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액 연봉과 실업은 별개 문제
코로나19 이후 디지털화 추세로 은행 점포가 눈에 띠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디지털 활용이 자유롭지 못한 고령층은 금융 서비스에서 소외되고, 서민들이 사는 지역은 현금 접근성이 크게 떨어지고 있습니다. 급격한 은행 점포 축소가 유발하는 문제점을 짚어봤습니다. 이 기사는 금융산업노동산업조합 KB국민은행지부의 제안을 받아 취재됐습니다. /편집인 주
은행은 소위 ‘완벽한 직장’으로 통했다. 은행권은 타 직종에 비해 연봉 수준이 높으면서도 정년 보장 비율이 높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핀테크‧빅테크 등 소위 ‘혁신산업’에 대한 정부의 규제 편향과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비대면 채널 가속화가 맞물리면서 대규모 구조조정에 들어가 은행권도 인력 감축의 격랑에 휩싸이게 됐다.
은행권의 구조조정은 2013년부터 매해 연례행사처럼 이어지고 있다. 은행권은 구조조정의 방점을 ‘비용절감’에 찍으면서 대규모 인력감축과 공격적 시중 점포 폐쇄를 ‘혁신’으로 포장하고 있다. 은행권이 고정 인건비와 임대료가 발생하는 점포를 ‘비용’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시작하면서, 금융서비스의 공공성 및 금융근로자와 금융소비자를 도외시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당초 은행권에서는 올 한 해 동안 시중 은행을 떠나는 인력을 4,000명 쯤으로 전망했다. 그러나 올 한해 금융 노동자들의 퇴직 규모는 당초 예상 인원을 훌쩍 넘어설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KB국민은행(800명)‧신한은행(350명)‧우리은행(468명)‧SC제일은행(500명) 등 4개 은행에서 2100여명이 퇴직했다. 이에 더해 씨티금융그룹이 국내 소매 금융 사업부문 철수를 선언하면서 해당 부분 직원 3400여 명 중 최소 절반 이상이 희망퇴직을 신청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또 이달 19일부터 NH농협은행이 희망퇴직 신청을 받고 있고, 하나은행도 오는 12월 희망퇴직 신청을 받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수천 명 실업 내몰리지만... 재취업 정책서 소외
각 은행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시중 4대 은행 직원 평균 연봉은 2020년 말 기준 9800만원이다. 은행원 다수가 임금근로자들의 로망인 ‘억대 연봉자’인 셈이다.
은행원들이 여타 임금근로자에 비해 월등히 높은 임금을 받아왔고,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은행권이 역대급 실적을 내면서 파격적인 퇴직 조건이 따라 붙었기 때문인지, 한 해 수천 명이 실업 상태로 내몰리는 상황임에도 대책 마련 등의 징후는 찾아보기 어렵다. 도시근로자 평균 임금 수준의 급여를 받는 근로자 입장에서는 은행근로자들의 억대 연봉과 수억 원대 퇴직금이 부럽기만 할 뿐, 은행원들이 일자리를 잃는 상황에 대한 공감대 형성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임금의 다과(多寡)는 ‘근로자성’과 무관하다. 연봉이 높고 퇴직금 액수가 많은 것 실업은 별개의 문제다. 고연봉의 혜택을 누렸더라도 임금 근로자가 하루 아침에 실업 상태로 내몰리게 되는 것은 사회적 문제다.
은행 근로자들의 경우 자신이 몸 담았던 은행권이 공격적 인력 감축에 나서고 있는 만큼, 퇴직 후 동종 업계에 재취업 할 가능성도 거의 없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은행 퇴직자들이 근로자로서의 재취업 기회를 얻기보다 높은 퇴직금을 자본으로 ‘창업 시장’ 으로 내몰릴 개연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권오성 성신여대 법학과 교수는 “과거에 비해 고용안정성이 낮아진 상황이기 때문에 정부가 퇴직자들의 재취업에 대한 여러 방안들을 마련해 두고 있기는 하지만, 정부 정책은 당연히 취약계층 우선으로 설계‧집행된다. 이 때문에 고연봉자였고 억대 퇴직보상금을 받은 은행근로자들이 재취업 시장에서 보호 대상으로 인식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즉 은행퇴직자들이 재취업 시장에서 후순위로 밀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얘기다.
권 교수는 또 “더욱이 은행근로자들의 업무는 개인의 ‘숙련’으로 보기 어렵고, 은행에 근무할 때 쓰임이 있는 은행을 위한 업무 능력”이라며 “은행 퇴직자들이 다른 숙련을 얻기 위해 다시 학교를 다니는 등 재교육을 받거나 아예 직종을 변경하지 않는 이상, 근로자로서 재취업 기회를 다시 잡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결국 대다수 은행퇴직자들이 근로자로서 재취업 기회를 얻기 보다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창업시장에 내몰릴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문제는 현재 시장 상황에서 창업도 여의치 않다는 점이다.
보통 퇴직자들은 자신만의 기술로 창업하기 보다는 외식 업체 등 ‘프랜차이즈’ 영업점을 통한 창업을 한다. 문제는 프랜차이즈의 고질적 문제인 힘의 불균형이나 불공정거래, 가맹점주의 종속성 문제 등에 노출되며 사실상 근로자와 같이 프랜차이즈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현행법상 근로자로서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법의 사각지대로 들어서게 된다는 점이다.
무차별적 인력감축 ... 양질의 일자리‧숙련 인력 없앤다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는 하반기가 은행권 채용 시즌으로 통한다. 그러나 은행 대규모 공채는 이제 옛말이 됐다. 현재까지 신규채용을 확정 지은 시중은행은 KB국민은행과 신한은행 정도다.
24일 은행권에 따르면 시중 은행 가운데 21년 하반기 신입 해원 공채를 시행하는 곳은 KB국민은행, 신한은행, NH농협이다. 예년과 달리 하나은행과 우리은행이 공채일정을 내놓지 않으면서 사실상 수시채용으로 전환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시중은행들은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한 비대면 거래 증가와 디지털 금융 확산을 이유로 점포 폐쇄와 인력감축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다. 이 때문에 공채에 소극적이고 필요한 인력을 소폭으로 뽑아 쓸 수 있는 경력직 수시 채용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은행은 다른 일자리와 비교해 노동조건이 좋고 임금 수준이 높은 ‘양질의 일자리’로 분류된다. 그런데 신규채용 길이 막히면서 신규 근로자들은 양질의 일자리에 접근할 기회조차 얻기 어렵게 된 셈이다.
금융서비스의 디지털화에만 방점을 둔 은행권이 향후 인력 양성을 위한 추가적인 비용이 발생할 가능성을 외면하고 당장 인력 감축에만 몰두하고 있는 것도 문제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노동경제학자인 정미경 독일정치경제연구소장은 “현재 은행들이 희망퇴직 형태로 해고를 하는 원인이 은행권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은행업의 디지털화 때문인지, 은행근로자들의 고령화,고임금 때문인지가 명확하지 않다”고 꼬집었다.
정 소장은 “디지털화 과정에서 한 직업이 온전히 자동화로 대체되지 않는 이상 해당 직업은 없어지지 않고 업무의 방식과 내용이 바뀐다는 게 다수 연구의 결과”라며 “금융산업의 경쟁력 있는 구조를 새로 짜서 은행업의 경험이 많고 경력이 높은 숙련 노동자들의 인적자원이 유실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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