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숲을 찾아서 ⑩]

여행에서 만나는 우연을 설계해둔 낭만 서점

서점 리스본은 이름 때문에 일부러 찾아간 곳이다. 찾아가는 길은, 과장을 보태면, 진짜 포르투갈을 가는 기분이었다. 가좌역에서 내려 길 끝까지 걸었는데, 난데없이 구글 지도가 길이 없는 곳으로 가라고 알려주는 것이다. 아마도 지하도로 걸어 들어가라는 뜻 같다. 지하도가 컴컴하고 사람도 없어서 제대로 가는 건가 불안한 마음을 안고 한참 걸었다. 지하도가 끝나며 '와~' 넓은 공원길, 아파트 앞 길게 드리운 빨래줄, 바람에 흔들리는 형형색색의 빨래들. 어린 시절 시골에서 봤던 듯한 정겨운 장면에 마음이 환해진다. 길을 찾던 불안과 두려움은 단번에 사라지고, 마치 다른 나라에 도착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서점 리스본의 전경. (사진=김희연)
서점 리스본의 전경. (사진=김희연)


그 풍경을 지나자 앙증맞은 흰색 3층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마른 막대기처럼 길쭉한 외벽에 파란 차양이 드리워져 있다. 서점 ‘리스본’이다. 컬러풀한 리스본의 도시 이미지를 연상했는데, 건물의 외양은 오히려 그리스 에게해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한 하얀 건물을 닮았다. 깨끗하고 청명하다.

이 서점의 이름은 파스칼 메르시어의 소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따왔다고 한다. 우연히 발견한 책 한 권 때문에 리스본으로 향한 주인공이 열정을 되찾고 새로운 사랑을 싹틔우는 이야기가 서점 주인의 마음을 울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손님들도 ‘책과의 우연한 만남’으로 삶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름에 담았다고 한다.

여행의 우연을 설계해둔 서점

앙증맞은 건물로 들어가면서 나도 저 건물처럼 날씬해지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그만큼 좁고 길게 지어진 건물이다. 그래서 4~5명만으로도 북적이는 느낌이 든다. 1층에는 작은 서가와 카페 주문 공간이 있고, 2층과 3층은 책들이 주인공이다. 특히 2층 공간이 예쁘다. 좁은 공간임에도 긴 테이블이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벽에는 서점의 추천책들이 액자처럼 전시돼 있다.

서점 리스본의 2층 책읽는공간. (사진=김희연)
서점 리스본의 2층 책읽는공간. (사진=김희연)

공간이 좁아 책을 많이 둘 수 없으니, 대신 책과의 우연한 만남을 기획해두었다. 바로 ‘생일책’이다. 365일 생일 날짜별로 책을 미리 포장해둔 것. 내 생일 날짜를 찾으니 없다. 아마 다 팔렸나 보다. 그런데 이상하게 아쉽지가 않았다. 이 책을 가져갔다는 사실 자체로 내 생일과 같은 날을 가진 누군가, 혹은 그날을 기억하고 싶은 누군가와 뭔가 기묘하게 연결된 것 같았다.

또 하나의 매력은 ‘비밀책’이다. 서점 주인이 고른 책을 종이로 감싸고, 표지 대신 책 속의 한 문장을 손글씨로 남겨둔다. 그 문장만 보고 책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곳은 포장도 멋지다. 박스에 소중히 넣어주고 향수도 뿌려준다. 거기에 큼직한 꽃 모양 스티커를 붙여 귀한 선물을 받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나는 책을 구매하면서 비밀책 앞에서 한참 망설였다. 겨우 한 권을 사면서도 우연에 기댄 비밀책과 꼭 읽고 싶은 책 사이에서 선택을 고민했다. 읽을 책이 쌓여 있었던 탓에 결국 우연한 만남은 뒤로 하고 한강 작가의 책을 골라 들었다. 어느 서점에서나 구할 수 있는 한강 작가의 책을 멀리 1시간 여행 간 그곳에서 굳이 골라든 것은 그녀에 대한 일종의 예우이자, 그녀의 책이 더 마음을 끌어당겼다는 뜻이기도 했다.

길을 잘못 들어 30여 분 늦게 도착한 친구를 만나 한강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 나눴다. 좁은 공간이라 다른 손님들에게 공간을 내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 좋은 경험을 독차지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아쉬움을 남기고 서점을 떠날 수밖에 없는 게 이곳의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그래서 팁을 주자면, 붐비지 않은 오후 1시 오픈 시간에 맞춰 방문하는 게게 좋다.

서점 리스본에는 365일 날짜별로 생일책이 있다. (사진=김희연)
서점 리스본에는 365일 날짜별로 생일책이 있다. (사진=김희연)


리스본은 ‘여행 같은 서점’이다.

통상의 서점이나 도서관은 그곳의 공간과 책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는데, 서점 리스본은 가는 여정부터 즐거웠다. 아마도 나의 뇌가 여행을 간다고 착각한 듯하다. 여행지 도시의 이름과 독특한 건물의 외형·색감들은 이미 여행지에 온 것처럼 마음을 리부팅 시켜 놓은 듯했다. 여행지에서 우연히 만나는 것들, 미지의 신선함과 모르는 것의 불안함 사이에서의 선택(비밀책), 그리고 나와 연결된 것을 찾았을 때의 반가움(생일책). 여행에서 만나는 이런 경험을 책과 만나는 경험으로 잘 연결한 곳이었다. 그래서 떠나기 전까지는 몰랐던 감정을 돌아오는 길에 곱씹게 되는 기분이 있다.

그곳에서 나는 우연을 선택하는 대신 한강의 책을 골라 들었지만, 그 선택의 순간이 또 다른 우연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연과 필연 사이에는 아무 차이가 없다. 우연이 필연적으로 보이고, 필연이 우연처럼 위장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서점 리스본은 그 자체로 여행이었다. 서울 한복판에서 낯선 도시로 향하는 길을 열어주고, 여행을 떠나고 싶게 하는 서점. 여행지에서 선물을 고르듯 생일책과 비밀책을 고민하는 그 여정은 짧지만 즐거운 여행과 꼭 닮아 있었다.

김희연은 기업전략 컨설턴트다. 씨티은행에서 출발,  현대·굿모닝·신한·노무라 증권의 IT애널리스트를 거쳐 2009년 LG디스플레이로 자리를 옮겼다. 금융·증권·IT·제조 분야를 아우르는 경험을 바탕으로 LG디스플레이 최고전략책임자(CSO)에 올라 전략·마케팅·신사업 발굴·IR을 총괄했다. 퇴임 후엔 AI를 통해 현자 및 석학들과 대화하며 전략·리더십 해법을 탐색하는 <AI스토밍(AI-Storming) 방식> 을 창안했고, 관련 저작권도 갖고 있다. 현재는 이 독창적 방법론을 기반으로 기업과 기관에 <전략 컨설팅> 및 <AI활용 교육> 등을 하고 있다.  ‘AI 시대 공감이 경쟁력’이라는 주제로 쓴  <공감지능시대>라는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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