 와서는 오페라와 연주회를 즐겨 찾던 음악 애호가였다. 쇼팽은 불편했던 겉모습 뒤에 숨은 상드의 다른 모습, 밝고 지적이면서 상냥하기도 한 일면을 발견한다. 2년여 간 상드의 끈질긴 구애 끝에 둘은 연인 관계가 됐다. 몇 개월 후 상드는 화가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1798~1863)에게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신이 당장 죽음을 내리더라도 불평하지 않을 거예요. 왜냐면 3개월간의 온전한 황홀함을 경험했으니까요.”
이 연애는 당시 파리 사회에 큰 파란을 일으켰다. 둘은 따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스페인의 마요르카 섬으로 떠났다. 그 섬은 예술가에게 많은 영감을 불어 넣어주는 아름다운 경관을 가진 곳이지만 생활하기는 너무 불편했다. 제대로 된 침대 하나 없고 변변치 않은 식사로 원래 몸이 허약했던 쇼팽은 결국 병이 났다. 전염성 강한 결핵일 수 있다는 두려움에 섬 사람들이 아무도 숙소를 제공해 주지 않아 그들은 버려졌던 수도원으로 옮겨 생활했다.
상드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쇼팽은 쉽게 건강을 회복하지 못했다. 긴 병에 효자가 없다고 했던가, 상드는 긴 시간 쇼팽에게 마치 어머니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느껴져 그를 자식 돌보듯 대하게 된 것이다. 서로가 연인으로의 감정은 사라진 채 둘의 관계는 계속 유지되었다. 이후 그들은 스페인에서 돌아와 프랑스 중부 노앙의 시골에 있는 상드의 집에서 주로 생활했다. 쇼팽은 상드에게 보살핌을 받았지만 사실 음악적 영감도 많이 얻었다. 마요르카 시절에 작곡한 ‘빗방울 전주곡’을 비롯한 24개의 전주곡집과 소나타, 녹턴, 마주르카 등이 상드와 함께 했던 9년 동안 만들어졌다. 그러나 사랑이 식어버린 두 사람의 관계는 하루 하루가 위태했으며 작은 것에도 마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847년 초 기병대 출신으로 남성미 넘치고 야심만만한 조각가 클레징제에게 상드와 솔랑주 모녀는 흉상 제작을 의뢰했다. 돈을 보고 상드와 솔랑주에게 접근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지라 쇼팽이 알아보니 그는 빚쟁이, 주정뱅이에 상습 폭력범이었다. 그런데도 마초인 클레징제가 반항적인 솔랑주를 길들일 수 있으리라 기대한 상드는 그의 편을 들며 쇼팽을 배제했다.
5월에 열린 결혼식을 신문을 보고서야 알게된 쇼팽은 참석하지 않았다. 솔랑주에 대해 각별하던 쇼팽은 솔랑주의 앞날에 대한 걱정을 피할 수 없었다. 딸의 결혼 즈음에 쓴 상드의 편지 한쪽 구석에 상드가 세상을 떠난 후 솔랑주는 이런 메모를 남겼다. “놀라운 이야기. 솔랑주가 결혼하려던 그 사람은 한 때 G.S.와 소설 같은 열정적 관계에 있었다.” 사실 클레징제는 상드를 먼저 유혹했던 것.
상드는 사치를 부리다 빚더미에 앉아 돈을 요구하는 딸과 사위를 노앙으로 불렀다. 아무 것도 얻지 못한 부부가 돈 될 만한 물건을 쓸어담자 사람들이 말렸다. 그러다 클레징제의 주먹이 랑베르에게 날아가고, 상드의 아들 모리스는 매형의 망치에 머리를 맞을 뻔 했다. 상드는 클레징제에게 달려들어 따귀를 때리며 망치를 빼앗았다. 흥분한 클레징제는 장모의 가슴에 주먹을 날렸고 상드는 나가 떨어졌다. 다른 사람들이 총을 쏘겠다는 모리스를 간신히 진정시켰다.
당시 파리에 있던 쇼팽은 이 사건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다. 임신 상태였던 솔랑주의 편지에 엄마와 딸의 통상적인 다툼으로만 생각한 그는 솔랑주에게 자기 마차의 사용을 허락했다. 이 일로 쇼팽이 자신을 등지고, 솔랑주 부부의 편에 섰다고 판단한 상드는 상처를 받았고 결국 이것이 계기가 되어 관계를 정리한다.
내성적이었던 쇼팽은 상드가 보낸 이별 통보 편지를 받고 많이 힘들어 했다. 사실 헤어지기 전에도 그는 상드와 동거하면서 많이 지치곤 했다. 이 스토리는 <쇼팽의 푸른 노트>라는 영화로 그려졌는데, 원제목은 <쇼팽의 우울한 음표>로 번역되는 게 정상이다.
그들의 관계는 널리 알려진 것과는 달리 상드의 일방적인 헌신이 아니었다. 작곡, 연주와 레슨으로 얻는 수익의 대부분이 상드와 그 아들딸한테 갔다고 한다. 상드와 헤어지고 난 후 쇼팽은 건강이 더 악화됐다. 그를 극진히 간호해 줄 사람도 없고 지출이 많아지면서 그는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졌다. 음악적 영감을 불어넣어 준 상드가 없자 작곡도 줄었다. 이후 쇼팽은 상드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간직한 채 병상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쇼팽의 장례식장에 상드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솔랑주가 그 장례식에 참석했다.
솔랑주와 남편 클레징제는 8년만에 이혼했고, 솔랑주는 몇 편의 소설을 냈으나 모친과 달리 주목받지 못했다. 솔랑주는 여러 명의 남자를 만났지만 불행하게 살았다. 세상의 시선에서 자유롭게 살았던 상드에게도 마지막이 다가왔다. 1876년 72세의 상드의 상태는 위독해졌고, 소식을 들은 딸 솔랑주는 파리에서 급히 노앙으로 달려와 엄마가 고통 받을 때마다 꼭 안아주었다. 조르주 상드는 가족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고 딸은 엄마의 눈을 감겨주었다. 솔랑주는 쇼팽의 임종시 눈을 감겨주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파리를 뒤흔든 스캔들의 주인공들
파가니니 공연을 보고 테크닉의 연마에 몰두했던 리스트는 ‘피아노의 파가니니’로 알려진다. 리스트는 1833년 마리 다구 백작 부인(Marie D’Agoult 1805-1876)을 만났다. 리스트의 나이는 22세, 마리는 28세였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난 그녀는 두 언어는 물론 영어도 잘했다. 피아노와 성악에도 소질이 있었으며 문학, 역사, 철학의 지식도 상당했다. 그녀의 남편 샤를 다구 백작은 기병대 대령 출신으로 그녀보다 15살 위였지만 지적인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십대의 나이에 나이 많은 남자와 정략결혼을 한 탓에 부부관계에 흥미가 없었고 우울증에 시달렸다. 살롱을 열어 작가 빅토르 위고와 하인리히 하이네, 음악가로는 베를리오즈, 쇼팽 등이 드나들면서 그들과의 교류를 피난처로 삼았다. 미모와 세련된 매너, 풍부한 교양을 갖춘 그녀는 파리 사교계의 여왕이었다.
처음에 리스트를 쌀쌀맞게 대했던 그녀는 당당한 외모에 마성의 음악성까지 겸비한 리스트의 열렬한 구애에 일단 마음을 열자 걷잡을 수 없이 그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이미 두 아이가 있었지만 둘은 파리 근교 크루아시에 있는 마리의 저택과 파리 시내의 리스트의 아파트를 오가며 은밀히 만났다. 1834년쯤엔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커플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리의 딸이 갑자기 병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자신의 외도에 대한 천벌이라는 죄책감에 한동안 자신을 가두고 아무도 보지 않았다. 리스트는 상드의 인기 소설 <렐리아>를 그녀에게 보내는 노력 끝에 그녀를 불러냈다.
1835년, 리스트는 당시 갓 설립된 스위스의 제네바 음악원에 교수로 취임해 이주하면서 유럽 각지로 연주 여행을 다니기 시작한다. 마리 다구는 넉달 후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제네바로 가서 그와 동거를 시작한다. 이미 둘 사이의 첫 딸 블랑댕(Blandin)을 임신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후 4년간 두 사람 사이에서 1남 1녀가 더 태어났지만 둘은 정식결혼은 하지 않았다. 19세기 중엽의 도덕률에 반하는 리스트와 마리의 동거는 파리 사교계의 엄청난 화제거리였다. 1836년 여름이 지났을 때 리스트-마리 커플은 스위스 생활을 정리하고 파리로 돌아왔다.
마리 다구는 리스트에게 뮤즈와 같아 그의 창작력은 마리를 만난 이후 본격적으로 발휘되었다. 그러나 사교계의 꽃으로 공주병 기질이 강했던 그녀는 리스트가 밖으로 나돌지 말고 자신에게 집중해 주기를 바랐지만 이제 막 전성기를 맞은 리스트는 그럴수 없었다. 끝없이 연주여행을 다니고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다른 여자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 결국 막내 다니엘을 낳은 직후 그녀는 별거를 선언하고 파리로 돌아가 버렸고, 자식 양육문제 등으로 5년 정도 관계를 질질 끌다가 결국 1844년에 완전히 갈라선다. 마리는 귀족 집안 출신에 씀씀이가 컸는데 리스트와의 동거 이후에도 낭비벽이 고쳐지지 않았다. 연주활동과 레슨으로 적잖은 돈을 벌어들였던 리스트였지만 밑빠진 독에 물붓기였다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마리가 리스트의 아이를 낳은 유일한 여인이다. 리스트와 결별한 마리는 1846년 자신과 리스트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넬리다(Nelida)>를 발표해 베스트셀러가 된다. 리스트와 자신의 이야기를 예술가 청년과 귀족 부인의 사랑 이야기로 그렸다. 그런데 남주인공을 의지가 박약한 화가로 그려 끝내 자신의 품 안에서 죽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끝까지 미련이 남았던 모양이다.
자유롭게 연주와 성생활을 즐기던 리스트는 1847년에 러시아 키예프에서 운명을 돌려놓을 여인 비트겐슈타인 공작부인(Carolyne zu Sayn-Wittgenstein, 1819~1887)을 만난다. 프란츠 리스트는 36세, 카롤리네는 28세였다. 카롤리네는 폴란드 출신 대지주의 외동딸로 17세의 나이에 러시아 귀족 니콜라우스 비트겐슈타인 공작과 정략결혼을 했다. 카롤리네 집안에서는 공작이라는 직위가 필요했고, 남편 집안은 카롤리네의 부가 필요했다. 종교적으로도 맞지 않았고 사랑도 없었던 이 결혼은, 둘 사이에 딸이 태어나고 채 1년도 되지 않아 별거로 귀결되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카롤리네는 리스트가 키예프 대성당에서 연주한 합창곡 ‘주의 기도’를 듣고 깊은 감명을 받아 익명으로 100루블을 기부한다. 당시로선 큰돈이었으므로 리스트는 감사를 전하려고 수소문 끝에 카롤리네를 만났다. 둘은 금세 사랑에 빠졌다. 카롤리네는 유럽 최고의 스타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 신기했고, 종교적으로도 잘 통했다. 카롤리네는 리스트를 만난 후 일기장에 ‘아버지가 나를 강제로 결혼시킨 것을 후회하시고 돌아가신 후 리스트를 선물로 보내주셨다’라고 썼다.
리스트는 쉴 새 없는 연주로 막대한 돈을 벌었기에 카롤리네의 재산에 이끌리지는 않았다. 리스트는 카롤리네의 권유로 그동안 달려온 순회공연에 마침표를 찍는다. 그리고 바이마르(Weimar) 궁정악단의 카펠마이스터 자리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둘은 바이마르에 정착했다. 리스트는 연주자로서 명성을 내려놓고 창작 활동의 전성기를 시작했다. 게다가 전 유럽에서 몰려든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육자가 됐다. 이렇게 소도시 바이마르는 순식간에 음악의 중심지가 됐다. 그 이후 리스트가 자신의 명성이나 돈을 위해 무대에 서는 일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카롤리네는 리스트와 동거 즉시 혼인 무효 소송에 들어갔다. 카롤리네의 남편은 혼인 무효가 되면 막대한 재산을 잃는 신세가 되므로 소송에 악착같이 매달렸다. 또한, 카롤리네가 리스트와 재혼하면 러시아로선 영토를 잃는다는 생각으로까지 비약됐다. 카롤리네는 막대한 부를 동원해 가톨릭 교구에 로비를 벌였으나 러시아 제국이 압력을 행사했기에, 이 소송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
소송이 엎치락뒤치락 14년이나 끌면서 결국 카롤리네는 리스트를 얻기 위해 모든 재산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1861년,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로마에서 둘의 결혼식이 준비됐다. 하지만 결혼식을 하루 앞두고 다시 좌절하고 만다. 이번에는 카롤리네의 외동딸이 제동을 걸었다. 기존 혼인이 무효가 되면 자신에게 상속될 재산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며 읍소했다. 마음이 약해진 카롤리네는 소송을 포기하고 돌연 수녀원으로 들어갔다.
리스트의 실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카롤리네의 마음도, 소송도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설상가상으로 리스트의 큰딸 블랑댕이 아이를 낳고 곧 패혈증으로 사망한다. 몇 년 사이 아들 다니엘과 큰딸을 잃고 14년을 함께 살아온 여인과 이별한 리스트는 다시 한 번 ‘울음, 고통, 괴로움, 두려움에 의한 변주곡’을 만들어 자신의 심정을 담았다.
1863년, 리스트는 로마의 한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기고 사제서품을 받았다. 과거의 아이돌 스타가 사제로 변신하자 다시 한 번 관심이 쏠렸다. 리스트는 그곳에 업라이트 피아노 한 대를 놓고 종교적인 작품들을 썼다. 이곳에서 5년을 칩거하는 동안 전 유럽의 피아니스트들이 그에게 배우고자 몰려들었다. 그는 무료로 그들을 가르쳤으며, 가끔은 자선행사 무대에 올라 여전한 기량을 선보였다.
1869년에 바이마르의 통치자인 카를 알렉산더(Karl Alexander)가 집을 제공해주면서 리스트는 바이마르로 돌아왔다. 근거지를 이곳에 두고 로마와 부다페스트를 오가는 생활이었다. 물론 이곳에서도 피아노 교습은 계속했다.
1876년 마리 다구가 사망했다. 1883년에는 바그너가 사망했다. 건강이 나빠진 리스트는 1886년, 손녀인 다니엘라 폰 뷜로의 결혼식 겸 바그너 축제 참가를 위해 바이로이트를 방문했다. 이곳에서 폐렴에 걸려 회복하지 못하고 인생의 종지부를 찍었다.
리스트의 사망 소식을 들은 카롤리네는 심장 발작을 일으켰다. 그리고 몇 달 후 그녀도 눈을 감았다. 그녀의 사후에 발견된 유언장에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리스트에게 남긴다는 말과 함께, 그 끝에는 ‘카롤리네 리스트’라는 서명이 남겨져 있었다. 살아서는 끝내 ‘리스트 부인’이 되지 못했지만, 카롤리네의 마음속에 리스트는 이미, 그리고 영원히 남편이었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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