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조각가 송필을 만나기전, 그의 작품에 대해서는 ‘높이 솟은 동물’, ‘동물 등 위로 솟은 묵직함’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를 ‘삶의 무게’라는 말로 표현한다. 

북서울 미술관 야외조각장에서 만났던 <실크로드. 2012> 작품 캡션(설명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송필은 거대한 자본과 권력 구조아래 힘겹게 살아가는 소시민을 동물에 빗대어 이를 비판하고 역설하는 작가로 우리 삶의 리얼리티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과거 동서 교역로였던 비단길, 실크로드(Silk Road)를 건너는 낙타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자신의 키를 훌쩍 넘는 짐을 한가득 싣고 가는 낙타는 고스란히 오늘날 우리 삶의 무게와 슬픔을 상징한다.>

‘실크로드’(Silk Road)라는 말은 좁은 의미로 중국산 비단 혹은 아시아 동부 지역의 물산이 중앙아시아 사막을 거쳐 인도나 서아시아, 멀리는 지중해까지 전달됐던 교역 루트를 지칭한다.

넓은 의미로는, 비단과 상품뿐 아니라 인적·문화적 왕래도 교류 대상에 포함됐다. 교류 루트 역시 북방의 초원과 남방의 해상까지 아울렀다. 일반적으로 이해하는 ‘실크로드’의 의미에 가깝다.

실크로드. 청동, 365*160*60cm. 2012 / (사진 제공=송필)
실크로드. 청동, 365*160*60cm. 2012 / (사진 제공=송필)

작품을 대하는 관객이 느끼는 감정은 각자 다르다. 세계 미술사에 빛나는 유명 작가의 블록버스터급 전시장에서 조차 동선(動線) 중간 중간 등장하는 설명과 그래픽은 관객이 느끼는 감정을 과도하게 침해하지 않아야 한다. 종종 작품의 제원 설명을 넘어서는 팻말을 마주할 때가 있다. 

인터뷰에서 송필 조각가(작가)는 문명이 오간 교역로로서 실크로드보다는 ‘삶의 무게’(weight of life)에 짓눌린 삶들에 방점을 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각 작품이든 무엇이든 높이 솟아(soar, rise)오를수록 무게만큼의 중력의 법칙을 견뎌야 한다. 일단은 작가의 주장대로 ‘삶의 무게’라는 표현에 비중을 두어 작품의 모티프이자 주제를 정하게 된 심리적 연원(淵源)을 따라가 본다.

송필 조각가는 전북 진안군 정천면 모정리, 36가구가 단란하게 모여 살던 모곡 마을 출생이다. 전 가족이 용담댐 수몰로 마을을 떠나야했다. 1990년대 마을이 물에 잠기기 전, 송필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출향했다. 타지에서 고교를 다니며 방학에 간헐적으로 만나본 부모님이 고향을 떠나야하는 고통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작가로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비교적 초기 작품들은 인체나 동물 형상을 ‘살점이 붙은 가죽’으로 표현했다. 

날것과 같은 가죽과 인물상의 대입은 그의 가족이 지나온 삶에 대한 집단기억의 상실과 미래 삶에 대한 공포로 인한 절규이다. 조상때부터 머물러온, 고유한 공간이 되버린 장소는 시간과 함께, 피혁 공장 한켠에 쌓여있는 살점 붙은 가죽이다. 피혁 공장 노동자들은 종종 그 살점을 하루의 피로를 푸는 소주 안주로 삼는다. 살점붙은 가죽은 원초적이기도 하다. 

박제된 시선-외치다 합성수지.쇠가죽 105*98*70. 2002 / (사진 제공=송필)    
박제된 시선-외치다 합성수지.쇠가죽 105*98*70. 2002 / (사진 제공=송필)    

‘삶의 무게’는 푸시킨(Aleksandr Pushkin 1799~1837)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와 같은 맥락으로 볼 수도 있다. ‘삶의 무게’는 슬프고 우울한 날들이다. 삶이 고통이 된다. 시인 고정희(1948~1991) 에게 ‘삶의 무게’는 짊어지고 올라 ‘산’에 올라 내다버릴 수도 있다. 

그러고 보면 송필의 낙타는 신발 등으로 형상화 된 산을 지고 있는 듯도 보인다. 그 닉타가 도달할 곳은 등짐을 내려놓을 또는 내다버릴 안식처이다.  

"달밤이다. 먼 달빛의 사막으로 사자 한 마리가 가고 있었다. 무거운 몸뚱아리를 이끌고 사구를 소리 없이 오르내린다. 매우 느린 걸음이다. 쉬르르 쉬르르. 둔황 명사산의 모래가 미끄러지는 소리인가. 사자는 아랑곳없이 네 발만 차례차례 떼어놓는다. 발자국도 모래에 묻힌다. " <윤후명 소설, ‘돈황(敦煌)의 사랑’1983 >
소설이 출간되고 10여년후 작가 윤후명은 돈황의 사막에 이르러 울움을 터트린다. 윤후명의 페르소나는 사자이듯이 송필의 페르소나는 낙타이다. 

2006년 송필은 중국 베이징 창작예술특구인 798다산즈와 환티에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초청받아 4년여를 머무르며 작업에 매진했다.

2007년 7월, 798예술특구 제로 갤러리 개인전에서 선보인 일명 ‘찌그러진 빌딩’ 시리즈는 빌딩군(群)을 종이처럼 구겨진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전시의 부제는 ‘찬란한 빛’(brillant light)이었다.

건축가 프랭크 게리(Frank O. Gehry, 1929년 ~ )의 설계로 1997년 개관한 스페인 구겐하임 빌바오 미술관(Guggenheim Bilbao Museum)은 화려한 곡선으로 외관이 이뤄져 있다. 구겨진 모습이기도 하다. 구겨짐은 실용적 목적, 미학적 관점에 따라 표현의 한 양식이 되기도 한다. 

Hollywood_혼합재료_300×800×370cm_2007 / (사진제공=송필)
Hollywood_혼합재료_300×800×370cm_2007 / (사진제공=송필)

베이징의 지도 위에 높은 탑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고민하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같은 형상을 표현했으며, 헐리우드의 간판 아래 수많은 종이 비행기가 마치 날파리처럼 날아들어 부딪혀 떨어진 모습도 보여준다. 

일부 평론가들은 작가가 건축물을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대상으로 삼았다고 했으나, 이는 명실공히 현대 세계 사회주의의 본산인 중국 베이징이라는 분위기를 의식한 평이라고 본다. 달리본다면 체제는 사회주의이지만 내용은 자본주의로 이행하는 현대 중국의 이면을 상징화한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

‘무게’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누르는 물리적 현상의 단위이다. 그의 작품이 밑에서 위로 솟는다는 필자의 첫 느낌은, 작가와 관객의 각각 ‘다른 의미의 생각과 표현의 언어’이다. ‘삶의 무게’라는건 작가의 관념이 ‘혼자만의 언어’에 갇혀 있는 경우는 아닐까?

‘직립의 나날들’ 전시풍경 베이징 제로아트스페이스 2014년 / (사진 제공=송필)
‘직립의 나날들’ 전시풍경 베이징 제로아트스페이스 2014년 / (사진 제공=송필)

작가가 명절 때 마다 찾는 부친의 묘소는 용수와 발전을 위한 용담댐의 물에 잠긴(sink) 작가의 고향이자 부친의 마을을 내려다 보는 곳에 있다. 물의 하중은 세상의 어떤 물질보다도 무겁다. 물의 나라(水國), 엄격하게는 수중(水中)에서는 물고기들이 자유롭다. 온갖 세상의 물건이 쟁여 올라간, 작가 자신 또는 세상을 떠난 작가의 부친이 의인화된 낙타 등 동물은 수중에서는 부유(浮遊)하며 지상의 관념인 ‘삶의 무게’를 벗어던질수 있다.      

황석영이 1972년에 발표한 단편 ‘낙타누깔’에서 ‘낙타’는 송필이 대상으로 삼는 ‘낙타’(camel)와는 전혀 상관 없는 소설 속 참전 군인들이 시용하는 속어일 뿐이다. 그렇듯 ‘솟아오름’과 ‘무게’로 인한 중압감(oppressive feeling)은 상반되지도 관계성도 없는 언어이다.

'직립의 나날들' 이 의미가 더욱 명확하다. ‘직립’은 발은 서고 팔은 자유로운 인간을 네 발 달린 포유류와 구분한 언어이다. 네 발 포유류는 직립할 수가 없다. 결국 인간을 낙타류 등으로 의인화하였고, 안소니홉킨스 주연의 영화 ‘남아있는 나날’에서 의미하는 것처럼 유한한 인간이 추구할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묻게 한다. 송필의 ‘삶의 무게’를 짊어진 낙타는 말과 사슴, 캥거루, 팽귄, 달팽이 등으로 변환된다.

‘그의 작품들은 인간의 존재 형상을 넘어 이 시대가 처한 초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허상을 꿰뚫는 비범한 조형언어를 보여주고 있다.’(2015년 구본주예술상 수상자 선정 이유) 

제도권은 송필의 작품 세계가, 인간의 삶을 구조화하고 있는 도시와 자본주의, 욕망 따위로 주제를 확장시켜왔다고 본다. 그가 보여주고 있는 ‘직립의 나날들’이라는 작품들은 초자본주의의 사막을 횡단하는 동물들로 의인화된다고 본다. 낙타로 인해 연상되는 사막이 자본주의라는 설명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어마무시한 담론이지 않나.

엄청난 무게의 돌 혹은 바위를 짊어진 주인공들(낙타, 사슴, 물소, 달팽이 등)은 동물 생태계에서 나약함을 상징하는 초식 동물이다. 이들은 서민, 자영업자, 노동자들을 상징한다.

최근에는 이들이 짊어진 소재가 돌덩어리뿐만 아니라 옷가지나 신발, 시계, 서랍장 등 일상의 다양한 소재로 확장된다. 이러한 오브제들은 재료가 작품을 규정하는 조각의 개념을 흐트러버린다. 나무와 돌, 원시와 현대, 자연과 인공 같은 서로 대비되는 요소가 충돌과 균형을 이룬다.

'기억저장소' Steel, Bronze, Wood(서랍장), 100x100x265cm, 2017 
'기억저장소' Steel, Bronze, Wood(서랍장), 100x100x265cm, 2017 

몇 년 전부터는 낙타(혹은 동물들)의 등에 돌 대신 나뭇가지도 함께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무를 재료로 삼는 어떤 조각가는 조형(造形)과 조각(彫刻)의 차이를 깎느냐 깎지 않느냐로 본다. 조형도 조각의 범주에 들어가기에 중요하지 않은 구분일 수 있다. 

되려 송필의 작품은 이러한 깍느냐 깍지않느냐의 구별보다는 설치(Installation Art)냐 아니냐를 대입해 볼 필요가 있겠다. 물론 예술 장르의 구분이 무의미한 현대미술의 담론과 무관하게 말이다. 

레푸지아-움트다. 브론즈와 스테인레스에 야광안료 30*290*79 2021
레푸지아-움트다. 브론즈와 스테인레스에 야광안료 30*290*79 2021

설치는 관람객들이 작품을 직접 만지거나 밀접한 거리에서 시지각적인 경험을 하는 점에서 조각과 비슷하다. 조각 작품은 전시되는 공간의 존재를 드러내는 반면에 설치는 그 공간까지도 예술의 영역에 포함되거나 작품의 재료로 사용한다.

최근 선보이기 시작한 ‘고사목에 핀 매화(梅花)’ 시리즈는 박제돼 벽에 걸린 사슴의 뿔을 고목가지처럼 연출하고 그 위에 매화 꽃망울을 달았는가 하면, 염소나 물소 뿔에도 매화를 피워냈다. 그뿐 아니라 고목분(枯木盆) 자체를 동물의 몸통으로 삼아 그 위의 고사된 나뭇가지에도 동선(銅線)으로 세밀 용접한 매화꽃을 매달아 놓았다. 

전등이 꺼진 전시장에서는 야광 재료로 인해 작품이 놓인 공간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하며 원시적 시간대로 옮겨간듯한 느낌을 받는다. 빛이 들어오면 공간과 어우러지는 아우라로 인해 그 자체로 설치 작품이 된다.  

"낙타의 등에서 자라난 그 나뭇가지는 생명력에 대한 염원을 품고 있다. 결국 그의 조각은 삶의 근원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며, 생명의 순환을 일깨우는 일상의 화두다" (미술평론가 김윤섭)

심정택은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에서 근무했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이후 상업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50여회의 초대전, 국내외 3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3년차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써왔고,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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