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진 작가’하면 떠 오르는 이미지들은 ‘화폭 속 대상 동물과 사람들이 부유한다’이다. 이들은 (한쪽 방향으로) 빙빙 도는듯 상호 관계를 갖지 않고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떠돈다. (포유)동물은 크게 부각되어 가죽과 피부의 질감까지 크게 표현된다. 인간은 단색으로 하나의 유닛(unit)이 되어 화면 곳곳을 떠다닌다. 다른 이들은 다른 방식으로 허진(63·전남대 예술대 학장)을 떠올릴 것이다.

허진 작가 / 제공 = 허진
허진 작가 / 제공 = 허진

작가에 대한 직간접적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이 뒤따르면 작품의 본질은 사라진다. 게다가 이런 저런 경로로 타인들이 생산한 언어(말과 글)들은 이미지에 대한 첫 인상을 흔든다. 시각예술가는 이미 작품으로 모두 보여주었고, 하고싶은 이야기를 하였다. 본령은 작품이다.

15년 여전 허진 작품을 처음 대했을 때 불편했다. 화면에 강하게 각인되어 다가오는 얼룩말을 비롯 생명이 끊어져 이미 박제된듯한 형상들이 보였다. 살이 찢기고 피의 순환이 정지되는 식의 표현을 접해야 비극을 알 수 있는건 아니다. 

변기와 펫트병, 교통표지판, 난초, 의자, 코끼리, 신발 등 상호 이질적 오브제 배치만으로 데페이즈망(depaysement) 기법의 초현실적 특징이 나타난다. 언뜻 산만하며 논리적 이음새가 없는듯 보인다. 작가는 전시를 하다 보면 ‘관객들이 대체로 불편해 한다'는 것 쯤은 안다. 작품 이미지와 현실 사이의 괴리, 작가의 최초 생각과 구현 행위에도 간격이 있다. 

허진의 관객을 무시하는듯한 (전략일 수도 있는) 냉랭함이 결국은 자신의 작품 세계에 관객을 익숙하게끔 만든다. 개인전 서른 여덟 번 동안 스스로 또는 평단에서 시기별로 이름을 붙였다. ‘다중인간’, ‘현대인의 자화상’, ‘익명인간’, ‘유목 동물’등 강한 톤의 유사 주제를 지속적으로 반복해 관객들의 내성을 키웠다. 작업 방향이 흔들리지 않았다.

가계(家系)와 더불어 그에게 숙명은 청각 장애이다. 1964년 영국 밴드 비틀즈가 뉴욕을 처음 방문했다. 그 수개월전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었다. 같은 해 고열병에 이름도 잘 알지 못하는 알약(마이신)을 투여한 게 잘못되었다. 청력의 많은 부분을 상실했다. 비틀즈 음악을 알지 못하고 성장하였다.

허진은 부딪히는 인간 관계에서 사소한 것들도 전부 알아야 하는 노력이 뒤따른다. 상대방과 직접 소통할 때는 계속 물어보지만, 다자간 대화는 힘들다. 소리가 들려도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아 추후 정보와 자료를 찾아보게 된다. 

1969년 7월, 미국 우주선 아폴로11호가 달에 착륙하였다. 흑백 텔레비전에 비친 우주인들은 달 표면을 퐁당퐁당 뛰어다녔다. 무중력의 소리 없는 공간이 허진에게 체화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늘 사람에 집중한다. 상대 입 모양을 살피다 보면 사람을 관찰하게 된다. 동물에게는 없는 인간만이 가진 표정이 신기하였다. 언어(로고스) 중심과는 다른 방식의 감각 세계를 구축하였다.

입시에서 석고 데생은 공통이었고, 동양화와 수채화 선택 중 수채화를 선택하였다. 사회적으로 서양화가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 허진은 1981년 미대 회화과에 입학해 2학년 때 동양화를 선택했다.

“화면을 꽉 채우고 싶었다. 동양화의 가장 큰 특징인 여백을 살리는 게 아니라 화면 전체를 형상으로 넘치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싶은 게 너무 많았다. 크고 작은 패널을 여러 개 짜서 이미지를 그려 넣고 조합했다.”

‘네쿠아쿠암 바쿰(Nequaquam vacuum)', ‘빈 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을 지닌 라틴어 옛말이다. '호로르 바쿠이(Horror vacui)'라고도 한다. 빈 공간을 채워 넣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이다. 작품 속 의미 체계, 기호, 상징, 알레고리 등의 맥락을 찾아내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작가는 시각적으로 모든 것을 관장하는 '파놉티콘(panopticon)'의 세계에 있다.

묵시(默示)5, 200x 300cm 여러 종이에 수묵채색 1989
묵시(默示)5, 200x 300cm 여러 종이에 수묵채색 1989

"20대 중반에 게오르그 바젤리츠 작품에 충격 받았다. 작가 브랜드는 거꾸로 선 인간의 형상이다. 처음엔 어설프게 느껴졌는데 여러 번 보니 힘이 있었다. 화면에 자유자재로 대상들을 종횡무진 배치하고 싶다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1990년 타이틀 ‘묵시’로 첫 개인전을 가졌으며 1991년 전남대 전임 교수로 임용되었다.  만 서른이  되지 않았다. 1995년 제1회 한국일보 청년 작가 초대전에 <다중인간 레디 고!!>로 한국화 부문 우수상을 받았다. 

2001년 7번째 개인전 타이틀은 "익명인간"이었다. 작가는 무작위로 대상을 선택하고 그들을 서로 중첩시킨다. 평면의 공간 뼈대를 구성한 다음, 빈 공간들을 세밀하게 입체적으로 꼭꼭 눌러(점묘 기법) 배치한다.

익명인간- 구몽 291x116cm 한지에 수묵채색 2002
익명인간- 구몽 291x116cm 한지에 수묵채색 2002

2005년 일본 교토 노무라 미술관 초청 전시에 갔다. 인근 도시 나라(奈良)에서 사슴을 놓아 기르는 모습에 놀랐다. 그는 사파리 관람 형식의 동물원에서 자연과 인간, 문명의 공존을 보았다.

2006년 전시 ‘유목동물+인간-문명 2006’에서는 산양과 낙타, 얼룩말 등을 화면 가득 배치하고 흑백의 인간군상, 휴대전화, 마이크 등 문명의 이기와 일상 소품을 등장시켰다. ‘유목동물’은 인간과 가까운 가축이다. 초원과 삼림이 터전으로 자연 생태계에서 공존할 수 없는 야생동물들과는 구분된다. 과학기술 발전 중심의 문명이 동물-인간 공생 관계를 깨뜨린다는 인식이 점차 강해졌다. 

2008년 서울시 동대문 운동장 (현 DDP) 공사 가림막 공모에 높이 6미터, 길이 1km <동대문의 지역성과 역사성에 관련된 11가지 추억>이 당선되었으나 수개월 뒤 부당하게 철거된 아픈 기억이 있다. 

2009년 ‘허진’전에서 전시작 ‘유목동물+인간’ 시리즈의 화면에는 개 호랑이 얼룩말 기린 등과 특유의 인간 형상들이 등장한다. ‘문명이 양산한 익명의 인간에서 벗어나 자연에 안기자는 생태주의' 메시지가 읽혔다. 인간이 주체가 되어 자연을 대상으로 본 ‘환경’을 넘어선 인식이다. 2011년 성곡미술관 ‘억압된 일탈’전에 ‘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가 처음 등장한다.

유목동물+인간 130 x162cm 한지에 수묵채색 및 아크릴 2010
유목동물+인간 130 x162cm 한지에 수묵채색 및 아크릴 2010

2008년 남농(南農) 허건(許楗·1907~1987)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를 가졌다. 할아버지가 미술사적으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게 안타까워 준비한 전시였다. 허진에게는 늘 수식이 따른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수제자이자 호남 남종화 시조인 소치(小痴) 허련(許鍊·1808~1893)의 고조손, 근대 남화의 대가인 남농 허건의 장손.” 김정희와 허련과 작가가 도대체 무슨 상관 관계인가? 남다른 가계에서 오는 문화적인 유전자 ‘밈(Meme)’이 작동한다는 점은 느끼지만, 그 뿐이다. 자신도 일상과 만나며 작업하는 이 시대의 작가이다. “내게 소치와 남농은 친숙하면서 한편으로는 시간 너머 존재이다.”

2015년 '유목과 순환'전, 2016년에만 세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2019년 '기억의 다중적 해석', 2020년 전시 <유목동물+인간>시리즈에서는 문명의 이기는 사라지고 동물과 인간이 가라앉은 색감으로 전개된다.

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 145 x112cm x2개 한지에 수묵채색 및 아크릴 2019
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 145 x112cm x2개 한지에 수묵채색 및 아크릴 2019

본격적인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며 스마트폰, 대형 디스플레이 등 여전한 시각 우위의 문명 발전은 인간이 보는 존재임과 동시에 '듣기도 하는' 존재란 사실을 망각하게했다.

“서구의 정물화는 대상과 주변의 오브제들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질서를 갖추고 셋팅되어 있다. 동양화의 화조화는 꽃과 꽃병을 받쳐주는 테이블과 (씨줄, 날줄이 교차하며 직조된 린넨) 테이블보가 없다. 화면의 어느 방향에서 나뭇가지가 중심부로 튀어 나오는 등 시공간이 혼재되어 있다.”

인간, 동물, 문명 파편, 기호 등이 한 화면에 공존하지만 관계 맺기 없이 놀이동산의 범퍼카가 충돌하듯 튕겨 나온다. 존재들(삶것· things)이 흐트러져 있거나 밀도 없이 흘러가며 중심이 없다. 비논리적이며 부유한다. 선명한 색채와 동일한 인물 유형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화면 속 대상들은 착지할 곳을 잃어버린 무중력 공간의 우주인처럼, 놓일 테이블 없는 화병에 담긴 꽃들처럼 떠돈다.

“점성질의 물감 사용하는 작가들도 동양화의 감각으로 필선을 그린다. 수묵의 유현(幽玄)을 알고 현대적 감성의 채색으로 가야 한다.”

‘유현(幽玄)’은 이치나 정취가 알기 어려울 정도로 깊고 그윽하며 미묘하다는 뜻이다. 보이지 않은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2022년 전시 '뫼비우스적 노마드'의 ‘유목동물+인간문명’ 시리즈는 포유 동물이 주인공이고 인간은 단지 배경 역할만 한다. ‘이종융합동물+유토피아’ 시리즈는 유전공학과 생명공학기술이 생태계에 가져오는 교란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생물학적 용어에서 유래하는 ‘혼성성(hybridity)’을 미학적으로 장르의 혼합, 시공간의 파괴 의미로 가져놓는다. 2023년 전시 '고독과 박제 그리고 부유’는, ‘인간의 기억은 불확실하다’를 전제한다.

2024년 대학 교수가 된 지 33년 만에 2년 임기 학장에 취임하였다. 필자는 작가에게, 오래 재임하였으니 이번이 두번째인지 물었다. 10여년 전에 주변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었기에 처음이라고 했다. 다른 이들에게는 일정한 연차가 되어 맡는 보직도 사회적 편견이 따르면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하다.

유목동물+인간-문명 130 x162cm 한지에 수묵채색 및 아크릴 2025
유목동물+인간-문명 130 x162cm 한지에 수묵채색 및 아크릴 2025

필기구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은)인터펜으로 먹 바탕에 두 개의 펜을 평행되게 긋는 맛을 알았다. ‘필(筆)=붓, 묵(墨)=먹’이라는 사고의 전형을 깨뜨리는 선택이었다. 은행원이었던 작가 부친은 펜으로 쓰는 게 예술이라고 했다. 

작가에게 익명 인간과 유목 동물은 등가(等價) 개념이다. 인간도 지구상의 다양한  무리 가운데 하나의 종(種)이라는 생태학적 사고를 읽을 수 있다. 스스로 ‘장애인과 비장애인’, ‘한국화(수묵과 채색)와 현대미술’, ‘전업 작가와 미술 교육자’, ‘전남(광주와 목포)과 서울’을 오가는 경계인으로 살고 있다. 

“늘 이렇게 흘러 다니고, 영향받고, 그러면서도 뭔가를 하려고 애쓰는 동시대 인간의 대표성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심정택은 2009년 상업 갤러리(화랑) 경영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국내외 45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했다. 그 이전 13년여간 삼성자동차 등에 근무하였고 9년여간 홍보대행사를 경영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기사, 2019년 4월부터 작가 및 작품론 중심의 미술 칼럼 270여편,  2019년~ 2023년, 건축 칼럼(필명: 효효) 160여편을 기고했다. 뉴스버스에는 2021년 창간부터 주1회 미술작가 평론을 게재해왔다. <이건희전, 2016년> 등 3권의 저서가 있다.

이 기사와 뉴스버스 취재를 자발적 구독료로 후원합니다.
후원금 직접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신한은행 140-013-476780 [예금주: ㈜위더미디어 뉴스버스]

뉴스버스 기사 쉽게 보시려면 회원가입과 즐겨찾기를 해주세요.

저작권자 © 뉴스버스(Newsvers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