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을 찾아서 ⑮]
북유럽 감성과 조선 지성의 만남
그런 날이 있다.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날.
겨울을 재촉하는 알싸한 늦가을 공기, 파란 하늘과 바람이 등을 떠밀어 어디론가 멀리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저녁의 선약을 고려하며 가까운 곳을 생각해 보았다. 서울이 아니면 어디든 좋다고 생각했고, 야외를 보며 달리는 기차로 갈 수 있는 곳이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찾은 곳이 경의중앙선을 타고 갈 수 있는 정약용 도서관이었다.
옥수역에서 경의중앙선을 타면 30분 만에 구리 다음 역인 남양주의 도농역이란 낯선 역에 도착한다. 여기서 도보로 15분, 버스로 7분 거리에 정약용 도서관이 있다.
경의중앙선을 타고 가며 도스토옙스키가 시베리아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죽음의 집의 기록'을 읽었다. 달리는 기차의 창밖으로 보이는 파란 가을 하늘과 시베리아 감옥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들의 이야기가 대비되는 역설적인 시간과 공간을 지나며 30분도 안돼 도농역에 도착했다. 마침 역 건너편에 오는 버스에 올라 한 정거장 거리의 정약용 도서관에 도착했다.
신축 아파트와 신축 상가주택들이 늘어서 있고 그 옆으로 의정부 검찰청이 나란히 자리한 4차선 도로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다산의 고향에 세워진 도서관
지난 여름 남산 자락길의 다산성곽도서관을 다녀온 터라 정약용 도서관이 따로 있음을 알지 못했다. 막연히 경의중앙선을 타고 쉽게 다가갈 수 있는 도서관을 찾다가 정약용 도서관이 있음을 알고 찾아왔다. 남양주 내 작은 규모의 아담한 도서관이라 생각하며 왔지만, 예상보다 큰 도서관의 외형에 잠시 멈칫했다.
도서관에 들어와서야 정약용 도서관이 2020년 5월 개관한 장서 22만 권을 보유한 곳이며, 다양한 세미나실과 공연장, 카페를 갖춘 공공도서관 중 전국에서 6번째 큰 도서관이자 경기북부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도서관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벌써 물들기 시작한 노란 은행나무 가지 사이로 도서관이 보이고, 도서관 쪽으로 이동하자 정약용 선생이 책을 들고 앉아 계신 동상이 도서관 앞에 자리하고 있었다. 동상 옆에 새겨진 다산 선생님의 약력을 보고서야 그분이 이 도서관이 있는 지금의 남양주시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왜 이곳에 정약용 도서관이 위치해 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북유럽 감성이 살아 숨 쉬는 공간
정문 로비의 도서관 출입구 쪽으로 들어서자 나무 책장과 천장의 오브제가 전면을 가득 채웠다. 다독과 수많은 책을 집필한 다산 정약용의 도서관임을 암시하는 듯했다.
1층 동관 입구로 들어서 어린이 도서관과 다산 정약용의 생을 알리는 대형 스크린을 지나면 도서관 메인 공간이 자리한 2층으로 오르는 계단 공간과 1층 도서관 서가가 한눈에 들어온다. 큰 규모와 밝은 톤의 내부 디자인에 눈이 번쩍 뜨인다. 옅은 나무 톤의 책장과 책상, 책으로 가득한 공간에 유리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환한 햇빛으로 인해 마치 환한 자작나무 숲속에 들어온 느낌이다.
요즘 유행하는 계단 독서공간의 대부분이 쿠션이 있는 좌식 공간인 데 반해, 이곳에는 2층, 3층으로 오르는 계단 옆으로 집안의 미니 거실과 같은 느낌의 독립 독서공간이 유려한 디자인의 의자와 책장으로 배치되어 있다. 층고가 높은 큰 공간이지만 나만의 아늑하고 프라이빗한 공간의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2층으로 올라서면 가운데 널찍한 공간이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 속에서 환하게 빛난다. 자작나무를 연상케 하는 연한 나무 톤의 책장과, 원형 사각 등 다양한 디자인의 책상, 의자들이 어우러진 풍경이었다.
겨울 밤이 긴 북유럽에서는 내부에 머무는 시간이 많다 보니 집안 내부를 우드 톤의 가구와 기능성을 가조하면서도 개방감 있는 밝은 소재의 공간 인테리어로 디자인한다. 그런 홈 인테리어 디자인을 북유럽 감성의 디자인, 혹은 좀 더 구체적으로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의 홈 디자인이라고 말하는데, 이 도서관의 내부 공간에 들어서면 이런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감성이 물씬 느껴진다. 실제 이 도서관을 설계하고 디자인할 때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도서관과 스웨덴 스톡홀름 도서관의 공간을 벤치마킹했다는 정보를 보고 나서야 이 공간에서 느낀 북유럽 감성이 나만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2층 계단에서 3층 계단으로 오르는 창가 쪽 공간은 층고가 3층 천장까지 이어져 매우 높고, 이 공간과 창문 공간 사이에는 그 층고 높이의 4면으로 둘러싸인 책장이 놓여 있다. 마치 책으로 둘러싸인 요새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 요새 같은 공간 중심에는 원형 디자인의 나무 책장을 원형으로 둘러싼 원형 책상이 놓여 있어, 사람들이 둥근 원형 테이블에 빙 둘러앉아 마주 보며 책을 보고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특이한 공간 구성으로 보였다.
앞과 뒤로는 유럽 원목 그대로의 디자인과 느낌의 기다란 탁자들이 자연스럽게 놓여 있었다. 높은 책장과 유리창 사이에도 한두 사람이 지날 수 있는 터널 같은 공간을 배치했다. 각 개인이 자신만의 독서나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한 비밀스럽고 프라이빗한 느낌의 공간이었다.
넓고 층고가 높은 환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여백의 미를 느낄 수 있는 개방감과 함께 나만의 오붓함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따로 또 같이'가 가능한 공간이다.
도서관 서고 역할을 하는 책장이 놓인 중앙의 내부 메인 공간에도 책장과 책장 사이에 밝은 카펫과 편안한 의자가 배치되어 있어, 아늑한 거실과 같은 공간에서 느긋하게 나만의 독서를 즐길 수 있다.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도서관
3층으로 올라가면 동관과 서관을 연결하는 내부 브릿지가 있다. 브릿지를 지나 서관으로 들어서면 전문 공연장과 세미나가 가능한 다양한 규모의 룸이 배치되어 있다.
3층의 서관과 동관을 연결하는 브릿지 공간에는 차와 식사를 할 수 있는 분위기 좋은 휴게실도 있고, 1층으로 내려가면 제법 큰 규모의 세련된 베이커리 카페가 있어 외부로 나가지 않고도 하루 종일 책을 읽고 작업을 하고 간단한 점심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인생 1막을 마친 시니어에겐 서울에서 30분 거리에 있고 교통도 편리하면서 이런 복합문화공간과 도서관이 자리한 곳에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주 지역을 선택할 때 숲세권, 역세권에 이어 새롭게 '도세권'이라는 신조어를 떠올릴 수 있을 만큼 만족스러운 공간이었다.
이 공간과 디자인은 조선의 감성이 아닌 북유럽의 감성이었지만, 이 공간 안에서 누리는 모든 공간의 구성과 공간의 연결은 실제 수원 화성을 설계하고 건축하였던 다산의 실학 정신과 합리성을 반영하고 있는 듯했다. 정약용의 철학과 사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공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다.
정약용 아카이브에서 만난 다산의 숨결
정약용 도서관에 왔으니 다산에 대한 책을 찾아보고 읽는 게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생각하다가 2층 구석 창가 쪽에 '정약용 아카이브'라는 별도 공간을 찾게 됐다. 정약용의 일생과 그의 학문, 사상 관련 자료 소개가 벽 쪽의 전시 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었고, 정약용 관련 도서의 서가도 따로 비치돼 있었다.
정약용의 시를 시와 그림으로 각색한 서화집, 그의 철학 사상 관련 책을 골라 정약용 아카이브 공간에 마련된 편안한 소파에 앉아 그의 일생을 따라가 보았다.
그가 천주교 박해 시기 승정원 승지에서 금정찰방이라는 하급직으로 좌천됐을 때 금정에서 쓴 시 "불역쾌재행"(不亦快哉行,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20수를 서화로 재구성한 서화집을 보면서,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을 해학으로 풀고 있는 그 마음의 길을 따라가 보았다.
[정약용: 불역쾌재 3편]
날개 묶인 매 오랫동안 굶주림에 지쳐
가지 끝에서 푸드덕거리며 주저하던 중
때마침 북풍 불어 처음으로 줄을 풀고
바다 같은 푸른 하늘 마음껏 날아오르면
그 얼마나 좋을까
학문과 책에 관심이 많은 정조 왕의 총애로 신임을 받게 되지만, 정약용이 속한 남인과 반대 세력인 노론파의 지속적인 모함과 시기로 결국 오랜 세월 유배지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다. 전남 강진에서의 18년 유배생활 속에서도 그는 좌절하지 않고 가르치고 저술하는 삶을 살아 유배생활 동안 50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도서관의 규모와 다양한 세미나 시설 등을 감안할 때 정약용 아카이브 공간은 넓고 편안한 공간이긴 했지만, 다산의 일생과 철학, 사상을 담는 콘텐츠는 어딘지 부족해 보였다.
공간을 넘어 정신을 기리는 곳으로
바라기는 18년 유배생활의 고단함과 외로움 속에서도 치열하게 정진하여 쌓아 올린 다산의 철학과 사상, 삶으로 증명한 오롯한 뜻이 이곳을 통해 확산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코끝을 찡하게 하는 가을바람을 맞으며 도서관 앞의 '정약용 선생'의 모습을 다시 한번 바라보면서 도서관을 나선다.
30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 머리로, 마음으로 다산 선생의 발자취와 숨결을 느끼며 북유럽의 공간으로 다녀온 짧지만 깊은 여행의 시간이었다.
멀리 떠날 수 없는 당신, 30분 기차를 타고 300년의 시간을 거슬러 다산의 마음으로, 북유럽 감성의 공간으로의 여행을 떠나 보지 않겠는가?
고규영은 글로벌 마케팅전략 컨설턴트다. LG전자, LG필립스-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에서 마케팅 임원으로 일했다. 지난 30년간 B2B와 B2C 시장을 아우르며 시장, 고객, 회사의 마케팅 전략 수립과, 글로벌 영화사, 유명아티스트, 메가인플루언서, 글로벌 유통 등과의 마케팅 협업을 해왔다. 기업 퇴임후엔 전문직 공무원으로 봉직하며 기업 홍보경험을 정부기관에 접목하는 시도를 했다. 현재는 기업 및 공공기관 대상으로 마케팅과 AI 관련 강의를 하며, 뉴스버스 객원기자로도 활동 하고 있다. 공저로 <인생후반전, AI와 동행> <AI와 함께한 두 번째 인생노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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