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산 불하와 박정희 군사정권 지원 아래 고속 성장
폴리에스테르 필름 국산화로 화학섬유 업계 1위 등극
최종현 회장의 제2창업 선언 ‘섬유에서 석유까지 계열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일본이 한반도를 떠나면서 남긴 기업과 토지 등 적산(敵産)은 미 군정청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에 귀속됐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12월19일 일본인들이 남긴 적산을 민간에 불하하는 ‘귀속재산처리법’을 공포했다.
놀랍게도 이승만 정부의 불하 기준은 ‘적산과 관련된 민간인’ 여부였다. 즉 일본인 소유 기업의 주주나 경영인으로 있었던 자, 그 기업의 관리인으로 있었던 자, 그 기업에 돈을 빌려준 적이 있었던 자였다. 한마디로 일제의 식민 통치에 협조했던 친일파가 우선순위였다.
이승만 정부는 일본인 소유 기업 등과 인연을 맺었던 친일파에게 거의 무상이라고 할 만한 헐값에 적산을 불하했다. 그나마 10% 계약금만 내면 5~15년 분할상환을 허용했다. 해방 직후 4년 동안 물가가 60배 가까이 치솟은 극심한 인플레 상황에서 친일파는 헐값의 적산 불하를 통해 손쉽게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SK의 출발은 이승만 정부가 헐값에 넘긴 ‘적산 불하’
SK 창업주 고 최종건 회장은 1926년 수원의 지주였던 최학배의 4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동생 최종현 회장은 1929년생). 그는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한 뒤 1944년 4월 선경직물 수원공장에 입사했다. 선경직물은 국내 일본 포목상인 선만주단과 일본 관서지방의 교토직물이 합작해 세운 회사로, 1943년부터 수원시 평동에서 조업을 시작했다.
최종건 회장이 입사한 지 4개월 뒤 선경직물은 조선총독부의 기업정비령에 따라 조선직물㈜과 통합돼 전시물자 생산에 동원됐다. 주로 군복 안감인 시루빠(Silver)를 직조했다. 최 회장은 입사 후 1년도 지나지 않아 100여명의 제직(製織) 여공을 관리하는 생산부 제2조장으로 승진했다. 그해 일제의 패망으로 폐쇄됐던 공장은 1946년 2월 조업을 재개했고, 당시 21세였던 최종건 회장이 생산부장에 임명됐다.
‘SK 60년사’ 등에 따르면, 최 회장은 해방 무렵 선경치안대를 조직해 일본인들의 무사 귀국을 돕고 공장 보호에 앞장섰다고 한다. 이 공로로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7월 선경직물 공장부지의 일부를 소유했던 차철순과 함께 불하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섬유산업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 차철순이 손을 떼면서 최 회장은 27세 나이에 단독으로 선경직물을 인수했다. 결국 일제 시대 적산 기업의 관리인으로 일했던 데다 패망한 일본인들의 귀국을 도운 공로로 SK그룹의 토대인 선경직물을 헐값에 인수한 것이다.
정경유착과 각종 특혜로 도약의 발판 마련한 선경
5∙16 군사쿠데타는 선경직물이 제2의 도약을 이루는 발판이 됐다. ‘최종건 평전 위원회’가 발간한 <공격경영으로 정면 승부하라>에 따르면, 쿠데타가 일어난 지 4개월 뒤인 1961년 9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수원의 선경직물을 방문했다. 이 사실은 언론을 통해 전국에 알려졌고, 선경직물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인정을 받은 유력 기업으로 떠올랐다. 금융권 자금 지원 등 각종 특혜에 날개를 달았음은 물론이다.
박정희 정권의 지원을 등에 업은 선경은 1962년 ‘닭표 안감’의 홍콩 수출을 시작으로 무역회사인 선경산업㈜을 설립한다. 이어 1966년 직물에서 화학섬유로 영역을 넓힌 선경화섬을 설립해 제2 도약의 토대를 마련한다. 선경화섬은 1967년 일본 데이진과 합작해 1일 생산량 7톤 규모의 폴리에스테르 원사 공장을 짓기로 했는데, 생각만큼 자금 조달이 원활하지 못했다.
이때 박정희 정권이 구원투수로 나서 선경 측이 책임져야 할 공장 건설자금 694만달러를 지원하기로 했다. 최종건 회장과 가까웠던 이후락 대통령 비서실장 등 권력 실세들의 명시적 후원과 정부 당국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선경은 1968년 3월 데이진과 합작투자 협약을 체결했고, 이어 폴리에스테르 원사공장 착공에 들어갔다.
박정희 정권은 당초 폴리에스테르 원사 전량 수출을 조건으로 자금을 지원했지만, 막상 원사 생산이 시작되자 슬그머니 국내 시판을 허용해줬다. 1969년 당시 폴리에스테르 국내 수요량 예상치는 4,765톤이었지만 폴리에스테르 생산을 거의 독점했던 선경의 연간 생산능력은 2,555톤 수준이었다. 선경 제품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고, 선경이 업계 1위로 발돋움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최종현 시대, 섬유산업에서 정유산업까지 계열화 완성
최종건 회장은 적산 불하와 정경 유착을 기반으로 직물에서 무역, 그리고 화학섬유에 이르는 대기업의 발판을 만들었다. 그는 1972년 워커힐 호텔 인수를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세 살 터울 동생 최종현 회장이 선경그룹을 승계했다. 이 무렵 한국 경제는 제1차 오일쇼크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있었다. 불과 두 달 새 원유 가격이 4배로 치솟았다.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대한석유공사(유공), 호남정유, 경인에너지 등 한국의 정유 3사에 원유 공급을 줄이겠다고 통보했다. 한국 경제는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최종현 회장은 한국 경제가 위기에 처했던 1973년 11월 24일 선경그룹의 2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최종건 회장이 선경그룹을 키우는 사이, 수원 농고와 서울대 농화학과를 거쳐 해외 유학까지 다녀오는 등 전문지식과 경영 능력을 키웠다.
최 회장은 석유파동의 위기를 지혜롭게 넘기면서 확고한 리더십과 경영능력을 증명했다. 고 최종건 회장 문상 중에도 사우디아라비아 담당 임원을 통해 ‘한국이 친아랍 선언을 하지 않으면 수출금지 해제가 불가능하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곧장 정부 관계자를 찾아 수출금지를 풀기 위한 선행조건인 친아랍국가 선언을 끌어냈다고 한다. 이 사건은 훗날 선경이 삼성을 제치고 유공을 인수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된다.
최종현 회장의 노력 덕에 석유 공급이 중단되는 최악의 위기는 넘겼지만 오일쇼크의 충격파는 한동안 한국 경제를 강타했다. 1974년에도 석유화학 원료가 2배 이상 오르는 등 원자재 가격이 치솟았다. 최 회장은 재무구조 건실화를 위해 주력 기업에 대한 대규모 증자를 단행했다. 이어 1975년 신년사에서 ‘제2의 창업 선언’으로 불리는 특단의 대책을 발표한다. 핵심은 ‘섬유에서 석유에 이르는 산업의 완전 계열화’였다. 그는 기업 확장과 더불어 ‘경영능력 배양’도 강조했다. ‘석유에서 섬유까지의 완전 계열화’가 하드웨어의 완성이라면 ‘경영능력 배양’은 이를 운영하는 ‘소프트웨어’의 정립으로 풀이된다.
이후 최종현 회장의 기업 확장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선경개발(관광), 서해개발(조림), 선경유화(DMT공장), 선경석유(정유공장), 선경금속, 선경매그네틱(오디오테이프), 선경종합건설, 선경머린(요트제조)을 설립하는 등 사업다각화를 추진했다. 섬유에서 석유에 이르는 계열화와 기업 확장 선언을 실제 구현하는 과정이었다.
1970년대 상징적 기술 ‘폴리에스테르 필름’ 국산화 성공
폴리에스테르 필름은 1970년대 중반 컴퓨터와 오디오의 자기테이프, 마이크로필름 등에 필수적으로 쓰이는 기초 소재였다. 세계 수요는 매년 20% 가까이 급증했고,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던 국내 수요도 폭증하고 있었다.
당시 폴리에스테르 필름의 제조기술은 미국 듀폰을 비롯한 4개국 7개사가 과점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개발도상국의 기술 이전 요청에 절대 응하지 않았다. 선경에 화학섬유 기술을 제공했던 일본 합작선 데이진도 협조 요청을 외면하긴 마찬가지였다. 최종현 회장은 1975년 말 선경석유의 사명을 선경화학으로 바꾸고 한국과학기술원과 폴리에스테르 필름 공동 개발에 착수했다. 하지만 국산화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이른 새벽부터 자정이 넘을 때까지 일은 계속되었고, 우리는 이런 생활을 올빼미 인생이라고 표현했다. 드디어 공장이 건설되고 설비가 가동되기 시작했을 때 우리 주위에 쌓이는 것은 제품이 아니라 폐 필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쌓이는 폐 필름의 양이 많아졌고, 나중에는 공장 건물보다 더 커져 외부에서는 공장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경영실적마저 적자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해 회사는 존립의 위협까지 느끼게 됐고, 사원들 임금이 제때 지급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에 이르렀다.” 당시의 절박함을 보여주는 증언이다.
선경은 당시 폴리에스테르 필름 생산시설에 400억원을 투자했다. 막판에는 자금이 고갈돼 고리의 사채시장 자금까지 동원했다고 한다. 마침내 1977년 9월 선경화학은 완제품 시험에 성공했다. 같은 해 10월 선경합섬 수원공장 남쪽 9,800평 부지에 연산 900t 규모의 폴리에스테르 필름 생산공장 건설에 착수했고, 12월에는 시제품 생산에 성공했다.
그러자 일본 데이진이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데이진은 선경의 국내 경쟁업체인 제일합섬(현 롯데케미칼)에 폴리에스테르 필름 기술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선경의 독자적인 기술 개발 노력을 노골적으로 방해하고 나선 것이다. 최종현 회장은 다음해 1월 폴리에스테르 필름 국산화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공개하고 정부에 기술 보호 조치를 요청했다. 이어 그해 6월 데이진의 방해 공작을 뚫고 4년간의 기술 보호 결정을 받아냈고, 수원공장은 본격적인 폴리에스테르 필름 생산에 들어갔다.
선경이 폴리에스테르 필름을 소재로 만든 비디오 공테이프는 당시 개당 가격이 20달러에 달할 정도로 부가가치가 높았다. 국내에서 기술 독점권을 인정받은 폴리에스테르 필름은 선경그룹에 천문학적인 이익을 안겨줬다. 선경화학의 후신 SKC는 끊임없는 연구개발로 제품을 늘리고 품질을 높여갔다. 1980년에는 미국, 독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컬러비디오테이프를 개발했다. 현재 SKC는 폴리에스터 중합부터 베이스필름, 가공까지 일괄생산 체계를 갖춘 세계 4위의 폴리에스터(PET) 필름 제조사로 자리 매김했다. 최종현 회장이 주도한 폴리에스테르 필름 개발은 대한민국 산업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국산화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이를 통해 벌어들인 엄청난 수익이 유공 인수의 종잣돈이 됐고, 선경그룹이 지금의 SK그룹으로 발전하는 원동력이 됐음은 물론이다.
이인형은 가치공학(Value Engineering)분야 국제공인 CVS자격증을 보유한 프로젝트 컨설턴트다. 서울대 농학과를 거쳐 연세대 대학원 경제학과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뒤 한국신용정보에서 기업 평가·금융VAN업무를 맡았고, 서울대 농생대에서 창업보육 업무를 했다. 지금은 소비자 환경활동 보상 플랫폼을 구축 중이며, 개인신용정보 분산화 플랫폼도 준비중이다. 금융‧산업‧환경‧농업 등이 관심사다. 기후위기 대응 세계적 NGO인 푸른아시아 전문위원이면서, ESG코리아 경기네트워크 운영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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