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 토론 배틀 이제는 폐지하자

“올 것이 왔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소장을 비롯한 일단의 정치군인들이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고서 윤보선 당시 대통령이 내뱉었다는 이야기이다. 반란을 신속하고 단호하게 진압해야 할 의무가 있는 현직 대통령으로서 지극히 무책임한 소리였음은 물론이다.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이 같은 당 소속 박민영 미디어 대변인을 고소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나는 윤보선 전 대통령과 똑같은 얘기를 자연스럽게 하고 말았다. 현란한 말발 하나에 기대어 여의도 정치권에 운 좋게 발을 들여놓은 인격 미숙한 젊은 정치 지망생이 필연적으로 칠 수밖에 없는 사고가 드디어 터졌기 때문이다.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과 안내견 태백이가 올해 2월 27일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의원총회에 참석해 있다. (사진=연합뉴스)
김예지 국민의힘 의원과 안내견 태백이가 올해 2월 27일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의원총회에 참석해 있다. (사진=연합뉴스)


윤석열은 대한민국 검찰조직에서 유달리 특이한 유형의 인간이 아니었다. 기소와 구속이라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강압 수사든, 별건 수사든, 표적 수사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전형적인 특수부 검사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박민영은 금배지를 목표로 국회 주변을 오가는 젊은 정치 지망생들 가운데 나 홀로 독특한 캐릭터가 아니었다. 건전하고 정상적인 노동의 경험 없이 번지르르한 말솜씨 한 가지를 앞세워 이런저런 각종 방송 프로그램들에 출연하며 인지도를 높여온 평균적인 이른바 여의도 2시 청년이었다.

바람직한 정치인 충원 방법은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내로라하는 현인들과 선각자들이 부지런히 탐구해온 주제였다. 저 위대한 공자와 소크라테스조차 훌륭하고 이상적인 국가 지도자를 어떻게 발굴하고 육성해야 하는지에 관한 구체적 해법을 끝내 제시하지 못했다. 따라서 필자 같은 일개 무명 정치 컨설턴트에게 그와 관련된 모범답안이 있을 리 없다. 그러나 분명한 건 최근 몇 년 동안 보수 정당을 중심으로 각광을 받아온 소위 ‘토론 배틀’에 기반한 신인 정치인 선발 방식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됐다는 점이다.

토론 배틀의 본격적 도입에 나선 인물은 이준석 현 개혁신당 대표이다. 그는 국민의힘 당대표 시절 <나는 국대다>로 명명된 토론 배틀을 개최해 당 대변인단을 구성했다. 박민영 미디어 대변인은 이준석이 정치 개혁의 대명사이자 견인차처럼 밀어붙인 토론 배틀을 거쳐 정치권에 들어왔다.

토론 배틀로 현실정치에 입성한 인사들은 박민영 이외에도 여럿이다. 그런데 그들의 남다른 입담이 대한민국 제도권 정치의 참다운 변화와 혁신에 과연 얼마나 공헌했는지는 의문이다. 박민영에게는 입담 말고도 특출한 재주가 한 개 더 있었으니 권력의 줄을 기민하게 포착하는 영악한 처세술이었다. 그는 윤석열에게 발탁돼 용산 대통령실로 가면서 이준석을 겨냥해 한바탕 걸쭉한 독설을 퍼부었다. 그즈음 이준석은 윤석열에게 숙청당해 한창 고통받던 중이었다. 이준석 입장에선 분노와 배신감으로 이를 갈 노릇이었다.

박민영 국민의힘 미디어 대변인. (사진=연합뉴스)
박민영 국민의힘 미디어 대변인. (사진=연합뉴스)


보수의 유망주들로 한때 떠올랐던 토론 배틀의 승자들이 한국 정치의 발전과 전진에 기여한 공적과 흔적은 좀처럼 발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최소한 자신이 몸담은 진영에라도 긍정적 영향을 미쳤어야 마땅하다.

실제론 이와는 정반대였다. 말싸움 잘하는 ‘젊은 혓바닥’들이 입을 열면 열수록 현재는 국민의힘과 개혁신당으로 나뉘어 있는 우리나라 보수정치는 한층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기만 했다.

보수가 진보와 견주어 거의 유일하게 누려온 비교우위는 시쳇말로 싸가지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말은 어눌할지언정 성실한 행동과 겸손한 태도야말로 한국 보수의 몇 안 되는 강점이었다. 보수가 야심 차게 시도한 ‘입심 강화 프로젝트’는 결과적으로 소탐대실의 참담한 실패로 귀결되는 양상이다. 진단이 크게 잘못된 까닭에 처방도 완전히 잘못된 탓이다.

한국의 보수정치 세력이 민심의 지지와 여론의 신뢰를 치명적으로 잃은 데는 세 가지 원인이 주요하게 작용했다.

첫째는 이념이 낡음이다. 둘째는 정책의 부실이다. 셋째는 인성의 피폐이다.

이명박 정권은 이념은 낡았어도 정책은 나름의 짜임새가 있었다. 박근혜 정권은 정책마저 엉망이 되었지만 정권 수뇌부의 인성까지 구제 불능의 단계로 망가지지는 않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윤석열 정권은 3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다. 이념의 낡음과 정책의 부실에 더해 대통령 윤석열과 영부인 김건희의 인성의 피폐함까지 완벽하게 풀세트로 갖춘 연유에서였다.

낡은 이념은 시대의 흐름에 걸맞게 쇄신하면 된다. 부실한 정책은 전문가들을 영입해 충실하게 보완하면 된다. 반면, 구성원들의 인성까지 피폐해지면 전연 손쓸 도리가 없다.

보수 정치가 비장의 무기로 선보인 토론 배틀은 인성이 피폐해도 언변만 청산유수면 단박에 성공할 수가 있다는 그릇된 희망을 나이 어린 야심가들에게 제공한 셈이었다. 인간에 대한 예의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회적 약자들을 향한 인정머리라고는 쥐뿔도 없는 권력 지향적인 어린 친구들에게 손쉽게 출세할 수 있는 통로 구실을 보수정치 세력이 자처한 격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보수정치의 한 축인 개혁신당은 괴물 양성소로 변질해버린 토론 배틀에 대한 미련과 집착을 여전히 버리지 못한 모습이다. 인성 즉 사람됨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말만 매끈하게 잘하는 걸 '장땡'으로 여긴다면 차라리 정당 간판을 내리고 방송국을 차리는 게 낫지 않을까? 근래에는 방송사들도 신입 또는 경력직 아나운서를 채용할 경우 인성평가를 중시한다고 하니 개혁신당은 시대를 거꾸로 역행해도 한참 역행한다고 하겠다.

유유상종이라고 했다. 이념에 더하여 인성까지 이상했던 윤석열-김건희 부부와 절연할 의지도, 능력도 없는 국민의힘은 더는 언급할 가치가 없으리라. 따라서 윤석열 일당의 내란으로부터 자유로운 개혁신당만이라도 인성이 좋은 사람들이 모인 정당으로 발돋움해야 하지 않겠나.

인성이 좋은 사람들이 모인 정당은 정책이 좋은 정당으로, 이념이 좋은 정당으로 머잖아 도약하기 마련이다. 반면, 인성이 피폐한 무리가 바글대는 정당들은 아무리 이념과 정책이 우수해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일 뿐이다. 박민영 국민의힘 미디어 대변인 사태가 인성의 사활적 중요함을 정치권 전반, 특히 보수 진영에게 확실하게 일깨우는 계기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공희준은 “산업의 쌀이 반도체라면, 모든 콘텐츠의 쌀은 글”이라고 믿으며 정치평론과 인물비평을 중심으로 PC통신 시절부터 SNS 시대인 지금까지 글쓰기에 전념해왔다. '강남좌파', 먹고사니즘' 같은 21세기 한국사회의 시대상이 담긴 촌철살인의 신조어를 만들어낸 진짜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수만 평전>  <지금은 강남시대>  <보수의 종말>  <퇴진하라> 등의 책을 만들었다.  

※ 뉴스버스 외부 필자와 <오피니언> 기고글은 뉴스버스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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