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데이터를 모으고, 인간은 큐레이션한다

'지식 권력' 시대에서 '해석이 권력'인 시대로 전환

AI 시대, 교수들이 가장 곤란해하는 일 중 하나는 학생들이 리포트를 인공지능으로 작성한다는 점이다. 직접 썼는지, AI가 만들어냈는지 판단하기 어려운 시대. ‘글이 너무 잘 써져서 오히려 의심스럽다’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다. 그렇다면 AI의 활용을 금지해야 할까?

이 질문은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자동차가 처음 등장했을 때 상황과 비슷하다. 마차 산업이 위협을 받자, 영국 정부는 1865년 ‘붉은 깃발 법(Red Flag Act)’을 도입했다. 자동차는 시속 6.4km 이하로 달려야 했고, 반드시 앞에서 사람이 붉은 깃발을 들고 걸어야 했다. 변화에 대한 두려움, 기존 질서에 대한 보호 본능은 결국 기술 진보를 30년 이상 늦췄다. AI를 둘러싼 지금 우리의 반응도 유사하다. 기술은 이미 도착했다.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을 ‘어떻게 쓸 것인가’이다.

그 해답 중 하나가 ‘큐레이션’이다. ‘큐레이터(curator)’라는 말은 라틴어 ‘cura(돌보다)’에서 유래했다. 중세에는 ‘영혼을 돌보는 성직자’를 의미했고, 르네상스 이후에는 미술품을 관리하고 분류하는 역할로 이어졌다. 18~19세기 박물관 제도가 등장하면서, 큐레이터는 단순히 보관자가 아닌 작품을 선별하고, 해석을 더해 대중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역할로 진화했다. 작품이 넘쳐나는 시대, 대중의 이해를 돕고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획자가 필요해진 것이다.

이 변화는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AI 시대와 놀랍도록 닮아 있다. 콘텐츠, 데이터, 문장이 넘쳐나는 지금, 핵심은 ‘얼마나 많이 모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고르고 연결할 것인가’다. 큐레이션은 더 이상 미술관에만 있는 일이 아니다. 편집숍, 음악 스트리밍 추천, 유튜브 알고리즘까지, 우리는 이미 일상 속에서 수많은 큐레이션과 만나고 있다.

챗GPT가 글 내용에 부합하게 그린 삽화. (자료=뉴스버스)
챗GPT가 글 내용에 부합하게 그린 삽화. (자료=뉴스버스)

정보가 넘칠수록, 고르는 감각이 곧 힘이 된다.

AI가 모든 데이터를 축적해주는 시대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축적된 지식이 아니라 그중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질문으로 연결하고, 어떤 감각으로 의미를 부여하느냐다. 큐레이션은 단순한 편집이 아니라, 해석이며, 관점이고, 창의성이다.

하지만 좋은 큐레이션은 연결 이전에 축적이 필요하다. 큐레이터는 자기만의 정보, 감각, 세계관의 저장고를 갖고 있어야 한다. 손정의는 매일 단어 카드 세 장을 무작위로 뽑고 그것들을 억지로라도 연결해 보며 창의적 훈련을 했다고 한다. 기초 체력 없는 연결은 가볍다. 강력한 큐레이션은 ‘아는 것 위에 세워진 연결’에서 나온다.

미술사 속 사례들이 이를 보여준다. 마르셀 뒤샹은 공장에서 찍어낸 변기를 전시장에 가져다 놓고 “이것도 예술이다”라고 선언했다. 사람들은 당황했다. 하지만 그는 예술의 본질을 되묻는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같은 물건이라도 화장실에 있을 때와 미술관에 있을 때의 의미는 다르다. 뒤샹은 물건을 옮긴 것이 아니라 맥락을 바꾼 것이다.

앤디 워홀 역시 슈퍼마켓 진열대에 있는 토마토 수프 캔을 액자에 넣어 걸었다. “이게 예술이냐”는 질문을 받았지만, 그는 반복되는 이미지 생산과 소비사회를 새로운 미학으로 치환했다. 전혀 다른 것들을 엮어내는 창의적 큐레이션은 경계를 넘고,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단, 그런 연결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기초 지식과 시대 맥락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어야 한다.

AI가 다 수집해주는 시대에 인간이 굳이 축적을 할 필요가 없다. 정보의 양적 축적은 이미 AI의 몫으로 넘어갔다. 인공지능은 정보를 정리하고 요약하며, 검색하고 저장하는 데 인간을 앞선다. 지식 축적의 시대가 가고 창의적인 큐레이션의 시대가 왔다. 하지만 지식의 ‘축적’이 아닌 ‘소화와 통합’, 그리고 그 속에서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연결을 만들 것인가’에 대한 감각과 통찰은 여전히 인간의 고유 영역이다. AI는 수십 개의 논문을 요약할 수는 있어도, 지금 이 맥락에서 어떤 관점이 의미 있는지를 제안하고 판단하고 가이드 하는 것은 인간의 역할이다. 

즉, 이제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아느냐’보다 ‘무엇을 어떻게 쓸 줄 아느냐’다. ‘지식이 권력’이던 시대를 지나, 이제는 ‘해석이 권력’인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AI가 만든 리포트가 훌륭하다면, 그것을 선별하고 구조화한 학생의 큐레이션 역량을 먼저 칭찬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물어야 한다. “왜 이걸 골랐니?”, “무엇을 말하고 싶었니?” 그 대화에서 진짜 배움이 시작된다.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큐레이션의 가치가 높아질 수 밖에 없다. 연결의 깊이에서 창의성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이 울림을 줄 수 있으려면, 축적이 먼저다. 다만 그 축적의 방식은 달라져야 한다. AI가 축적을 도와주는 시대, 인간은 감각과 통찰로서의 큐레이션에 집중해야 한다.

AI는 수천 가지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 하지만 결정하는 용기와 방향은 인간의 몫이다.

김희연 컨설턴트가 최근 출간한 책
김희연 컨설턴트가 최근 출간한 책

김희연은 AI리터리시 컨설턴트다. 씨티은행에서 출발,  현대·굿모닝·신한·노무라 증권의 IT애널리스트를거쳐 2008년 LG디스플레이로 자리를 옮겼다. 금융·증권· IT·제조 분야 폭넓은 경험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LG디스플레이에선 여성 최초로 사업개발·전략·IR·투자 및 신사업을 총괄하는 최고전략책임자(CSO)에 올랐다. 지난해 퇴임뒤엔 AI 콘텐츠 융합 및 AI의 일상적 활용 등에 천착,  AI리터러시 컨설턴트로 활동하고 있으며 뉴스버스에 AI관련 글을 연재하고 있다. AI시대 기업과 직장인들의  ‘생존법’을 담은  저서 <공감지능시대: 똑똑한 AI보다 따뜻한 당신이 이긴다>가 4월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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