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자영 개인전 '이름없는 정원, 서울 떼아트갤러리서 25일까지
여름이 한풀 꺾였다. 거리로 나서면 목덜미에 올라탄 듯한 후끈한 열기는 없다. 저녁 하늘만 보면 맑고 투명한 초가을이다.
알베르 카뮈의 소설 <결혼·여름>이 지닌 문장은 시간이 흘러도 나이 먹지 않는다. 소설 속 여름을 지나며 만난 고자영(54)작가가 화면에 남긴 붓질은 활달하며 감각적이며 친근하다.
황석영 소설 <오래된 정원>은 두 남녀 주인공의 추억이 깃든 시골 마을 갈뫼를 배경으로 한다. 그들이 끊임없이 서로 되뇌이는 것은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라는 질문이다. “풍경은 움직이지 않고 대기가 그냥 고여 있는 듯한 정적 가운데서도 느닷없이 풀숲으로부터 메뚜기나 방아깨비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 길 건너편으로 가로질러가요. 개구리가 논두렁에서 물속으로 퐁당 뛰어들기도 하구요. 갈뫼의 여름은 살아있는 것들의 대합창이 연주되고 있는 듯 했지요.” (p.227)
고자영의 정원
갈뫼라는 곳이 소설가가 만든 가공의 장소이듯 고자영의 정원(庭園)은 햇빛·바람·비·숲이 만들어 낸 실루엣과 사물을 관객이 그러한 게 ‘~그렇다’라고 느끼게 표현한 장소이다. 감각적 ‘일루젼(illusion)'이다.
고자영은 경기도 용인 한택 식물원, 학교의 작은 연못, 도심 속 하천변 잡초와 이름모를 꽃들을 대상 삼고 모티브로 한 정원을 만든다. 2008년과 2010년 개인전 타이틀이 <한택 소요>이며 ‘이동식 정원’ 시리즈를 발표하였다. 60X60cm(15호) 동일한 크기의 연작으로 이동하며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정원이라는 의미이다.
대상과 대상이 유기적으로 흐르는 듯한 몽환적인 분위기는 햇살을 거스르며 정지된 채 일렁이는 바람 길이 있어서 이다. 색채의 중첩은 마치 물속을 들여다 본듯 비쳐지는 '투영(透映)'이기도 하다. 정원에 핀 식물은 여름이 영원할 듯 생명력이 넘친다. ‘정원’에서 유추되는 언어적 감각을 따라가 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
고자영은 2011년부터 자연의 사계(四季)를 그리며 삶의 유년기·청년기·장년기·노년기를 비유하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바니타스(Vanitas)를 얘기한다. 바니타스는 ‘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경구에서 유래한다. 17세기 네덜란드(플랑드르) 지역에서 유행한 정물화 장르가 되었다. 삶의 덧없음을 상징하는 해골, 책, 촛불, 꽃, 보석 등이 주요 제재이다. 꽃은 곧 시들 수 있어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를 뜻한다.
소설 <오래된 정원> 도입부에는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1898~1956)의 시 '아, 어떻게 우리가 이 작은 장미를 기록할 것인가?'가 나온다.
“아, 우리가 장미를 찾아온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가 왔을 때, 장미는 거기에 피어 있었다. 장미가 그곳에 피어 있기 전에는 아무도 장미를 기대하지 않았다. 장미가 그곳에 피었을 때는 아무도 장미를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아, 출발도 한 적 없는 것이 목적지에 도착했구나. 하지만 모든 일이 워낙 이렇지 않았던가.”
정원의 식물과 꽃은 화면 밖 관객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당신의, 당신은 나의 시간을 살아보지 않았기에 우리는 완전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브레히트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장미를 만났다’가 중요하듯 그림 앞에 관객이, 관객 앞에 정원, 꽃, 식물 그림이라는 게 중요하다.
“브레히트의 '소격효과(Verfremdungseffekt)'는 연극에서 보여질 정해진(?) 인과 관계를 해체하고, 일상적이고 당연한 것을 낯설게 만들어 사건의 본질을 재인식하게 만드는 방식이다.”(김정락 미술사가 2023. 8. 5 페이스북)
연극 무대의 장치와 구조는 벽체에 걸린 그림에 있다. 극은 식물원, 정원, 온갖 식물들, 아이, 구관조의 각본 없는 연기에 따른다. 라틴어 '테아트룸 먼디(Theatrum Mundi)'는 ‘인생극장’을 뜻한다. 중세까지 계승되어 그리스도의 생애를 의례화한 가톨릭 전례(미사)도 하나의 극장이 되었다. 고자영 정원을 마주보는 관객은 각자의 인생극장을 되돌아 보는 의식, 소격효과를 경험한다.
자기만의 정원
메타버스(Metaverse·가상현실) 시대, 회화 이미지도 디지털 공간에서 소비된다. 디지털 사회는 공간(space)에서 중요한 장소성(placeness)을 사라지게 했다. 물리적인 거리로 인식되는 장소(place) 개념이 없어지면서 벌어진 일이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1941년~)는 ‘건축은 터를 읽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노르웨이 건축 이론가 슐츠(Christian Norberg-Schultz)는 이 터의 장소성을 ‘제니우스 로사이(Genius Loci)’, 곧 ‘장소의 혼’이라 했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장소의 혼을 찾아 유목민처럼 떠돌기도 한다.
작가가 선택한 그 장소의 혼이 깃든 고자영만의 ‘정원’ 이미지, ‘타입폼(typeform)’은 형식과 의미를 구조적으로 매개한다. ‘정원’은 화폭 안이든 화폭의 바깥이든 솔리드(solid·고정된 형태)와 보이드(void·빈 공간) 사이를 오간다.
그 사이 길은 1995년 6월 29일 500여명이 사망한 서울 삼풍백화점 붕괴 30분 전에 그곳에서 나온 곳, 장소이기도 하다. 작가는 건물을 벗어나 살아있다는 의식으로 직전 공간의 내부에서 그 이면(곧 닥쳐올 아비규환의 떼죽음)을 되돌아본, 목숨을 잃을뻔한 기이한 경험을 한 것이다.
언뜻언뜻 일상과 비일상의 부딪힘은 존재와 부존재를 병치시키며, 경계와 흔적이라는 철학적 명제와 맞부닥치기도 한다. 곧이어 닥친 사회경제적 재난으로 잠시동안 집도 작업실도 없어 화면 속에 가상의 장소를 만들고 싶은 열망이 작업의 동기가 되기도 했다.
여름의 절정을 지나며 쓰기 시작한 이 글 서두에 알베르 카뮈를 소환하였다. 카뮈는 작품 ‘티파사에 돌아오다’에서 “사랑받지 못함은 단지 불운에 그치지만, 결코 사랑하지 못함은 불행이다. 우리 모두 오늘날 그 불행 때문에 죽어가고 있다”고 썼다.
고자영은 말한다. “어차피 불완전한 존재들이여! 살아있으면 나의 정원으로 오라!” 고자영 개인전 <이름 없는 정원>은 또 다른 인생극장을 펼치는 김성민 개인전 <함께>와 더불어 서울 종로구 평동 떼아트 갤러리에서 8월 25일까지다.
심정택은 2009년 상업 갤러리(화랑) 경영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국내외 45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했다. 그 이전 13년여간 삼성자동차 등에 근무하였고 9년여간 홍보대행사를 경영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기사, 2019년 4월부터 작가 및 작품론 중심의 미술 칼럼 270여편, 2019년~ 2023년, 건축 칼럼(필명: 효효) 160여편을 기고했다. 뉴스버스에는 2021년 창간부터 주1회 미술작가 평론을 게재해왔다. <이건희전, 2016년> 등 3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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