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반도체 사업의 기초는 창업자 이병철(1910~1987)의 선견지명이 절대적이었다. 삼성은 반도체 선진국 미국과 일본이 설비 투자를 줄이던 1987년 과감하게 3라인 투자에 나섰다. 임원들은 1메가 D램 1·2라인 건설로 엄청난 적자를 내고 있어 3억 4,000만 달러가 들어가는 3라인 투자는 자살 행위라고 보고, 이병철이 투자를 독촉하면 ‘건설 작업 진행 중’이라고 적당히 보고하였다. 이병철은 ‘내가 착공식에 참석하겠다’며 착공식 날자를 1987년 8월 7일로 못 박아 버렸다. 이병철은 3개월 뒤 세상을 떠났으나 반도체 신화는 본격화됐다.

1988년 초부터 반도체 경기는 유례없는 호황기를 맞이했다. 1985년 이래로 계속된 세계 반도체 산업의 침체로 미·일 업체들이 투자를 기피하고 몇몇 대형업체들이 DRAM 사업에서 철수, 공급 부족 현상이 심화되었다. 1987년 12월 회장에 취임한 이건희로서는 행운이었다. 

반도체는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이다. 생산 라인 1개 설비 투자 금액이 승용차 1개 차종 개발비용보다 3배 정도 더 든다. 일본인들은 ‘반도체는 경박단소(輕薄短小) 산업이다’는 표현을 쓴다. 반도체 최종 제품(final product)이 비주얼도 그렇고 손에 잡히기 때문이다. 삼성은 반도체 사업의 성공을 기반으로 LCD, 휴대폰 등 세계 일류 사업들을 키워냈다. 

삼성전자 서초사옥. (사진=뉴스1)
삼성전자 서초사옥. (사진=뉴스1)

삼성전자는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최강자이다. D램 시장의 42.7%(2020년 기준, 2021년 반기 42.9%), 낸드플래시 34.0%의 시장을 점유하고 있다.  

매출은 2020년 기준 CE(Consumer Electronics·생활가전)부문 48조 1,733억원, IM(Information technology & Mobile communications)부문 99조 5,875억원, DS(Device Solutions)부문중 반도체 72조 8,578억원(2021년 반기 417,463), DP(Display Pane·디스플레이 패널)부문 30조 5,857억원이다.  

메모리 반도체(사업)는 컴퓨터·스마트폰 등 IT산업을 구성하고 부가가치를 생성하는 과정인 ‘가치 사슬’(value chain) 측면에서 가장 하부에 위치해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윈도우 같은 운영체계(OS)가 최상위이고, 그 아래 지능을 담당하는 ‘마이크로프로세서’로 불리는 중앙연산장치(CPU)가 있다. 주변 기기를 동작시키는 제어용 칩이 있고, 이 제어용 칩의 데이터 저장 명령을 이행하는 게 메모리 반도체이다. 

1987년 기흥 반도체 공장 건설은 전력, 용수, 폐수, 도로 등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았다. 관공서와 지역 주민들까지 적극적으로 도왔다. 지금 같으면 각종 규제와 시민 단체들의 반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전두환 군사정권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다. 정부는 수도권 공장 토지 매입을 허가했으며, 설비 및 반도체 장비들에 대한 관세를 면제해 주었다. 

정부의 연구개발 지원 또한 적극적이었다. 1985년 <반도체 사업 종합 육성 대책>에 따라 정부는 거액의 연구비를 투입하여 관산학연 공동으로 4M D램 개발에 뛰어들어 1989년 2월 4M D램 개발에 성공했고, 관련 기술을 민간 기업에 이관했다.

4M D램은 1M D램보다 집적도가 4배로 늘어나면서 구조적으로 2차원에서 3차원으로 이전해 가는 최초의 세대였다. 평면 구조는 셀 방식에 차이가 없었지만, 3차원으로는 여러 형태가 가능했다.

생산 방식이 승부를 가르다

1987년 4메가 D램 개발 방식을, 쌓아올리는 스택(stack)으로 할지, 아래로 구멍을 뚫는 트렌치(trench)로 할지 결정해야 했다. 도시바, 히타치, 미국의 텍사스 인스트루먼트(TI)는 개발을 끝내고 양산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건희는 스택 방식을 선택했고, 미국내 연구개발팀을 합친 뒤, 차세대 제품 개발을 맡겼다. 

반도체 사업은 시장에 뛰어드는 순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치킨 게임(Chicken game)을 해야 되는 잭 팟 성격의 양산 조립업이다. R&D, 투자 스피드, 핵심 인재 자원이 승부를 가른다. 1989년 10월, 삼성은 16M D램 개발에 성공했다. 그리고 3년 뒤 1992년에는 진대제와 권오현 주도로 64M D램을 개발했다. 

1993년 이건희는 반도체 5라인을 8인치 웨이퍼 양산 라인으로 결정하였다. 당시 반도체 웨이퍼는 6인치가 세계 표준이었다. 면적은 제곱으로 증가하기에 6인치와 8인치는 생산량에서 두 배 정도 차이가 난다. 8인치의 사용은 경쟁사를 생산력에서 앞설 수 있는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었다. 1993년 10월, 삼성은 도시바를 제치고 세계 메모리 반도체 시장 1위 자리에 올라섰다. 도시바는 16M D램 개발단계에서 트렌치 방식만을 고집하였다. 

1994년 256M D램 개발에 성공한데 이어 1997년 1G D램 개발 및 낸드플래시 메모리 개발에 성공한다. 2000년대 들어 애플이 아이팟을 출시하면서 낸드플래시는 전성기를 맞는다. 당시 메모리 사업부장이었던 황창규 사장과 신윤승 부사장의 발 빠른 투자 전략으로 삼성전자는 낸드플래시 시장 1위 자리에 오르게 된다.

삼성전자가 글로벌 기업답지 않게 해외 M&A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 것은 2000년 초, 미국 텍사스 소재 반도체 기업 AST 인수및 경영 실패에 따른 트라우마가 작용하였다.

글로벌 가전 황제 소니를 제치다

2004~2005년 무렵부터 달라지기 시작한 삼성의 위상과 관련해 장세진 고려대 교수는 2008년 발간한 <삼성과 소니 / SONY VS. SAMSUNG>에서, 삼성이 소니를 앞지르기 시작한 요인은 ‘디지털 변혁기 전략의 차이’에 있지만 가장 큰 요인은 기업 문화에 기반한 조직 프로세스와 각 사업부를 장악하는 최고경영자(CEO)의 강력한 리더십을 꼽았다. 반면 점차 복잡하고 고도화하는 경영 환경은 이건희의 ‘황제경영’과 비서실 조직으로 감당하기 어렵게 만드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측면도 지적했다.

2006년, 50나노 1기가비트(Gb) D램, 40나노 32기가비트 낸드플래시, 하드디스크 드라이브(HDD)를 대체하는 낸드플래시 기반의 32기가 솔리드스테이트 디스크(SSD), 2007년 30나노 낸드 등을 세계 최초로 선보이며 세계 IT업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2007년에서 2009년 사이 치킨게임을 거치면서 세계 반도체 업계는 10여 개 업체로 정리됐다. 

메모리 반도체 치킨 게임이 끝난 직후 삼성전자는 글로벌 시장 선점 효과를 톡톡히 봤다. 기업용 PC 교체 주기가 맞물리면서 D램과 낸드플래시 등 메모리 수요가 견조한 것도 한몫했다. 

2012년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 오스틴 공장에 39억 달러(한화 4조 4천억 원)를 투자, 시스템LSI 라인 증설에 나섰다. 

2016년 중반부터 시작된 업사이클은 2018년 말까지 이어져 반도체 업계가 초호황(수퍼사이클)을 누렸다. 삼성전자는 2017년 6월 System LSI 사업부를 Foundry 사업부와 System LSI 사업부로 분리하였다. 

삼성전자는 2019년 4월 '반도체 비전 2030' 발표하였다.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133조원 투자, 1만 5천명 신규 채용이 주요 내용이다. 2020년 8월 세계 최대 규모의 평택 반도체 2라인이 가동되었다. 

지난 1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평택 2공장을 찾아 EUV 전용라인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지난 1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평택 2공장을 찾아 EUV 전용라인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삼성전자)

조직 집중력으로 글로벌 강자가 되다

메모리반도체·스마트폰·디스플레이로 대표되는 한국의 전자 산업이 전자 대국 일본을 제친 것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상황에서 선제적이며 과감한 대규모의 기술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2010년 6월 갤럭시S를 출시하면서 선발업체인 애플을 뒤쫓기 시작했다.  

이건희는 국내에 머물러 있던 피처폰 사업을 글로벌 공급자로 키웠다. 삼성은 이때 육성한 글로벌 판매망이 있었기 때문에 스마트폰 시대가 도래, 이미 애플이 세계 시장을 싹쓸이로 점유해 갈 때도 글로벌 공급자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스마트폰 사업의 수면 밑은 여전히 전통적인 양산 제조업 및 오프라인 판매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한다. 첨단 기기인 스마트폰 관련 사업이 첨단 산업이 아닌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삼성의 몰락>(2015)에서 “삼성이 애플에 이어 뒤늦게 스마트폰 사업에 진출했음에도 오늘날과 같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오너의 의사 결정과 동시에 이루어지는 특유의 조직 집중력 때문이었다는 평가이다. 삼성이 3세 경영체제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애플과의 격차는 여전하고, 중국은 내수 시장 자체가 성장 한계에 부딪혀 있으면서 중국 업체들이 맹추격을 해오고 있어 샌드위치 상태다.”라고 했다.

이재용 체제의 위기, 갤럭시 노트7 사태 

2016년 10월 10일 삼성전자는 갤럭시 노트7 생산 중단을 발표했다. 다음날 뉴욕타임스는 “갤럭시 노트7을 단종하겠다는 삼성의 발표가 발화(發火)의 명확한 원인 규명을 제시하지 않았다”며 “삼성의 권위적인 위계구조가 경쟁을 불가능하게 하고 있으며 단기적인 성과만을 추구해 책임감을 갖기 어려운 구조”라고 비판하였다. 

뉴욕 타임스는 회사의 보복이 두렵다며 익명을 요구한 두 전직 삼성직원들의 말을 인용, 제품 기술이 실제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삼성전자 고위층의 군대의 하향식 접근 방식을 지적했다. 

1일 삼성전자 수원 디지털시티에서 삼성전자 창립 52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사진=삼성전자)
1일 삼성전자 수원 디지털시티에서 삼성전자 창립 52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사진=삼성전자)

나는 갤럭시 노트7 발화 사건이 나기 1년6개월여 전인  2015년 3월, ‘삼성 스마트폰, 안녕하십니까?’란 제목으로 <미래한국>에 기고한 칼럼에서 삼성의 퇴행적인 기업문화를 지적한바 있다.  

갤럭시S6의 런칭을 앞두고 삼성전자에서는 연이어 스마트폰 마케팅 전문가들이 사퇴했다. 2014년 11월~2015년 2월, 이돈주 전략마케팅실장(사장)과 후임 김석필 부사장이 연이어 사퇴했다. 이들의 사퇴 이유는 신종균 IM(당시 IT·모바일)부문 사장과의 의견 대립이 있었고 이재용 부회장과 최지성 미래전략실 부회장은 신종균 사장을 중심으로 한 엔지니어 그룹 손을 들어주었다는 내용이다.   

업계에서는 삼성전자 무선사업부 내 기술 테크노크라트들의 독선으로 흐를 가능성을 우려하였다. 나는 이렇게 분석했다. “지금까지 삼성전자의 정체성은 양산 제조업을 기반으로 하는 마케팅 기업이었다. 기술 혁신이 없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가 마케팅에서 밀리면 설 자리가 없어진다.”

또한, “삼성전자는 갤럭시S6의 글로벌 런칭을 하면서 2014년 여름부터 제조 부문의 공정 혁신을 해왔다고 밝혔다. 반면 마케팅 부문에서는 특별한 변화가 없다. 삼성은 구글, 애플과 비교하면 독자 플랫폼 경쟁력에서 밀린다. 그나마 지속적으로 협력해온 세계 이동통신사들의 힘을 빌려야 버틸 수 있다.”고 언급하였다.

2015년 초, 이재용 부회장과 최지성 부회장은 뚜렷한 전략을 제시하면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상황이 아니었다. 마케팅 책임자들의 갑작스런 부재는 갤럭시S6의 성공을 예측 불허로 만들었다. 

스마트폰은 승용차 등과 달리 아동층이나 초고령층을 제외하고 경제활동을 하는 모든 세대를 타깃으로 하기 때문에 가격 전략이 제품의 승패를 좌우한다.

나는 한편으로는 삼성전자 올드보이들의 경영 행태를 비판하였다.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이 쓰러진 이후 현재까지 삼성전자 수원 본사는 새벽 출근을 하고 있다. 기획부서는 새벽 6시 반에 브리핑이 시작된다. 임원이나 직원들이 오랜 새벽 근무로 인해 피로감이 누적돼 있다. 일부 부서는 맹목적인 경쟁주의에 내몰린 소수 영웅주의자들이 지나친 책임 의식으로 정상적인 근무 체제를 무너뜨리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과거에도 숱하게 시행했던 시대에 뒤처진 업무 관성에서 무슨 혁신이 나오겠는가.“ 

이어서 결론을 맺었다. “혁신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라는 것이 아니다. 혁신은 눈에 보이는 문제점을 정확하게 잘 파악하고, 일의 순서를 정하고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는 과정의 전체를 말한다. 옳은 주장을 존중하고, 머리를 맞대어 해결점을 찾아야 하는 당연한 사안들을 패권으로 몰고 가고, 인신공격을 해 패가망신 시키는 식의 폭력적 경영 방식은 삼성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삼성전자는 2018년 11월, 삼성 개발자 컨퍼런스에서 ‘폴더블 디스플레이’를 공개한 이래 2021년 하반기 ‘갤럭시 Z 플립’ 폴더블폰을 성공리에 양산·판매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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