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버스 이중근의 직설]

오만한 정치 권력은 '종이 짱돌'로 응징

국힘, 4.10총선 참패로 미래 보장 힘든 궤멸적 상황

민심토론회 빌미 사실상 선거운동에 '철퇴' 내린 격

윤석열 대통령이 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반도체 현안 점검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대통령실)
윤석열 대통령이 9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반도체 현안 점검회의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대통령실)


선거 취재를 하면서 표심은 늘 절묘하다고 생각했다. 유권자 개인은 자신의 한 표를 던질 뿐이지만, 다 모아놓으면 도도한 민심이 된다. 모든 선거마다 특별한 민심이 담긴다. 때론 ‘변화에 대한 열망’ 정도로 나타나는가 하면, 어떤 때는‘시대정신’이라고 부를 만큼 거대한 물결로 표출된다. 특히 오만한 정치 권력과 마주하게 되면 유권자들은 어느 한순간에 ‘종이로 된 짱돌(paper stone)’로 응징한다. 

22대 국회의원 선거 결과가 여당인 국민의힘에 유례없는 참패를 안기는 것으로 귀결됐다. 최근 한국 정치에서는 여당이 대통령을 당선시킬 시점에는 국회 내 소수당이었지만 다음 선거에서 승리해 다수당이 되는 게 일반적이었다. 국민의힘도 2년 전 이맘 때 대선에서 이긴 기세를 몰아 지방선거도 내리 석권했다. 여당의 참패는 이런 점에서 상당히 이례적이다. 더구나 보수당 입장에서는 국회의원 선거 3연패인 데다 두 번 연속 범민주당 세력에 180석과 190석 이상을 내주는 참패를 당했다.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보수당으로서는 미래를 보장할 수 없는 궤멸적 상황이다. 

총선 표심은 민심의 바다가 예전보다 훨씬 민감하고 가파르게 출렁인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득표율 0.73%의 차이를 무시하고 정치 초년생이 만사를 다 아는 냥 권력을 휘두르는 모습에 유권자는 참지 않았다.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외교 노선을‘가치 외교’라며 폭주하는 데 제동을 걸었다. 민생토론회를 앞세워 24차례나 지방을 다니며 사실상 선거운동을 한 대통령에 철퇴를 들었다. 이태원의 좁은 골목에서 159명이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음에도 사과하지 않는 불통에 분노했다. 대선 토론회 때 손바닥에‘임금 왕(王)’자를 그리고 나온 이후 내내 사라지지 않는 주술 통치의 그림자에 대해 거부의 뜻을 표출했다. 

그런데 여권에서 이상한 말들이 나온다. 여권 지지층이 단결하지 못해서 졌다느니, 국정 기조를 바꿀 이유가 없다느니 한다. 민주당이 개딸들의 말을 따르듯 열성 지지자들을 따르지 않는다며, 선거 패배에 스스로 자조할 이유가 없다고 한다. 

민심은 사실상 윤 대통령을 탄핵했다. 다만, 야당에게 전능의 칼을 쥐어주는 것도 불안하기 때문에 여당에게 겨우 숨만 한번 쉬게 해준 것이다. 국정에 임하는 태도를 획기적으로 변화시키지 않으면 더 가혹한 응징을 하겠다고 예고한 것이다. 그 경고를 오독하면 파국이 될 것이다. 

윤 대통령의 가야 할 길은 너무나 분명하다. 모두가 지적하듯 그 첫째가 야당과의 협치이다. 윤 대통령과 여당은 마음에 들지 않는 법이 국회를 통과할 때마다 거대 야당의 입법독주라며 거부권을 행사했다. 그게 당연한 권리 행사인양 한다. 하지만 우리 헌법은 대통령에게 폭넓은 재량권을 준 미국과 다르다. 내각제적인 요소를 가미해 총리와 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한 등을 부여하고 있다. 그 총리는 다수당의 동의를 얻어 임명하도록 했다. 야당과의 협치가 헌법정신인 것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취임 후 2년이 지나도록 야당의 대표를 만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이 이 대표를 만나면 법원을 향해 이 대표가 무죄라는 신호를 줄 우려가 있다고 한다. 말도 안 되는 핑계이다. 삼권분립을 부정하는 행태이자 법치주의 위반이다. 누구도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추정의 원칙을 적용하는 게 원칙이다. 오히려 행정부 수반의 그런 야당 대표 기피야말로 이 대표에게 무죄를 내려서는 안된다고 법원을 압박하는 것이다. 피의자라 상대하지 말아야 한다면 윤 대통령이 스스로 그 원칙을 어긴 경우도 많다. 

고(故)노무현 대통령은 야당이 민생을 파탄내고 있다고 공격하자 야당에 민생을 맡아달라며 연정과 거국내각 구성을 제안했다.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가 “권력을 맡겨준 국민에 무책임한 처사”라고 비판하면서 연정 제의를 거부함으로써 여야 협치의 기회는 사라졌다. 노무현과 같은 결기로 접근하지 않는 한, 윤 대통령의 미래는 밝지 않다. 그런 수준의 태세 전환이 아닌 한 탄핵 일보 직전까지 간 민심을 되돌리기는 불가능하다.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협치 제의와 대국민 소통 시늉은 더이상 통하지 않는다. 

보수 일각에서는 이번 패배에 여론지형이 달라졌다고 진단한다. 진보 쪽으로 운동장이 기울어진 게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 그런지 아닌지는 불투명하다. 다만 민심의 바다가 예전과 달라졌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시민들은 보수니 진보니 하는 틀에 갇히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또 민심을 거스르는 배를 전복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윤 대통령이 유의할 것은 이뿐이 아니다. 정권을 지탱해온 검사들도 이젠 자신들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론 윤 대통령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을 것이다. 촛불 하나만 들고 박근혜를 내몰아 민주주의를 실현한 그 시민들이 그보다 더하면 더한 최고권력자를 이대로 용인할 리가 없다. 

최고 권력은 스스로 제어되기 어렵다. 자신의 힘을 과신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윤 대통령은 그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 제발 강성 지지층의 말만 듣고 협치의 길을 외면해선 안된다. 그런데 왠지 그가 종전의 길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내 예측이 빗나가기를 바란다.) 

이중근은 경향신문에서 34년 동안 기자로 일하고, 2024년 퇴직했다. 편집국에서 정치(정당·외교안보·총리실·중앙선관위·청와대), 사회(경찰·검찰), 국제부를 거친 뒤 논설실장·논설주간으로 경향신문의 논평을 책임졌다. 국가의 정책이 어떤 과정을 거쳐 수립되고 집행되는지를 관찰한 것을 소중한 경험으로 여긴다. 글의 무거움을 절감하며 정파적 보도를 지양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평범한 것을 비범하게 하자’는 게 '신조'이다. 

※ 뉴스버스 외부 필자와 <오피니언> 기고글은 뉴스버스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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