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혁과 듀플랜티스
1주일 전까지 그전 1주일여간 매일 밤 시간 되는 대로 틈틈이 한가하게 소파에 널브러져 시청한 TV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케이블 TV인 스카이 채널이 중계해준 도쿄 세계육상선수권대회였습니다. 밤에도 환한 스타디움에서 진행된 그 대회는 우리 우상혁 선수가 은메달을 딴 바로 그 대회입니다. 우상혁 선수는 2m 34cm를 넘어 금메달엔 아쉽게도 2cm가 모자랐습니다. 두 다리로 걷는 포유류인 인간이 자기 키보다 훨씬 높은 높이를 넘는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합니다. 아마 인간을 창조한 하느님도 신기하게 생각할 듯합니다. 우상혁 선수의 신장은 188cm입니다.
아마 우상혁 선수가 아니었으면 도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는 언제 시작하고, 언제 끝났는지 모르게 우리를 지나쳐 갔을 것입니다. 도무지 언론이 눈길을 주지 않은 대회였으니까요. 바로 옆 나라인 일본의 도쿄에서 실시했는데도 말입니다. 9월 13일에 시작해서 21일까지 9일간 진행되었습니다.
하지만 세계육상선수권대회는 하계, 동계 올림픽과 월드컵에 이어 세계 4대 대회로 불리는 매우 큰 스포츠 이벤트입니다. 세계육상연맹(WA, World Athletics)이 주관합니다. 하지만 그런 대회 크기에 비해 우리나라에서의 관심도와 인기도는 이번 대회에서도 보듯이 그에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 대회는 2011년 우리나라의 대구에서도 열렸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88 서울올림픽과 2004 한일월드컵은 잘 기억하면서 가장 최근에 열린 그 대회는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대구 대회가 열릴 당시의 인상적인 경기 장면과 출전 선수들도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경보에서 김현섭 선수가 동메달을 하나 땄습니다. 역대 대회 최초의 메달이었습니다. 4위를 했지만 동메달 수상자였던 러시아 선수가 도핑에 걸려 수상한 행운의 메달이었습니다.
이렇듯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관심이 적은 이유는 우리나라 선수들의 활약이 미미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높이뛰기의 우상혁 선수를 제외하고는 그 클래스에 도전할 만한 선수는 현재 전무하다고 봐야 합니다. 그만큼 세계 수준의 벽이 높은 것입니다. 대구 대회 이후 메달을 딴 선수도 우상혁 선수가 유일합니다. 2022년 미국 오리건주의 유진에서 열린 대회에서 은메달을 땄고 지난 16일 도쿄에서 또 같은 색의 메달을 딴 것입니다. 이 3개가 우리나라가 세계육상대회에서 딴 메달의 전부입니다. 그만큼 스마일 점퍼 우상혁은 대단한 선수입니다. 육상의 불모지인 우리나라 육상계에서 유일하게 세계 톱클래스의 기량을 보이고 있으니까요. 한때는 마라톤에서 황영조, 이봉주 선수가 메달권으로 강세를 보였는데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이후로는 맥이 끊겼습니다.
육상에서의 희소함과 열세는 일본도 중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특히 올림픽이든 아시안게임에서 메달을 휩쓸어가는 중국이지만 이번 대회에서 중국은 은메달 2개, 동메달 2개로 22위에 그쳤습니다. 금메달을 단 한 개도 따지 못한 것입니다. 개최국인 일본은 더 심합니다. 동메달 2개로 40위에 그쳤으니까요. 우리나라는 우상혁 선수 덕에 27위를 마크했습니다. 메달 색깔 순위로 본 결과입니다. 이것으로만 보면 육상은 동양인, 황인종에 절대적으로 불리한 게임으로 보입니다. 육상이 원하는 피지컬 측면에서 백인, 흑인에게 밀린다는 것입니다. 이 정도로 희소하다면 그것은 노력이나 투자 부족만으로는 보기 어려울 것입니다.
이번 도쿄 대회의 우승국은 미국이고, 2위는 케냐입니다. 미국은 단거리 육상에서, 케냐는 중장거리 육상에서 독보적이라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 두 나라는 2011년 우리나라의 대구 대회에서도 같은 순위를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역대 대회의 메달을 모두 합쳐도 미국이 1위, 케냐가 2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데이터가 있는 과학으로 , 케냐는 사자가 있는 자연으로 인해 육상 강국이 되었을 것입니다.
제가 이번 도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TV 리모컨만 잡았다 하면 보게 된 것은 흥미진진해서입니다. 그것은 당연합니다. 해야 될 일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데 그렇게까지 우선적으로 볼 일은 없을 테니까요. 제 몸이 부족하고 오래된 것과는 별개로 인간 신체 능력의 최고점, 최대점을 보여주는 육상이 매력적이라 그랬습니다. TV의 트랙에서 자메이카의 우사인 볼트는 사라졌지만 미국의 노아 라일스의 역주를 보면 엔도르핀이 솟습니다. 그를 비롯한 우승자들의 쇼맨십이 가미된 세리머니를 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이젠 육상도 패션의 시대가 되어 트랙과 필드에 올라선 선수들은 모두 패션쇼의 런웨이에서 경기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88 서울올림픽 때는 그리피스 조이너만이 패셔니스타였는데 지금은 여성 선수들은 물론 남자 선수들도 자기의 개성을 패션을 통해 분출하곤 합니다.
그래도 이번 도쿄 대회의 MVP를 뽑자면 장대높이뛰기에서 군계일학의 기량을 보여준 스웨덴의 듀플랜티스일 것입니다. 미국의 여자 단거리 스타인 멜리사 제퍼슨이 100m, 200m, 4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차지해 3관왕으로 메달 점수로는 1등이겠지만 메달이 하나뿐인 장대높이뛰기에서 듀플랜티스가 넘은 기록은 인간이 해낼 수 없는 경지에서의 세계 신기록을 수립했기 때문입니다.
듀플랜티스는 6m를 넘어가면서는 아무도 경쟁자가 없는 상태에서 혼자서 게임을 이어갔습니다. 금메달을 확보한 상태에서 그 자신과의 싸움을 해나간 것입니다. 결국 그는 이전 그의 최고 기록인 6m 24cm를 넘어선 6m 30cm로 이전의 그를 물리치고 진정한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업그레이드된 인간새가 된 것입니다. 20세기엔 절대지존 세르게이 붑카가 인간새로 날리고 날아다녔다면 21세기는 듀플랜티스의 시대가 된 것입니다. 1993년 붑카가 세웠던 기록은 6m 15cm였습니다. 과거엔 붑카도 듀플랜티스처럼 경쟁자가 없어 그 자신의 세계 기록을 계속해서 깨나갔었습니다.
대회를 보면서 한 가지가 궁금했습니다. 올림픽에서 육상 종목인 달리기 10km가 포함된 철인3종 경기가 있나 없나 살펴본 것입니다. 예상대로 없었습니다. 달리기가 들어가 있다고 해서 수영과 사이클 경기까지는 진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계육상대회는 마라톤과 경보, 이 두 종목을 제외하고는 오로지 스타디움 안 필드와 트랙에서 모든 경기가 진행됩니다. 대신 철인경기로는 남자는 10종 경기(decathlon)가 있고 여자는 7종 경기(heptathlon)가 있습니다. 순수 육상으로만 구성된 다종목의 경합을 통해 우승자를 가리는 것입니다. 더 빨리 뛰고, 더 높이 넘고 던지고, 더 멀리 뛰고 던지고 등의 종합 기량을 기록이 아닌 각각 개별 종목에 부과된 점수를 합산해서 순위를 가리는 경기입니다.
어찌 보면 세계육상선수권대회는 고대올림픽과 닮았습니다. 고대올림픽을 계승한 근대올림픽보다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오히려 더 고대올림픽을 닮아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올림픽 정신이나 이상을 떠나서 대회 참가 종목이나 진행 모습을 보면서 느낀 점입니다. 근대올림픽은 출전하는 종목이 갈수록 늘어나고 다양해져 육상이 메인이었던 고대올림픽과는 점차 멀어져 가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최근 들어서 올림픽을 주관하는 IOC는 카드 게임인 브리지, 바둑, 체스를 정식 스포츠로 인정했습니다. 스포츠 본연의 피지컬 능력을 다루지 않는 마인드 스포츠도 스포츠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올림픽에 이런 종목들이 언젠가는 들어갈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아시안 게임에서는 바둑과 브리지가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었습니다. 2023년 항저우 아시안게임에선 재벌가인 현대해상 정몽윤 회장의 사모인 김혜영 현 한국브리지협회장이 참가해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물론 동계올림픽은 고대올림픽 종목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종목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고대올림픽이 육상만 있었다는 아닙니다. 격투기인 레슬링과 복싱, 그리고 두 종목을 합친 판크라티온(pankration) 등은 육상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당시 이 종목들은 상대가 항복할 때까지 싸웠습니다. 그래서 경기 중 선수가 죽기도 했습니다. 패자가 감수해야 할 불명예와 굴욕감이 워낙 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을 사용한 전차와 경마 경주가 있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마상 경기의 우승자는 기수가 아니라 마주였습니다. 영화 <벤허>에서 하이라이트인 전차 경주 시 마주가 비중 있게 나오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 기인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격투기와 마상 종목을 제외하고는 모두 육상 경기였습니다. 공을 가지고 하는 경기인 구기는 없었습니다. 달리기로는 단거리, 중거리, 장거리 경기가 모두 있었습니다. 단거리 중에 스타디온(stadion)이라는 경기는 190여m를 달리는 경기인데 이것은 고대올림픽의 창시자인 천하장사 헤라클레스가 숨 안 쉬고 한 번에 달릴 수 있는 거리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래서 파운더인 그를 기리기 위해 스타디온은 초대 올림픽인 기원전 776년부터 채택된 종목이었습니다. 그 스타디온에서 오늘날 경기장을 뜻하는 스타디움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경기는 100m 달리기로 바뀌었을 것입니다. 아버지가 제우스라 절반은 신인 헤라클레스에서 신의 몫만큼을 뺀 거리인 듯합니다.
그리고 던지기 종목으로 창던지기, 원반던지기가 있었고 멀리뛰기가 있었습니다. 이것들을 결합한 철인5종 경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있을 법한 마라톤은 없었습니다. 마라톤은 올림픽이 300년 가까이 진행되던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전쟁 당시 승전보를 전하러 뛰어온 병사에게서 유래되었으니까요. 마라톤 평원에서 펼쳐진 전투였습니다.
그렇듯이 고대올림픽의 주종목은 압도적으로 육상이 많았습니다. 기원 전 5세기 미론의 조각인 <원반 던지는 사람>이나 그리스의 테라코타 항아리에 그려진 그림에서도 육상 선수들의 모습이 가장 많이 보입니다. 르네상스기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렇게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인간 신체의 모습을 <비트루비안 맨(Vitruvian Man)>이란 작품을 통해 보여주었습니다. 모두가 바디의 균형과 아름다움이 보이는 작품들입니다. 그렇듯 신체의 최대 능력을 보여주는 스포츠가 바로 육상 경기입니다. 이번 도쿄 세계육상선수권대회의 트랙과 필드에서 계속 보이던 선수들의 모습입니다. 위에서 선수들의 패션을 언급했지만 실제 유니폼도 갈수록 신체를 강조하는 쪽으로 가는 듯해 보입니다. 그렇게 점점 더 고대올림픽을 닮아가는 세계육상선수권대회입니다.
종합스포츠제전이라 불리는 올림픽이 있지만 그 올림픽을 구성하는 개별 종목들은 이렇게 세계선수권대회를 엽니다. 종목마다 각각의 스포츠협회가 있어서 그곳에서 해당 스포츠의 세계 대회를 주관하는 것입니다. 수영이든, 유도이든, 사격이든 말입니다. 도쿄 세계육상선수권대회가 열리기 바로 전 우리나라 광주에선 2025 세계양궁선수권대회(9/5~12)가 열렸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로 세계육상연맹이 주관하는 육상 대회가 종목이 많다 보니 개별 종목 중에선 가장 큰 세계 대회로 그 권위를 인정받고 있는 듯합니다. 세계 4대 스포츠 대회로 말입니다. 물론 FIFA가 주관하는 축구의 월드컵은 논외입니다. 월드컵은 대회 규모와 예산에서 올림픽을 능가하기도 하니까요.
그런데 그렇게 육상의 역사가 오래됐음에도 세계육상선수권대회는 생각보다 늦은 1983년에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4년마다 한 번씩 열리다가 1993년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대회 때부터 2년에 한 번으로 바뀌었습니다. 차기 대회는 2027년 베이징에서 열립니다. 그땐 우리의 우상혁 선수가 대회 최초로 금메달을 목에 걸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나라는 물론 아시아를 대표해서 말입니다.
하광용은 대학 졸업 후 오리콤, 이노션 등에서 광고인 한 길로만 가다가 50세가 넘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상사 이때 저때, 이곳 저곳, 이것 저것, 이사람 저사람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이 많다. 박학다식한 사람은 깊이가 약하다는 편견에 저항한다. 그래서 그는 르네상스적 인간을 존경하고 지향한다. 박학과 광고는 어찌보면 ‘넓다’라는 측면에서 동일성을 지닌다. 뉴스버스 연재 에세이를 추려 인문교양 에세이집을 출간한 그는 태평양인문학교실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아래는 하 작가의 책 '테이크아웃 유럽예술문화', '테이크아웃 유럽역사문명', '테이크아웃 일본근대백년' 소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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