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을 찾아서④]

내가 사는 동네에는 서리풀공원과 그 숲길이 있다. ‘서리풀’은 '맑은 물이 흐르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지금의서초동 옛 이름이다. 주말이면 이 숲길을 자주 걷는다. 어느 날 방배역쪽으로 향하던 길, 눈 아래 숲속에 숨듯 자리한 작은 도서관을 발견했다. 바로 방배숲환경도서관이다.

인근에 국립중앙도서관이 있어 늘 그곳으로만 향했지, 이렇게 아담한 동네 도서관은 미처 눈여겨보지 못했다. 그러나 숲에 파묻힌 듯한 모습이 발걸음을 붙잡는다. 마침 발견한 날이 금요일 정기 휴관일이라 다음 날 아침 서둘러 찾아갔다. 내방역에서 도보 5분 정도. 집이 근처라 걸어서 도착했다.

서울 서초구 '방배숲환경도서관'.
서울 서초구 '방배숲환경도서관'.

아침 8시 50분, 문이 열리기 전인데 벌써 열 명이 줄을 서 있었다. ‘주말 아침부터 참 부지런들 하시네.’ 웃음이 났다. 9시 문이 열리자 사람들은 순식간에 햇살이 드는 명당을 차지했다. 공간은 충분했지만, 풍경 좋은 자리는 선착순이라도 되는 듯 금세 다 찼다.

안으로 들어서면, 땅을 낮게 파고 지은 건물 구조 덕분에 외부의 소란이 사라지고 고요가 감싼다. 이 도서관의 백미는 단연 '원형 중정'이다. 책과 사람이 있어야 할 공간인데, 양보하듯 비워둔 공간, 그 자리를 푸른 잔디와 하늘이 채운다. 햇살이 쏟아지고, 비가 오면 그대로 흘러내려 운치가 있다. 마치 눈을 뜬 채로 명상하는 듯, 고요히 사색에 잠기게 한다. 이곳은 도서관이지만, 동시에 책보다 공간을 음미하게 하는 곳이다. 

도서관 가운데 자리잡은 '원형 중정'은 어디에 앉더라도 시선을 잡는다. 싱그러운 잔디, 파란 하늘, 그 위로 흘러내리는 햇살. 중간에 비가 내렸는데, 비를 바라보는 운치에 마음이 숙연해진다. 자연과 공간, 날씨가 빚어내는 삼중주 속에서 잠시 마음을 내려놓고 가라앉은 시선으로 원형중정을 바라보노라면... 일종의 눈뜬 명상 같다.

그래서 이곳에선 책을 읽기보다 차 한 잔을 마시며, 공간이 주는 울림을 곱씹게 된다. 공간 기획자가  붙여둔 공간 이름 하나 하나가 내 마음 밭에 생각의 씨앗을 뿌려주는 듯했다.

공간의 이름마다 스며든 숲의 언어

'새싹, 숲’ : 유아를 위한 키즈룸, 첫 책과의 만남을 응원하는 따뜻한 공간
‘잎새, 숲’ : 어린이 자료실, 호기심이 싹트는 시간의 터전
‘열매, 숲’ : 종합자료실, 성숙한 문장들이 달려 있는 곳
‘고요한 숲’ : 서재, 집처럼 편안하고 고요한 독서의 방
‘숲의 자리’ : 카페, 책과 향기가 함께 어우러지는 쉼의 자리
‘구름뜰’ :  옥상에 있는 쉼표 모양 곡선 산책로와 잔디밭

각 공간의 이름들은 자연의 생애주기를 닮았다. 새싹이 나고, 잎새가 자라 열매를 맺으며, 고요 속에 숲이 이루어진다. 그 숲 한가운데 이 도서관이 있다. 그리고 옥상 쉼표 모양의 길 위를 걷는 순간, 삶에도 쉼표 하나가 찍힌다.

문득 건축가의 마음을 상상해 보았다. 거대한 수장고를 가진 국립중앙도서관을 지척에 두고, 이 작은 도서관이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이길 바랐을까? 아마 책과 열람석은 부족해도,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주고 싶었으리라. 원형 중정의 여백은 생각할 여유를, 옥상의 쉼표 길은 잠시 멈춤의 가치를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국립도서관이 수많은 책으로 위용을 과시한다면, 이곳은 오히려 ‘비움과 쉼’으로 도서관의 의미를 다시 써내려간다. 여백이 곧 언어가 되는 동양화처럼, 중정은 꾸밈을 덜어낸 채 초록 잔디와 하늘만을 남겼다. 그 여백은 수많은 말을 대신했고, 내 마음을 들여다보게 했다.

건축가 유현준이  “공간은 단순히 머무는 곳이 아니라, 생각을 불러일으키는 힘이다” 라고 했는데, 정말 그랬다. 이곳에서 책을 읽지 않고 공간이 주는 울림과 공간이 던지는 질문들, 그리고 내 삶의 여유와 쉼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음미했다. 그리고 그 음미의 끝, 공간의 의미를 알려주는 건축가의 책이 읽고 싶어 안도 다다오와 유현준의 책을 찾았다. 공간이 책을 추천한 셈이다. 

도서관에 머무른 뒤에는 꼭 옥상 쉼표 길을 걸어보길 권한다. 이어지는 서리풀 숲길까지 걷다 보면, 방배숲환경도서관이 의도한 여정이 완성된다. 도서관에서 마음과 머리를 정화했다면, 숲길을 걸으며 몸까지 정갈해지는 느낌이다.

나는 이 도서관을 방문하며 책 한권을 읽은 것보다 더 많은 생각을 한 것 같다. 쉼을 강조하는데 오히려 마음이 평온하게 바빴다. 원형 중정, 햇살, 쉼, 책보다 오히려 생각을 하게 하는 공간, 명상 등. 도서관의 공간 이름을 연결해 챗GPT에게 시를 써보라고 했다. 

서울 서초구 방배숲환경도서관의 '원형중정' 
서울 서초구 방배숲환경도서관의 '원형중정' 

숲 환경 도서관

숲의 품에 앉아
원형 중정 하늘을 올려다본다.
새싹처럼 피어나는 웃음,
잎새처럼 흔들리는 호기심,
열매처럼 익어가는 지혜.

고요 속에 머물러
숲의 자리에서 차 한 잔을 마신다.
그리고 내 일상에
쉼표 하나를 찍는다.

도서관 근처, 작은 행복의 맛집들■

도서관에서 나오는 길에 동네 주민으로서 꼭 권하고 싶은 몇 곳이 있다. 숲길의 고요를 마음에 담고, 커피와 음식으로 여행을 마무리하면 더욱 완전한 하루가 된다. 

■ 태양커피 (Taeyang Coffee)구글지도를 따라가도 찾기 어렵다. 간판도 없고, 공간도 협소하다. 그러나 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면 그곳이 바로 태양커피다. 아인슈페너가 대표 메뉴. 수저로 떠먹어야 할 만큼 크리미한 크림과 깊은 바디감이 어우러져, 마치 작은 마법 같은 커피 한 잔을 경험하게 한다. 늘 사람이 붐비지만, 기다렸다 마셔볼 만하다.

■  우동 키누 (Udon Kinu·묘오또에서 상호만 변경)

태양커피 바로 맞은편에 자리한 우동집. 직접 뽑은 면발은 탱탱하고 쫀득하다. 붓카케 우동이 특히 면발이 좋다. 친구들과 일본 우동 투어를 다녀온 적이 있는데, 이 곳이 일본을 능가한다고, 왜 우리가 그 먼 길을 다녀왔나 하며 늘 들리는 집이다. 주민들의 단골집으로 분위기는 소박하다.

■ 몬탁 방배 (Montauk Bangbae)

조금 여유 있게 브런치를 원한다면 몬탁 방배. 크로와상, 대니시, 카눌레 같은 베이커리에 잠봉뵈르 샌드위치+수프 세트를 곁들이면 기분 좋은 한 끼가 된다. 나무 질감의 아늑한 인테리어가 어우러져 머물고 싶은 공간, 따뜻한 공간감에 행복감이 더해지는 곳이다. 

작지만 깊은 하루의 여정

책보다 공간을 읽게 되는 도서관, 숲길을 따라 이어지는 정화의 시간, 그리고 작은 가게들에서 마시는 커피와 우동, 브런치까지. 방배숲환경도서관을 중심으로 한 하루는, 도시 속에서 만나는 '지혜의 숲 여행'이 된다.

김희연은 기업전략 컨설턴트다. 씨티은행에서 출발,  현대·굿모닝·신한·노무라 증권의 IT애널리스트를 거쳐 2009년 LG디스플레이로 자리를 옮겼다. 금융·증권·IT·제조 분야를 아우르는 경험을 바탕으로 LG디스플레이 최고전략책임자(CSO)에 올라 전략·마케팅·신사업 발굴·IR을 총괄했다. 퇴임 후엔 ‘AI 시대 공감이 경쟁력’이라는 주제로 <공감지능시대>를 출간했다. 또한 AI를 통해 인류 최고의 현자 및 석학들과 대화하며 전략·리더십 해법을 탐색하는 <AI스토밍(AI-Storming) 방식>을 창안해 2025년 한국 저작권위원회에 등록,  관련 저작권을 갖고 있다. 현재는 이 독창적 방법론을 기반으로 기업과 기관에 <AI 전략 컨설팅> 및 <AI활용 극대화 교육>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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