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너미 시리즈5
'피아노의 시인 쇼팽 & 건반의 절대자 리스트' (2)
쇼팽 시대의 폴란드는 그야말로 굴욕의 시대였다. 966~1572년 폴란드 왕국은 나름 동유럽의 패권을 누렸던 적도 있을 만큼 당당한 나라였다. 그러다 왕위 계승 문제로 몇 번의 전쟁을 치르며 약화되는 사이 러시아와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제국이 세력을 키워 폴란드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가 1769~1770년 독일계 주민들이 살고있는 폴란드 남부 지역을 병합했는데도 탈환전쟁을 하지 못했다. 이렇게 약해진 폴란드를 놓고 1772년 8월 5일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는 폴란드 분할 조약(1차 분할)을 체결하고 곧 이어서 각각 폴란드를 점령했다. 폴란드 분할은 강대국들이 짜고 약소국을 나누어 갖는 고전적인 영토팽창 수법의 전례가 됐다.
1791년 5월 폴란드 의회는 유럽 최초의 근대적인 성문 헌법인 5·3 헌법(Konstytucja 3. Maja)을 제정하나 친러파에 의해 폐지됐다. 1793년 9월 새로 소집된 의회는 침묵 속에 폴란드분할 조약(2차 분할)을 비준하고 말았다. 이렇게 폴란드는 단지 21만Km²의 영토와 370만의 인구를 가진 소국으로 전락했다. 당시 코시치우슈키 봉기(Powstanie Kościuszki)는 러시아에 저항한 무장봉기로, 라츠와비체(Racławice) 전투에서 승리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러시아는 군대를 보내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1795년 3차 분할로 폴란드라는 국가는 사라졌고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분할 3국은 폴란드 지역에 자국의 제도를 이식해 자국화 정책을 서둘렀다. 분할 3국은 1797년 '폴란드(Polska)'라는 말을 일절 사용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반면에 폴란드 기득권층은 특권과 재산을 병합국이 보장해 기꺼이 그들에게 부역했다.
러시아에 대한 적개심으로 10만 명의 폴란드인이 참전했던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실패로 끝나자 나폴레옹에 걸었던 폴란드 민족의 모든 희망도 좌절되었다. 1815년 빈 회의에서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의해서 재분할되었다. 바르샤바 공국은 러시아와 영원히 결합되는 폴란드 왕국으로 개편되었다. 이렇게 되어 바르샤바 공국은 러시아와 프로이센에 의해서 분할되었다. 폴란드의 독립운동은 계속되었으나 세계 제1차대전 후에 독립할 때까지 123년 동안 폴란드는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분할되어 그들의 지배를 받았다.
반면 신성로마제국의 위상을 누리고 있던 오스트리아 제국은 여전히 중부유럽의 패권국가였다. 그러다 7년 전쟁(1756~1763)에서 승리하지 못하고 러시아제국의 진출과 독일에서의 프로이센 왕국의 발흥을 도운 셈이 됐다. 모차르트에게 선대(善待)했던 계몽군주 요제프 2세(재위 1765~1790)는 농노 해방과 징병제, 의무교육 등 대대적 개혁을 추진했으나 그의 사후 개혁은 좌절되었다.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 후 나폴레옹에게 패배한뒤 1806년 신성로마제국은 해체되었다. 재상 메테르니히는 1810년 황녀 마리아 루이자와 나폴레옹의 정략결혼으로 유화정책을 추진했다.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그는 빈 회의(1814∼1815)를 주도해 복고·정통·연대를 기조로 유럽에 반동체제를 확립해 자유의 움직임을 탄압했다.
1815~1848년 오스트리아 제국은 경찰국가 체제였다. 산업성장에 따라 시민의 힘이 강해지면서 독재에 반발하는 자유주의와 국가주의가 갈등을 일으키다 1848년 3월 혁명이 일어났다. 메테르니히와 황제 페르디난트 1세는 각각 사임, 퇴위해야 했고 제위는 황제의 어린 조카, 프란츠 요제프에게 넘어갔다. 혁명의 전면에 하층시민이 부상하자 부르주아들이 빠지면서 10월 말 반혁명파의 승리로 끝났다. 혁명 뒤에는 농민해방에 이어 근대화를 추진시켰기 때문에 산업혁명의 물살을 타고 자본주의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전형적인 다민족국가였던 오스트리아에서 혁명은 여러 민족의 독립운동을 표면화시켜 이후 혼란기로 들어선다.
향수(鄕愁)의 애국자 쇼팽
약관의 나이에 많은 나라를 여행해본 쇼팽은 결국 폴란드는 자신의 음악을 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에도 끝까지 자신은 폴란드에 남겠다며 고집을 피우기 시작한다. 하지만 친구들과 부모님, 그리고 스승의 설득에 의해 결국 파리로 떠나게 된다. 이때 그가 떠나며 만든 곡이 연습곡(Etude) Op.10-3, '이별의 곡'이다.
프랑스 대혁명 이후 유럽이 재편되는 혼란의 시기인 1830년 11월 2일 다시 빈을 방문한 쇼팽은 체르니와 훔멜에게 호평을 받는다. 그러나 빈의 청중들은 쇼팽의 음악에 낯설어했다. 그러나 로베르트 슈만은 1831년의 비평에서 그에게 "모두 모자를 벗어라. 천재가 등장했다"라는 표현을 써가며 쇼팽을 극찬했다. 그런데 정작 쇼팽은 청중 반응과 동떨어진 이 글에 대해 "슈만은 나를 천치로 만들고 있다"라고 말하며 마뜩찮아 했다고 한다.
폴란드에서 같은 달 하순 1830년 11월 바르샤바 봉기의 소식이 빈에 들려오자 그는 바로 길을 돌려 폴란드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쇼팽을 파리까지 동행하려고 같이 간 친구 보이치초프스키(Woyciechowski)가 그를 말렸다. 쇼팽이 잠시 멈춰 고민했지만, 그 사이에 이미 친구가 탄 마차는 출발했고, 쇼팽은 빈에 혼자 남게 된다. 그 후, 쇼팽은 아버지에게 “조국을 위하여 싸우겠다, 아니 북이라도 치겠다” 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아버지로부터 “조국을 위해 음악을 열심히 하는 길도 애국”이라는 답장을 받고, 파리로 가던 길을 가겠다고 결정했다고 한다. 혼자가 된 쇼팽은 고국의 친구에게 “조국을 떠난 그 순간을 저주한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듬해 9월 빈을 떠나 파리로 향하는 도중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혁명의 좌절을 전해 듣는다. 쇼팽의 집도 당시 러시아군의 약탈로 엉망이 되었는데, 러시아군은 그의 집에 있던 피아노까지 도끼로 부숴 땔감으로 썼다고 한다. 이 만행을 들은 쇼팽은 자신의 일기에 "하느님, 당신은 러시아인이십니까?"라고 적으며 울분을 토로했다. 같은 시기에는 술집에서 러시아인들이 "하느님의 최대 실수는 바로 폴란드인을 창조한 거야"라는 조롱을 듣는 수모도 겪었다. 그의 일기에는 이런 부분도 나온다. “오 신이여, 당신이 계신다면 왜 복수를 하지 않으시나요?” 친구 야치메키(Jachimecki)는 이 사건에 대해 “쇼팽에게 과거와 현재, 미래까지도 자신이 폴란드인임을 각인시킨 애국적 각성”이라고 증언했다.
1831년 쇼팽이 파리에 도착하여 바르샤바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는 러시아군의 잔혹한 진압에 대한 분노와 조국과 집에 있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 등이 뒤엉켜서 연습곡 Op.10-12, '혁명'이라는 격정적인 곡을 작곡하였다.
파리에서 쇼팽은 바르샤바 혁명의 좌절 후 부모로부터의 지원이 끊겨서 난민처럼 혼자 남게 되었다. 폴란드는 당시 음악적으로 변방이었고 그런 나라 출신 음악가라고하니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그는 파리 정착 초반에 경제적으로 고통을 겪었다. 1832년 2월 첫 독주회를 열었으나, 별 소득이 없자 쇼팽은 미국으로 건너갈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길거리에서 로스차일드(Rothchild)가와 연관이 있는 고향 귀족을 만나게 되어 귀족들과 사교계 인사들이 드나드는 살롱에 소개됐다. 살롱에서의 연주회로 호평을 받아 의욕이 생긴 쇼팽은 파리에 정착하기로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후대에 널리 알려진 많은 피아노 곡을 작곡하게 된다. 1835년 그는 드디어 프랑스 여권을 획득했지만, 끝까지 자신을 폴란드인으로 생각했지, 아버지의 나라 프랑스에 속하기를 원한 적이 없었다.
한때 그는 파리 음악계에 진입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불리던 프리드리히 칼크브레너(Friedrich Wilhelm Michael Kalkbrenner)에게 피아노를 더 배울까 생각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때,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결정적인 도움을 준 음악가가 있었으니, 바로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였다. 칼크브레너의 피상적인 연주 스타일 때문에 쇼팽이 개성을 상실할까 우려한 친구 리스트와 그의 소개로 만난 펠릭스 멘델스존, 힐러 등이 만류했다.
게다가 무려 3년이나 배워야 한다는 말에 급기야 쇼팽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멘델스존은 이렇게 평가했다. “피아노는 쇼팽이 더 잘 쳐!” 쇼팽은 꽤나 베스트 드레서여서 살롱의 여성들에게 눈길을 끌었다고 전해진다. 이따금씩 건반에 피아노 헝겊을 덮고 연주를 하는 묘기도 보여주었다. 다만 본인은 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미 스타로 떠올라 있던 리스트는 이름 없던 쇼팽을 파리의 사교계와 음악계, 귀족 사회에 소개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했다. 이로 인해 쇼팽은 리스트 때문에 별로 좋아하지 않던 대형 독주회를 여러 번 하게 되었다. 어쩌면 쇼팽은 리스트 덕분에 그가 원하는 것과는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1836년, 드레스덴을 여행하던 쇼팽은 바르샤바에서 사귀었던 친구의 여동생 마리아 보진스카(Maria Wodzinska)와 다시 만난다. 쇼팽은 향수 때문이었는지 17살 소녀 보진스카와 비밀리에 약혼했지만, 쇼팽의 건강이 나쁜 것을 눈치챈 보진스카 주변 사람들의 반대로 결국 파혼하고 말았다. 쇼팽은 파리에서도 폴란드 문학협회 회원으로 활동했고, 율리안 폰타나(Julian Fontana), 알베르트 그르지마와(Albert Grzymała)와 같은 폴란드 출신 친구들의 도움을 받았다.
1830년대 작곡가들의 천국과도 같은 파리의 분위기를 타고 리스트의 도움도 작용해 1838년경 쇼팽은 이미 파리의 명사가 되었다. 그의 친구로 리스트와 멘델스존 말고도, 작곡가 빈첸초 벨리니(Vincenzo Bellini),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가 있었다. 쇼팽은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와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과도 친했는데, 그들의 음악을 비판하기도 했지만 그들에게 작품을 헌정하기도 했다. 칼크브레너는 쇼팽을 인정해 당대 가장 유명한 피아노 제작자인 카미유 플레이엘(Camille Pleyel)에게 소개했고, 쇼팽은 플레이엘의 새 피아노들을 마음껏 연주해볼 기회를 누렸다. 당시 쇼팽, 리스트, 멘델스존, 베를리오즈를 모아 리스트는 '낭만파 형제들'이라고 불렀다.
코스모폴리탄 아이돌이었던 리스트
모차르트가 그러했던 것처럼 소년 리스트는 3년 동안 연주를 위해 끊임없이 여행을 다녔다. 여행에 지친 어머니 안나는 1824년에 고국으로 돌아가 자매와 그라츠(Graz)에서 살기로 했다. 어머니의 보살핌을 잃은 리스트는 심신이 지쳐서 무대에 오르는 것도 싫어했다. 후일 이 시절에 대해 자신이 '서커스의 동물' 같았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리스트는 정신적인 안정을 찾기 위해 종교에 심취해 연주 대신 신학교에 들어가고 싶다고 아버지에게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 1827년 8월 아버지 아담은 지친 아들을 데리고 휴양 목적으로 볼로뉴(Bologne) 지방의 온천에 갔는데, 여기서 그만 장티푸스에 걸려 급사하고 만다. 나중에 리스트는 가끔 볼로뉴 지방을 방문했음에도 부친의 묘지는 방문하지 않았다. 천재병에 걸려 자신을 내몰았던 아버지를 원망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부친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리스트는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하면서 고국의 어머니까지 부양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리스트는 연주여행을 중단하고 어머니를 파리로 불러 작은 아파트로 이주했다. 생계를 위해 피아노 과외와 연주, 작곡 등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심신이 무너져가는 그에게 프랑스의 상공대신 가문의 딸 카롤린 드 생크릭(Caroline de Saint-Cricq)과의 첫사랑 실패는 결정타를 안겼다. 19살 리스트는 실연의 충격에 깊이 빠져 마비증세를 일으키기도 했으며, 죽고 싶다는 말이 와전되어 지역 신문에 그의 부고기사가 오보로 실리기도 했다. 음악활동도 할 수 없어 돈벌이가 끊기자 지인들의 도움으로 힘겹게 살았다. 고통을 잊기 위해 가톨릭 신앙에 침잠하던 그는 다시 사제가 되려고 했지만 이번에는 어머니와 지인들의 만류로 성직자의 길을 단념했다.
20살 무렵 비올리스트 크레티엥 위앙(Chrétien Urhan, 1790~1845)의 소개로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와 만난다. 리스트는 이들을 통해 낭만주의 음악사조를 본격적으로 접하고 빈 고전파 양식에서 점차 벗어나 독자적 스타일을 만들어 나가게 된다. 실의의 긴 터널을 빠져나올 무렵 1832년 파리에 유행한 콜레라 희생자들을 위한 자선콘서트가 열리는데, 주최자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였다. 21살의 리스트도 청중으로 참석했는데, 엄청나게 화려하고 기교가 충만한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고 충격을 받는다. 파가니니처럼 청중을 휘어잡을 수 있는 강렬한 테크닉을 개발하고 연마하게 되는데, 1838년 발표한 6곡의 ‘초절기교 연습곡’(Transcendental Etudes) 시리즈는 이러한 노력의 결과다. 슈만이 '리스트 본인조차 몇몇 패시지는 꼼꼼이 연습해야 했을 것'이라고 했을 정도의 난이도였다.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영향을 받은 최초의 작품으로 그의 바이올린 협주곡 2번 3악장을 모티브로 ‘작은 종에 의한 화려한 대환상곡’(Grand Fantasia de Bravoure sur La Clochette, 1832)을 작곡했는데, 이 곡이 바로 오늘날도 난곡으로 꼽히는 ‘라 캄파넬라’(La Campanella)다. 지금은 예술고 피아노 전공자라면 도전해볼 정도로 피아노교수법이 발전해 있지만, 초연될 당시에는 "리스트 외에 아무도 연주할 수 없는 곡"이라는 말이 나돌았을 정도로 청중들의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리스트는 편곡 재능도 각성하여 1833년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을 피아노로 편곡하였다. 당시 ‘환상교향곡’은 작곡된 지 3년이 지났는데도 악보가 출판되지 못해서 거의 연주되지 못하고 있었다. 리스트가 피아노 편곡판을 1834년 베를린에서 자비로 출판하고 무대에 오를 때마다 연주하여 이 곡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리스트는 ‘환상교향곡’ 이후 각종 관현악곡이나 오페라 아리아를 자주 피아노로 편곡했다. 대중들에게 비쌌던 대규모의 관현악 음악을 간접적으로나마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던 셈이다. 또 재능있는 신인작곡가 또는 무명작곡가들의 음악도 편곡의 대상이 되었다. 자신의 솜씨를 뽐내려는 과시욕도 있었겠지만, 이런 활동을 통해 리스트는 파리 음악계의 중심으로 떠오른다.
이 즈음 쇼팽이 파리에 도착했고, 단박에 그의 비범함을 알아본 리스트는 그의 파리 사교계 입문에 적극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후 둘은 1849년 쇼팽의 죽음까지 서로 경쟁심과 경외감이 섞여 있는 가운데 미묘한 프레너미 관계를 쌓았다.
리스트 연구자들은 파가니니가 리스트에게 순식간에 강렬한 충격을 준 연주가라면, 쇼팽과 베를리오즈는 리스트의 작곡 양식과 음악 철학의 기초를 제공해 준 작곡가였다고 평가한다. 리스트의 음악에 나타나는 각종 관현악 기법, 대담한 화음, 화려하고 웅장한 음악 양식, 종종 드러나는 악마적 경향은 주로 베를리오즈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며, 문득 문득 나타나는 서정적인 표현들은 쇼팽에게 배웠다는 것.
피아노의 파가니니로 본격 이름을 알린 리스트는 1833년 살롱가에서 6살 연상의 마리 다구 백작 부인(Marie d’Agoult 1805~1876)을 만나 유럽 사교계 전체를 뒤흔든 스캔들의 주인공이 된다. 5년 정도 이어진 관계는 결국 1844년에 완전히 끝났다. 이 사생활과 별도로 리스트는 연주자·작곡가로서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었는데, 마리 다구와의 5년만의 이별로 인해 눈치를 볼 대상이 사라지자 오히려 그의 음악 이력과 여자 관계는 더욱 화려해졌다. 그는 유럽 전역을 순회하며 피아노 연주회를 열었고 지휘자로도 종종 활동하였고, 자선 연주와 각종 음악 사업의 후원에도 힘을 쏟았다.
1842년쯤에는 이미 ‘리스트 광풍’(Lisztomania)으로 명명된 그의 유명세와 영향력이 전 유럽으로 퍼졌다. 연주요청은 음악 변방이던 포르투갈 왕국이나 심지어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서도 초청장이 날아왔다. 부지런한 리스트는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연주요청을 거의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덕분에 그는 국제적 팬덤을 거느린 최초의 음악가가 되었다.
그는 연주 효과를 높이기 위해 피아노를 무대에 가로로 놓았고, 피아노 뚜껑을 적절한 각도로 열어 놓아 반사된 소리가 청중들을 향하도록 했다. 지금도 쓰이는 이런 표준적 피아노 세팅은 그가 처음 확립한 것이다. 리스트는 또 초절기교 외에도 각종 음악 외적인 퍼포먼스를 도입했다. 피아노를 치면서 손을 허공으로 치켜 올리고 고개를 뒤로 제끼는 것은 물론, 연주 도중에 일부러 기절하는 척하거나 건반을 치다가 장갑을 벗어 던지는 퍼포먼스도 고안했다고 한다.
당시의 상류층 귀부인들은 그의 연주와 퍼포먼스에 흠뻑 빠져들었다. 리스트가 연주를 끝내면 젊은 귀족 부인들은 체통을 잊고 무대 위로 올라가 쟁탈전을 벌였는데, 그 대상이 그가 피우던 시가 꽁초나 연주하다 끊어먹은 줄, 혹은 그가 연주 도중 퍼포먼스로 벗어 던진 장갑 따위였다. 그의 과도한 퍼포먼스에 호응이라도 하듯 때로는 객석에서 가짜로 실신하거나 무대 위로 보석을 던져서 의도적으로 그의 관심을 끌려던 귀부인들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반세기 전 미국의 팝송 가수 클리프 리차드의 내한 공연이 열린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무대로 속옷을 던진 여성도 있어 엄청난 비난을 받았는데, 거의 200년 전 유럽에 이런 일이 있었다니 상상이나 가는 일인가. 빈정이 상한 남자들은 그의 연주를 순회서커스단의 묘기에 빗대어 비아냥대기도 했다. 어찌 됐든 그는 전무후무한 인기와 명성을 누렸고, 많은 귀족 여성들과의 ‘원 나잇 스탠드’는 덤이었다.
당시 신문이 리스트 광풍을 묘사한 기사에 의하면 1842년 베를린 연주회가 끝나고 그가 떠날 때, 그의 뒤에 수백 대에 달하는 개인 마차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리스트는 백마 6마리가 끄는 마차를 비롯해 30대가 넘는 마차의 호위를 받으며 떠났다고 하는데, 기사를 쓴 기자가 "그는 왕과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바로 왕이었다"라고 비유했다. 이후 ‘피아노의 제왕’은 그의 별명이 되었다. 그야말로 현대 대중음악 아이돌들의 진정한 시조가 아니었을까?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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