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프랑크-신성로마제국-프로이센-독일제국

베를린의 첫인상은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는 달라 보입니다. 통상적으로 기대하는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한 유럽스러움을 찾아보기 힘들어서 그렇습니다. 중후장대, 평평한 지대에 일자로 뻗은 길은 지나치게 넓고, 건물은 큼직큼직하며, 도심 공원이라고 조성한 숲은 끝을 가늠하기 힘듭니다. 그래서 파리처럼 이국적이거나 런던처럼 멋스럽지 않은 것입니다. 마치 히틀러의 명을 받은 알베르트 슈페어가 설계하다 그친 제3제국의 수도인 게르마니아가 실제로 건축된 것과도 같은 베를린의 모습입니다. 그 넓은 길 끝에 거대한 문이 하나 서있습니다. 그 문은 번영의 시기에 평화를 기원해서 만들었지만, 도시의 침략자에겐 개선문으로 사용되었고, 도시의 수복자에겐 승리의 문으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분단의 문을 거쳐 오늘날엔 자유와 통일을 상징하는 문이 되었습니다. 그 이름도 장엄한 브란덴부르크 문입니다.

독일 수도 베를린의 랜드마크 브란덴부르크 문
독일 수도 베를린의 랜드마크 브란덴부르크 문

유럽의 역사는 복잡합니다. 좁은 대륙에 많은 민족이 살고 있는데 역사적으로 사람들이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 이동하며 흥망성쇠를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그들 중에서도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등이 속한 중부유럽의 역사는 더욱 복잡합니다. 개별 국가는 국가대로 존립하면서 특정 가문이나 동맹이 여러 국가에 걸쳐서 별도의 영향력을 행사했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과 신성로마제국이 바로 그들입니다. 영국이나 프랑스 등에서는 볼 수 없는 역사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은 476년 멸망한 서로마제국에 대한 향수로 태어났습니다. 유럽의 동쪽엔 동로마제국이 여전히 건재한데 서쪽엔 그에 대항할 만한 로마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962년 이탈리아 왕국을 정복한 동프랑크 왕국의 오토 1세에게 교황 요한 12세는 로마 황제의 왕관을 씌워주었습니다. 카톨릭의 여러 세속 군주들 중 드디어 적임자가 나타났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 이전인 800년에도 교황은 프랑크 왕국의 카롤루스 대제에게 로마 황제의 왕관을 씌워주었습니다. 하지만 그 로마는 대를 잊지 못하고 바로 끊어졌습니다. 그런데 오토 1세의 로마는 달랐습니다. 그 후 844년간이나 지속되었으니까요.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의 탄생입니다. 본래는 교황이 오토 1세를 로마인의 왕으로 인정한 것인데 그것이 씨가 되어 훗날 신성한 로마제국이 되었습니다. 이런 이유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세속 군주들 중 서열 넘버1로 추대되었습니다. 아마 교황이 왕들을 소집하면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았을 것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의 최대 영토 (13세기 중엽)
신성로마제국의 최대 영토 (13세기 중엽)

그런데 이 신성로마제국은 우리가 알고 있는 통상적인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황제는 있지만 그 영토와 백성이 불분명한 제국이었습니다. 수도도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리고 황제의 자리도 세습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황제는 제국에 속한 제후국들의 선제후와 주교들이 제국의회에서 선거로 뽑았습니다. 그렇게 선출된 황제가 머문 곳이 주로 수도 역할을 하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엔 선제후국을 비롯하여 무려 1,500여개의 국가나 도시들이 속해 있었습니다. 원톱인 황제 아래의 제후국으로 왕이 다스리는 왕국과 공작이나 백작이 다스리는 공국이나 백국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크고 작은 자유 도시와 주교가 다스리는 도시, 그리고 기사단의 도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복잡하고 다단한 제국이었습니다. 로마제국을 표방하기에 수도를 로마로 고정하는 것이 맞았지만 당시 로마는 교황의 자치령으로 되어있어 그것은 불가했습니다. 로마는 1871년 이탈리아가 통일되며 비로소 교회에서 국가로 이전되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에서 가장 많은 지역을 다스린 권세가는 합스부르크 가문이었습니다. 당연히 영향력이 셀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합스부르크의 본거지인 비엔나는 어느 도시가 수도가 되든 실질적인 수도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 다음으로 오늘날 독일 지역의 선제후국들이 많은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호엔촐레른 가문의 브란덴부르크를 비롯하여 작센, 바이에른, 쾰른, 하노버, 마인츠, 트리어 등이 황제 투표권이 있는 선제후국으로 힘을 발휘했습니다. 즉 신성로마제국은 오늘날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동맹이고 연합체였습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는 독일과 지분이 섞여있는 신성로마제국보다는 오롯한 그들의 뿌리인 합스부르크를 더 내세웠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향력은 스페인과 네덜란드 등 신성로마제국 밖에서도 영향력을 발휘했으니까요. 가히 중부유럽의 최강자였습니다.

중부유럽의 많은 국가와 지역의 연합체인 신성로마제국
중부유럽의 많은 국가와 지역의 연합체인 신성로마제국

반면에 독일은 절대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후예임을 자처했습니다. 그 뿌리인 동프랑크 왕국을 독일의 모태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프랑크 왕국은 위의 카롤루스 대제 이후 동프랑크는 독일로, 중프랑크와 서프랑크는 프랑스로, 그리고 남프랑크는 이탈리아로 분열되었습니다. 이렇게 유럽의 주요 국가들을 탄생시켜 유럽의 아버지라 칭송받는 카롤루스 대제입니다. 언급한 신성로마제국이라는 국호는 독일에서 최초로 공식화했습니다. 1512년 쾰른 제국의회에서 확정했습니다. 훗날 히틀러는 그가 다스리는 독일을 제3제국이라 칭하며 신성로마제국을 제1제국이라 불렀습니다. 독일이 유럽을 지배한 최초의 시기로 본 것입니다. 신성로마제국은 1806년 멸망되었습니다. 그 이전 프랑스의 계몽주의자인 볼테르에 의해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며, 제국도 아니다"라 불린 제국이 역시 프렌치인 나폴레옹에 의해 멸망한 것입니다. 해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신성로마제국 내에서 독일의 위상이 견고해지며 독자적인 통일 운동이 시작됩니다. 크고 작은 1,500개의 제후국과 도시를 통합하는 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통일의 초석은 베를린을 수도로 한 호엔촐레른 가문의 브란덴부르크 백국이 놓았습니다. 오늘날 폴란드에 걸쳐있던 프로이센 공국과 1618년 동군연합으로 대통합의 물꼬를 튼 것입니다. 동군연합은 한 왕이 두 국가를 다스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브란덴부르크의 왕이 프로이센 공국을 함께 다스렸습니다. 그렇게 동군연합을 지속하며 호흡을 맞춘 두 국가는 1701년 프로이센 왕국이란 한 국가로 통일이 되었습니다. 북부 독일에 한정되었지만 역사적인 첫 통일을 이룬 것입니다. 이런 방식의 통일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사후 후사가 없던 잉글랜드가 1603년 스코틀랜드와 동군연합을 거쳐 1707년 그레이트브리튼(GB) 왕국 한 나라로 통합된 것과 같은 방식이라 하겠습니다. 프로이센 공국은 십자군전쟁 시 튜턴기사단이라 불린 독일기사단의 후예들이 세운 나라였습니다. 

1701년 독일의 통일은 브란덴부르크 공국이 주도했음에도 프로이센 공국의 위치가 신성로마제국 밖에 있었기에 통합 국가명이 프로이센 왕국이 되었습니다. 브란덴부르크가 신성로마제국의 일원이었기에 그 영역을 벗어난 국가와 합치면서 독립적인 이름을 쓸 수 없던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독일사에서 프로이센 왕국은 브란덴부르크 왕국으로 불리고 있을 것입니다. 역시 수도도 그런 이유로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가 되어 왕의 대관식은 그곳에서 열렸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수도는 브란덴부르크 공국의 수도인 베를린이 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렇게 베를린은 프로이센 왕국의 수도가 되며 비약적으로 발전해 오늘날 독일의 수도가 된 것입니다. 

독일 북부 통일을 이룩한 프로이센 왕국 (19세기 초)
독일 북부 통일을 이룩한 프로이센 왕국 (19세기 초)

독일기사단의 도시 쾨니히스베르크는 독일 최고의 철학자인 칸트가 태어나고 평생 단 한 번도 떠나지 않은 유서 깊은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도시는 소련에게 양도되었습니다. 이미 1차 세계대전의 패배로 그 사이엔 폴란드가 독립해 있어서 독일과는 육로가 끊어져 그 지역은 동프로이센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엔 도시 이름도 칼리닌그라드로 바뀌어 독일 지명인 쾨니히스베르크는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독일은 왕의 언덕을 뜻하는 이 도시를 언젠가는 되찾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을 것입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이 시기인 1791년 도시의 랜드마크로 세워졌습니다. 프리드리히 2세는 평화를 염원하며 문을 건축했습니다. 하지만 신성로마제국을 무너트린 나폴레옹은 1806년 이 문을 통해 베를린으로 입성해 개선문으로 사용을 하였습니다. 그는 파리로 돌아갈 때 브란덴부르크 문위에 있는 마차 탄 여신상을 떼어갔습니다. 하지만 그가 실각하자 파리를 점령한 프로이센은 그 여신상을 다시 찾아와 문 위에 올리고 승리의 여신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후 냉전 시기 베를린은 둘로 나뉘어 동서독의 국민들은 이 문을 통해서만 서로 왕래를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 양옆으로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며 브란덴부르크 문은 굳게 닫혔습니다. 이윽고 1989년 동독이 무너지며 독일이 통일되자 브란덴부르크 문은 독일은 물론 전 세계의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문이 되었습니다. 근대 이후 현대까지 독일의 고난과 영화를 함께 해온 브란덴부르크 문입니다.

프로이센 왕국이 세워지고 1740년 한 현명한 군주가 등장합니다. 통일의 기틀을 마련한 계몽군주라 불리는 3대 왕 프리드리히 대왕입니다. 그는 조선이 세워지고 4대 왕으로 출현한 세종대왕과도 같은 군주였습니다. 독일 역사에서 유일하게 대왕으로 불리고 있는 것도 같다 하겠습니다. 베를린에서 태어난 그는 영국보다는 늦었지만 산업혁명을 받아들여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 복잡한 국토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제후국과 도시마다 저마다 믿고 있던 신구교 갈등을 해소하는 관용정책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인재를 양성하고 보통교육을 전 국민에게 실시하였습니다. 완전한 통일로 가는 국가의 틀을 갖춰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 약소국이었던 프로이센을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와 동등한 유럽 강국의 반열에 올려놓았습니다.

독일 통일의 초석을 놓은 프로이센 왕국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대왕 (1712~1786)
독일 통일의 초석을 놓은 프로이센 왕국의 계몽군주 프리드리히 대왕 (1712~1786)

프리드리히 대왕의 대외적인 치적은 오스트리아와 치른 두 번의 전쟁을 모두 승리한 것입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1740~1748)에서 승리해 슐레지엔 지역을 확보했고, 그 전쟁으로 왕위에 오른 마리아 테레지아 대제와 슐레지엔을 놓고 치른 리턴매치인 7년 전쟁(1756~1763)에서도 또 승리했습니다. 건축에도 관심 많았던 그는 베를린 근교 포츠담에 아름다운 여름 궁전인 상수시 궁전을 건축했습니다. 프랑스의 베르사유 궁전을 본떠서 지었다고는 하나 규모면에선 비교가 안 되어 그의 검소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도자기를 비롯하여 동양에 관심이 많았던 시대인지라 정원에 중국식 원형 파빌리온을 세운 것이 인상적인 상수시 궁전입니다.

베를린 도심엔 박물관이 모여 있는 한 섬이 있습니다. 도시를 흐르는 슈프레강에 인공섬을 조성해 5개의 주요 박물관과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인해 개신교 교회로 바뀐 베를린 돔이 위치해 있는 섬입니다. 우리 서울의 여의도와 같지만 강폭이 좁아 그렇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그 섬에 있는 구국립미술관(Alte Nationalgalerie)엔 프리드리히 대왕이 모델로 등장하는 그림이 있습니다. 

<상수시 궁전에서 플루트를 연주하는 프리드리히대왕>입니다. 독일의 사실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아돌프 멘첼의 작품입니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가 건축한 상수시 궁전에 사람들을 초대해 그들 앞에서 직접 플루트를 연주할 정도로 예술에도 조예가 깊은 군주였습니다. 그림에선 당시 독일의 풍요로운 상류사회의 모습이 보여집니다. 플루트 솔로에 맞춰 반주를 하고 있는 악단의 피아니스트는 음악의 아버지인 바흐의 아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전 시대이므로 상상으로 그린 역사화입니다.  

'상수시 궁전에서 플루트를 연주하는 프리드리히 대왕', 아돌프 멘첼, 1852
'상수시 궁전에서 플루트를 연주하는 프리드리히 대왕', 아돌프 멘첼, 1852

그 그림 맞은편엔 독일제국 시절 하층민인 도시 노동자의 삶을 묘사한 아돌프 멘첼의 다른 그림이 걸려 있습니다. 시차는 있지만 한 시대의 최상과 최하를 묘사한 그림이 서로 마주 보고 있는 것입니다. 농업에서 공업화로 가고 있는 독일의 모습도 함께 보이는 작품으로 <제철공장>이란 그림입니다. 그림에선 마치 용광로와 사투를 벌이는 듯한 노동자들의 모습이 보여집니다. 그 난리판에서도 오른편 하단의 노동자는 허겁지겁 밥을 먹고 있습니다. 식사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 작업 환경이었을 것입니다. 

'제철공장', 아돌프 멘첼, 1875
'제철공장', 아돌프 멘첼, 1875

상수시 궁전의 샹들리에가 쏟아내는 불빛과 제철공장의 용광로가 내뱉는 불빛은 똑같이 환한 불빛이지만 그 속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화려함과 격렬함, 이것은 그 어떤 뛰어난 군주나 재상도 해결할 수 없는 시대의 간극일 것입니다. 화가는, 아돌프 멘첼은 이 복잡한 시대상들을 단 한 컷의 그림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역사가라면 꽤나 많은 페이지를 할애했을 것입니다. 베를린 구국립미술관엔 이들 그림 이외에도 독일의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인 캐스퍼 프리드리히의 그림을 비롯하여 모네, 마네, 르노와르 등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이 주로 전시되어 있습니다.

멘첼의 <제철공장> 그림을 분명히 좋아했을 한 인물에 의해 독일은 비로소 완전한 통일에 이릅니다. "독일의 당면한 문제는 오직 철과 피로만"을 주장해 철혈재상이라 불리는 비스마르크의 등장입니다. 그 역시 브란덴부르크 출신입니다. 그는 1848년 독일에서 일어난 3월혁명의 반혁명 전선에 서며 1862년 수상에 취임하였습니다. 그리고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썼습니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건국 때부터 이어 온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와 900년 가까운 인연을 완전히 끊어냈습니다. 독일의 완전한 통일에서 오스트리아를 배제한 소독일주의를 채택하고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독일의 통일을 바라보던 오스트리아는 헝가리와 대타협을 통해 1867년 별도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을 출범시켰습니다. 마지막 합스부르크 왕조입니다. 

1870년 프로이센 왕국은 프랑스와 알자스와 로렌 지방을 놓고 전쟁을 벌였습니다. 보불전쟁이라 불린 이 전쟁에서 승리하며 프로이센 왕국은 독일제국(Deutsches Reich)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비스마르크는 그 사실을 만방에 선포했습니다. 1871년 1월 그를 수상으로 임명한 빌헬름 1세의 황제 대관식을 곁들인 독일제국 선포식을 간도 크게 적지인 프랑스의 심장인 베르사유 궁전에서 거행한 것입니다. 아마도 나폴레옹이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하며 벌인 개선식을 떠올리며 거행한 의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만큼 독일의 힘은 세어졌습니다. 프랑스의 작가 알퐁소 도데는 이 시기 프랑스의 아픔을 <마지막 수업>이란 단편소설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래 두 그림은 같은 인물인 빌헬름 1세의 1861년 프로이센 7대 국왕 취임식과, 1871년 독일제국 초대 황제 취임식을 그린 그림입니다.

1861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거행한 프로이센 7대 국왕 빌헬름 1세 대관식, 아돌프 멘첼, 1861
1861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거행한 프로이센 7대 국왕 빌헬름 1세 대관식, 아돌프 멘첼, 1861
1871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거행된 독일제국 초대 황제 빌헬름 1세 대관식, 안톤 폰 베르너, 1875
1871년 베르사유 궁전에서 거행된 독일제국 초대 황제 빌헬름 1세 대관식, 안톤 폰 베르너, 1875

독일제국이 출범하며 동프랑크 왕국, 신성로마제국, 프로이센 왕국을 거치며 따로따로 놀던 1,500여개의 수많은 제후국과 도시들은 이제 하나의 독일 안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훗날 히틀러는 이 시대를 가리켜 제2제국이라 칭했습니다. 제1제국인 신성로마제국을 잇는 영화로운 시대로 본 것입니다. 하지만 독일은 20세기 들어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이어서 2차 세계대전까지 일으켰습니다. 히틀러가 자국의 통일에 만족하지 않고 유럽 전체의 통일을 꿈꾼 제3제국의 모험을 강행한 것입니다. 양차 대전 사이엔 바이마르 공화국의 시대도 있었습니다. 그 결과 통일된 독일은 다시 분열의 시대로 되돌아갔습니다. 베를린의 중심 브란덴부르크 문 위의 여신은 승리의 여신(Victoria)으로 부르고 있지만 본래는 평화의 여신(Eirene)이었습니다.

하광용은 대학 졸업 후 오리콤, 이노션 등에서 광고인 한 길로만 가다가 50세가 넘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상사 이때 저때, 이곳 저곳, 이것 저것, 이사람 저사람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이 많다. 박학다식한 사람은 깊이가 약하다는 편견에 저항한다. 그래서 그는 르네상스적 인간을 존경하고 지향한다. 박학과 광고는 어찌보면 ‘넓다’라는 측면에서 동일성을 지닌다. 뉴스버스 연재 에세이를 추려 인문교양 에세이집을 출간한 그는 태평양인문학교실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아래는 하 작가의 책 '테이크아웃 유럽예술문화',  '테이크아웃 유럽역사문명', '테이크아웃 일본근대백년' 소개 영상.

 

이 기사와 뉴스버스 취재를 자발적 구독료로 후원합니다.
후원금 직접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신한은행 140-013-476780 [예금주: ㈜위더미디어 뉴스버스]

뉴스버스 기사 쉽게 보시려면 회원가입과 즐겨찾기를 해주세요.

저작권자 © 뉴스버스(Newsvers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