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버스는 3월 9일 치러지는 20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유권자들의 판단을 돕기 위해 여야 유력 주자인 이재명‧윤석열 후보를 들여다볼 수 있는 탐구 시리즈를 아래와 같이 각 3회씩 게재합니다. 양측 모두 장점보다는 다소 비판적 입장에서 접근했습니다. 뉴스버스는 어느 편을 들지도 않고 오로지 공공의 이익과 독자의 알권리를 최우선하겠다는 뉴스버스의 약속을 지켜나가고 있습니다.
/편집인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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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탐구]
① 소년공에서 대선 후보까지…공익 추구와 사적 욕망의 사이
② '이재명은 합니다' 성과와 성과 집착의 위험성
③ 이재명표 실용주의, 유연성이냐 말 바꾸기냐?
[윤석열 탐구]
① ‘큰 형님 리더십'의 두 시선…포용이냐 보복이냐
② 검사 윤석열 스타일과 독선 독단 불통의 위험성
③ 尹, '검찰정권·검사정치' 벗어날 수 있을까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이하 호칭 생략)는 어린 시절 혹독한 가난을 겪은 흙수저 출신이다. 경북 안동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쳤다. 초등학교 시절 지인들은 그를 장난기 많고 활달한 아이로 기억한다. 집안의 생계를 책임진 아버지에 대해서는 본인의 증언이 그때그때 다르고, 가족의 증언도 엇갈리지만 평탄히지 않은 삶을 산 것은 분명해 보인다. 가족의 삶도 덩달아 굴곡이 많았을 것이다. 

어린 시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사진=이재명 후보 인스타그램) 
어린 시절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사진=이재명 후보 인스타그램) 

그의 가족은 1970년대 중반 아버지가 먼저 터를 잡은 경기도 성남으로 이사했다. 삶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를 중학교에 보내는 대신 공장에 보냈다. 후에 그가 더 공부하는 것을 원했지만 그마저 탐탁치 않아했다. 그래선지 어머니에 대한 그의 애틋한 태도와 달리 아버지에 대한 언급에서는 애증이 교차한다. 그는 소년공 시절 몇 가지 경험을 통해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공부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검정고시를 치르고 장학금을 받아 중앙대 법대에 진학했다. 사법시험에 합격해 변호사가 되어 성남에 돌아왔다. 20대 중반이다. 그 이후 10여 년의 시민운동 시절, 그리고 총선과 지방선거에 출마해 한 차례씩 낙선한 것을 제외하면 그 후의 삶은 초고속 성공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소년공, 검정고시, 변호사, 시민운동, 성남시장 연임, 경기지사의 궤적을 거쳐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판·검사길 가지 않고 빈촌서 시민운동으로 시작  

그는 소년공으로 일한 경험을 자랑스럽게 밝힌다. 정치적 자산으로 십분 활용하고 있다. 힘들었지만 그 때의 경험이 삶의 목표와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밑바탕이 되었다고 한다. 심리학자 김태형은 정치인을 사익추구형과 공익추구형으로 나누고, 이재명을 ‘사적욕망이 공적 욕망으로 승화된’ 공익추구형 정치인’이라고 평가했다.(2021·2022 이재명론, 간디서원, 2021) 가난 속에서 성장했지만 개인의 부를 추구하는 대신 공익을 위한 일하는 길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재명 자신도 “매 맞는 노동자로 살지 않겠다는 사적 욕망이, 그 누구도 매 맞지 않는 사회를 건설하겠다는 공적 욕망으로 발전했다”고 말한다. 

그럴듯한 해석이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평가와 분석은 그의 말만으로는  부족함이 있다. 그의 행동을 함께 봐야 한다. 이재명 본인은 판사나 검사의 길을 걷지 않고 변호사를 선택한 계기를 아래와 같이 밝혔다.

“꽤 이름 난 변호사 한 분이 (중략) 부산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던 시절의 생생한 체험담을 젊은 후배들에게 들려주었다. 열정과 진심이 묻어나는 뜨거운 강연이었다. 그의 이름은 노무현이었다. (중략) 가슴 속에서 또 하나의 결심이 다져지고 있었다. 나도 저분처럼 인권변호사가 되리라.”(이재명은 합니다, 위즈덤하우스)

성남에서 시민운동을 하던 시절인 1990년 2월 12일 이재명(오른쪽)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시민들과 함께 분당지역 부당 용도변경에 항의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이재명의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성남에서 시민운동을 하던 시절인 1990년 2월 12일 이재명(오른쪽)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시민들과 함께 분당지역 부당 용도변경에 항의하는 집회를 하고 있다. (사진=이재명의 나의 소년공 다이어리)

그는 판검사를 놔두고 왜 빈촌인 성남 수정에서 변호사를 하려고 하는 지 묻는 연수원 동기에게 “성남은 내 고향이라 버릴 수 없다. 이 동네 와서 내가 받은 걸 돌려줘야 한다”고 답하기도 했다. 그는 10년 넘게 지역의 여러 시민운동에 참여했고, 분당 백궁 정자지구 용도변경 특혜를 폭로하고 저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성남지청에서 이재명을 지켜본 검사 출신 법조인은 이재명이 시민공대위 위원장을 맡아 도시빈민들과 시위를 하고, 검찰청에 집시법 위반과 공무집행방해 혐의 등으로 조사를 받으러 오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 무렵 그가 조폭, 마약 사건 등 지저분한 사건을 들고 온 것은 먹고 살려다 보니 맡은 측면이 큰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말과 행동의 괴리· 공사 구분 부족…초심 변질? 

그러나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 보기엔 지나친 점이 없지 않다. 그가 2001년부터 성남시장에 취임하기 전인 2009년 사이에 맡은 형사사건 58건 중 수원지법 성남지원에서 진행된 1심 판결문 30건을 분석한 결과 인권변론은 없었다. 대부분 살인, 강간, 폭행, 횡령, 사기, 음주운전, 문서위조, 성매매 알선 등 이었다.(시사저널, 2022.1.26.) 물론 부도덕한 범죄자라 해도 변호사의 조력을 받을 권리가 있고, 인권변호사가 오로지 인권변론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본인이 선거공보에 밝힌 “인권변호사 이재명이 책임지겠습니다. 서민 무료 변론, 시국사건 변론, 노동운동 지원”(2014년 성남시장 선거공보)과는 분명 거리가 있어 보이는 대목이다. 

그의 말처럼 변호사로서 그의 출발은 순수했을 수 있다. 말뿐이 아니라 행동으로 지역사회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초심이 얼마나 유지됐는지 의문이다. 그는 유능하고, 돈 벌기 위해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잘 나가는 변호사로 보일 여지가 많다. 이번에 신고한 재산 총액 32억은 상위 1% 안에 드는 금액이다. 인권변호사를 자임하기 위해 노무현 변호사를 끌어들인 것도 적절해보이진 않는다. 노무현 변호사는 이재명과 달리 매우 솔직한 사람이다. 그는 젊은 시절 한국 사회에 대해 무지하고, 돈 잘 버는 세무전문 변호사였음을 숨기지 않는다. 다만 부림사건 변론을 계기로 사회에 눈을 떴고, 그 후 실제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권양숙 여사는 ‘그때부터 고생시작, 행복 끝이었노라’고 술회했다. 이재명은 반대로 첫 출발은 순수했을지언정 변해갔다고 볼 수 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제20대 대통령 선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15일 오전 부산 진구 부전역첫 공식유세에서 지지를 호소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제20대 대통령 선거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15일 오전 부산 진구 부전역첫 공식유세에서 지지를 호소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최근 그의 배우자 김혜경이 경기도 법인카드로 맛집 투어를 하고, 경기도 소속 5급 공무원과 7급 공무원을 개인 비서로 부리고, 경기도 관용차를 병원 출입 등 사적 용도에 사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이재명 본인과 배우자는 지시하지도 관여하지도 않았다고 해명하지만 믿기 어렵다. 특히 김혜경씨의 관용차 이용은 성남시장 시절부터 지적을 받았고, 성남시의회에서 여러 차례 공론화될 정도로 공공연한 일이었다. 그 때마다 이재명은 비판자들을 고소로 윽박질러 사태를 모면했다. 그와 배우자의 행태는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는 수준이다. 

성남 기반 경기동부연합과 국제마피아파의 그림자

1970년대 중반 그의 가족이 이사했을 때 성남에는 1971년 벌어진 광주대단지 사건의 상흔이 남아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서울의 판자촌 철거계획을 세우고, 청계천과 서울역 일대의 철거민들을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인근으로 이주시켰다. 아무런 기반 시설도 없는 구릉지에 10만이 넘는 철거민들이 옮겨왔다. 정부 당국은 철거민들에게 20평의 땅과 천막 하나만 지급했다. 땅도 공짜가 아니었다. 불만이 쌓였다. 이주한지 3년이 지나 당국은 당초 약속했던 평당 2,000원보다 4~6배 비싼 토지대금 상환을 일시불로 요구했다. 이주민들은 폭발했다. 윤흥길의 「아홉 켤레 구두로 남은 사내」는 사건의 전개 과정과 그 이후를 묘사했다. 성남은 그런 곳이었다. 가난과 폭력이 일상이고, 도시 폭동을 일으켰다는 오명을 뒤집어쓴 배제와 차별의 기억을 간직한 도시였다. 

한때 통합진보당의 당권파였고, 주사파 성향을 갖는 경기동부연합 사태가 벌어졌을 때 일부 언론은 경기동부연합을 이끈 이석기가 외국어대 용인캠퍼스 출신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성남은 단지 그들의 주 활동무대인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임미리 교수(고려대)는 외대 용인캠퍼스가 아니라 광주대단지가 경기동부연합의 뿌리임을 밝혔다. “폭력과 빈곤으로 낙인찍힌 도시에서 성장한 인물 - 광주대단지 키드 - 들이 사회의 차별과 배제의 기억을 운동역량으로 동원하여 경기동부연합이라는 지역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다”는 것이다.(‘경기동부연합’의 기원과 형성 그리고 고립, 임미리, 2012) 그러나 경기동부를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점차 집단기억에 매몰되어 폐쇄적인 이익집단으로 변질되면서 고립되었다고 말한다. 통합진보당 내의 분쟁은 그 귀결이었다. 

성남의 폭력조직 국제마피아파는 성남시가 성립된 직후인 1970년대부터 토착불량배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1987년 정식으로 결성된 토착조직이다. 수도권 남부의 다른 위성도시들은 수도권으로 진출한 남쪽 출신들이 장악한 것과 대별된다. 2000년대 들어 불법도박사이트를 운영해 크게 돈을 벌었고, 샤오미 국내총판인 코마트레이드는 이들의 자회사로 알려져 있다. 광주대단지 키드 일부가 경기동부연합으로 성장한 것처럼 또 다른 일부는 국제마피아파가 되었다. 

이재명은 성남에서 이들 - 광주대단지 키드 - 과 함께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들과 집단기억을 공유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성남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성남에서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들과 끈끈한 관계를 유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실제로 그는 성남시장시절부터 한편으론 경기동부연합과, 다른 한편으론 국제마피아파와 연루설이 끊이지 않았다. 이재명이 성남시장에 취임한 후 경기동부연합 출신들이 대거 성남시 산하조직에 낙하산으로 취업했다. 그가 변론한 사건 중에 국제마피아파 조직원인 조카 살인사건 말고도 다른 조직원의 사건도 있다.    

난관 돌파력과 집요함…호승심과 싸움꾼 기질

성장기의 불운이 반드시 부정적으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공적 욕망으로 승화시킨 사례도 많다. 그러나 다른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그는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내가 세상에서 가졌던 첫 꿈은 시골 초딩 때 가졌던 선생님이었다. 왜 선생님이 되고 싶었냐고요? 기막히겠지만 선생님한테 너무 많이 맞아서 나도 선생님 되서 애들 때려보겠다고. 복수감정?”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가져봄직한 감정이다. 이해 못할 것도 아니고 성장하면서 꿈은 바뀔 수 있다. 그러나 그 마음가짐은 오래 간다. 그의 고백에서 그가 일관되게 보여주는 절대로 지기 싫어하는 태도, 호승심, 싸움꾼의 자세를 읽을 수 있다.  

이재명의 오늘이 있기까지 그가 보여준 부단한 노력, 끈기, 난관을 돌파하는 집요함은 한마디로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성공을 향한 이재명의 질주가 공익추구를 향한 공적 욕망에서만 비롯되었다고 단언하기엔 여러 가지 의문이 따르는 것도 사실이다. 

윤석규는 서울대 인문대를 졸업하고 YMCA 경실련 등에 몸담아오다 DJ정부에서 청와대 시민사회국장을 지냈다. 2002년 노무현 캠프의 상황실장을 맡아 노무현 대선 전략의 밑그림을 그린 ‘정치전략통’이다. SNS 등에서 합리적 진보 논객으로 활동 중인 그는 날카로운 정치 분석으로 정평이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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