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여왕과 윈저 성
조선시대 효종이 죽은 후 그의 계모인 장렬왕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를 가지고 신하들이 논쟁을 벌인 것을 예송논쟁(1차, 1659)이라고 합니다. 조정은 두 파로 나뉘어 서인은 1년을, 남인은 3년을 격렬하게 주장했습니다. 논쟁은 서인의 주장대로 1년을 입는 것으로 종결되었습니다. 장렬왕후는 그 후 역사에서 똑같은 논쟁의 주인공으로 또 등장하게 되는데 이번엔 15년 전에 1년간 상복을 입게 했던 효종의 부인인 의붓며느리(?)가 죽어서였습니다. 이때도 조정은 또 두 파로 또 나뉘어 상복 예법에 대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번엔 1년을 주장한 남인이 승리를 거두어 9개월을 주장한 서인에게 역전승을 거두었습니다.
윗 항렬인 장렬왕후가 연거푸 상복을 입게 된 것은 당연히 그녀가 의붓아들인 효종과 의붓며느리보다 더 오래 살아서였습니다. 효종의 아버지인 인조가 아들보다 불과 5세 많은 그녀와 재혼을 해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물론 친부모가 죽었다면 논쟁 없이 3년간 상복을 입혔을 것입니다. 이렇듯 조선의 왕실에선 모든 상을 챙겨야 했기에 왕에 따라 평시의 관복보다 상복 입은 기간이 더 긴 시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상복은 평상복 이상으로 잘 만들었을 것입니다. 임시복이라 하기엔 착복 기간과 빈도수가 이처럼 많았을 테니까요. 그런데 상복을 3년을 입든 1년을 입든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했을까요? 친부모가 사망해도 장례가 끝남과 동시에 상복을 벗는 요즘으로 보면 참으로 불가사의하고 한가해 보이는 논쟁입니다. 유교의 폐해였습니다. 그래도 아들이든 며느리든 똑같은 기간의 상복 착복으로 결론 낸 것을 보면 남녀평등은 이룬 것 같습니다.
유교를 믿지 않음에도 1년, 3년이 아닌 40년 동안 상복을 입은 역사 속 인물이 있습니다. 더구나 그는 거대한 나라를 다스리는 제국의 군주였습니다. 그것도 서열상 자기보다 지위가 낮은 신하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왕이 아니고 여왕이었습니다. 19세기, 세계를 무대로 뻗어나가 대영제국으로 불렸던 영국의 군주인 빅토리아 여왕이 바로 그녀입니다. 그녀는 17세 때에 독일에서 영국에 온 외사촌 알버트 공을 보는 순간 첫눈에 반했습니다. 외모지상주의였던 그녀가 잘생긴 그의 얼굴을 보고 푹 빠진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학식과 인품도 훌륭했습니다. 그녀는 1년 후인 1837년에 여왕이 되고 그에게 청혼해 3년 후 결혼에 골인했습니다. 결혼식은 런던의 세인트제임스 궁전에서 거행되었습니다.
당시 그들은 동갑내기로 둘 다 21세였습니다. 빅토리아가 알버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그녀의 일기에 적나라하게 나옵니다. 하지만 결혼 후 실생활은 달랐습니다. 그녀는 그를 닦달하며 고성을 지르며 결혼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좋아하는 것과 대하는 것이 다른 여자였나 봅니다. 그녀의 그런 태도와 행동은 다혈질인 하노버 왕가의 유전 요소에도 기인했습니다. 물론 그녀 개인의 성격도 작용했습니다. 그래도 빅토리아 여왕은 알버트 공에게 그런 태도와 행동을 보일 때마다 조금 지나면 바로 후회했었나 봅니다. 화가 나서 방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간 알버트 공에게 여왕이 아닌 한 여자이고 아내로서 문을 열어달라고 간청했다고 하니까요. 처음엔 "문을 열라" 했다가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한 것입니다. 여느 부부와 다름없는 모습입니다. 여왕은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알버트 공에게 온순한 양이 되어갔습니다. 결혼의 합을 맞춰간 것입니다.
영국 왕실에서 빅토리아 여왕과 비슷한 결혼 케이스로는 그녀와 군주 치세 기간으로 랭킹 1, 2위를 다투다 결국은 70년 재위로 64년의 빅토리아 여왕을 2위로 밀어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있습니다. 그녀는 최근인 2022년 사망했습니다. 엘리자베스 2세는 13세 때 그리스 출신의 해군 사관생도였던 필립 공을 처음 본 순간부터 반해서 결혼의 꿈을 키워갔습니다. 그 역시 빅토리아의 알버트처럼 잘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짝사랑에 빠진 빅토리아는 그 시절 일기를 통해 마음을 드러냈고, 그녀의 고손녀인 엘리자베스는 편지를 통해 그녀의 짝사랑을 표현했습니다. 엘리자베스보다 5년 연상인 필립은 그녀를 처음엔 어린아이 취급했습니다. 하지만 4년 후 윈저 성에 초대되어 17세가 된 그녀가 크리스마스 공연을 하는 모습을 보고는 그도 그녀가 여자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4년 후인 1947년 그 커플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렇듯 영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왕좌에 앉아있었던 두 여왕은 그녀들이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프러포즈를 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둘 다 공주 시절 백마 탄 왕자와도 같은 외국의 잘생긴 왕족을 보고 반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아울러 두 여왕의 남편들은 그녀들의 기대에 부응해 말썽을 안 피우고 외조를 정말 잘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빅토리아 여왕의 치세 기간에 영국은 중흥기를 이루었고, 엘리자베스 2세는 자국민은 물론 영연방의 많은 국민으로부터도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배우자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한가 봅니다. 엘리자베스 2세는 필립 공과 함께 74년의 결혼 생활을 하고 그의 사후 1년 후인 2022년 사망했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알버트 공과 21년 결혼 생활을 하고 그의 사후 40년 후인 1901년 사망했습니다. 과부로 40년을 산 것입니다.
부부는 무촌이고 평등하다지만 여왕의 남편은 여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신하이기도 합니다. 군주제를 채택한 나라에서 왕을 능가하는, 또는 동등한 권력은 있을 수 없으니까요.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알버트 공 사후 그에게 충성을 다했습니다. 일단 여자로서, 여왕으로서 화려한 궁중 예복을 얼마든지 입을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검은 상복만을 입었습니다. 21년 결혼 생활보다 두 배나 긴 40년 동안을 그런 복장으로 살은 것입니다. 결국 남편의 상복 탈상일은 그녀의 사망일이 되었습니다. 위에서 본 과거 유교 국가인 우리의 조선처럼 정해진 상례가 있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녀 스스로 그렇게 먼저 간 남편을 애도한 것입니다. 물론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알버트 공은 그녀를 위해 단 하루도 상복을 입어줄 수 없었습니다.
그 기간 빅토리아 여왕에겐 유럽의 왕족이나 귀족 사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던 재혼이나 애인을 두는 등의 스캔들도 없었습니다. 당시 그녀가 40대 초반임을 감안할 때 충분히 그럴 수도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존 브라운이라는 말을 관리하던 시종과의 친교도 있었고, 어린 인도인 시종을 곁에 두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 남녀관계로 보기엔 무리가 있는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물론 외모지상주위였던 그녀이기에 그들도 모두 잘생겼습니다. 이렇게 검은 상복을 입은 그녀는 그 옷을 입은 날부터 런던의 버킹검 궁을 떠나 윈저 성에 박혀서 나오지도 않았습니다. 공식 행사일만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녀가 '윈저의 과부'라 불리는 이유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결혼식 때엔 하얀 드레스를 입었습니다. 하얀 그녀를 둘러싼 12명의 들러리들도 모두 하얀 드레스를 입었습니다. 웨딩드레스와 서양식 결혼식의 원조입니다. 과연 금슬 좋은 부부에게 있을 법한 원조 스토리입니다. 결혼 후 여왕과 알버트 공은 4남 5녀를 두었습니다. 21년 결혼 생활을 하며 평균 2년마다 1명씩 자녀를 낳은 것입니다. 그것 역시 치고받고 시끄러웠어도 좋은 금슬의 영향이었을 것입니다. 그들 자녀들은 대부분, 아니 모두 바다 건너 유럽 각국의 왕족들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말년엔 무려 42명의 손주를 두어 '유럽의 할머니'로 불렸습니다. 9명의 자녀가 4배로 불린 것입니다. 이렇게 자녀들로도 유럽 대륙을 정복했던 빅토리아 여왕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사돈과 형제자매, 그리고 사촌으로 얽힌 그 나라들이 서로 사이가 꼭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국익은 혈육보다 한참 앞에 있으니까요.
외조의 왕답게 알버트 공은 아내인 빅토리아 여왕을 도와 많은 일을 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1851년 대영제국의 힘을 세계만방에 떨친 만국박람회가 있습니다. 세계 최초의 엑스포입니다. 크리스털 팰리스라 불리는, 정확히는 판유리를 이어 붙여 만든, 당시로는 획기적인 공법의 거대한 유리궁이 런던의 하이드파크에 들어섰습니다. 산업혁명으로 생산해 낸 자국의 발달된 상품들과 전 세계 식민지와 각국에서 온 진귀한 상품들이 그 엑스포에 전시되고 거래되었습니다. 알버트 공의 작품이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충격을 받은 프랑스는 서둘러 에펠탑을 세웠고 후발주자로 파리 엑스포를 열었습니다.
알버트 공은 학문적으로도 케임브리지대학 총장을 역임했고, 음악 분야에선 런던 필하모닉의 유력한 후원자로, 미술 분야에선 그간 흩어져 있던 방대한 왕실의 작품 목록을 정리하였습니다. 그렇게 여왕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왕가의 일원으로서 영국을 위해 일을 한 여왕의 남자였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예술을 사랑했던 그를 위해 그의 사후 10주년 되던 해인 1871년 로열 알버트 홀을 지어 그에게 헌정했습니다. 또한 엑스포에 출품된 미술 공예품을 전시했던 박물관에도 그녀의 이름뿐만이 아니라 남편의 이름도 함께 넣어 1899년 빅토리아 앤 알버트 뮤지엄이라는 이름으로 개관을 했습니다. 사후 38년이 되어도 남편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표한 것입니다.
2024년 7월, 오늘부터 딱 1년 전 저는 영국을 방문했습니다. 일단 시원했습니다. 그때 제가 이곳에 <여름이 가장 행복한 나라 영국>이란 글을 썼을 정도로 영국의 여름은 생각보다 덥지도 않고, 비도 거의 없었습니다. 위도와 해류의 영향으로 도버해협 건너 있는 대륙의 국가들과는 다른 기후 양상을 보인 것입니다. 올해 7월 유럽 최강의 고온 도시로 유명한 스페인의 세비야는 수은주가 46도까지 치고 올라갔습니다. 하지만 이젠 그것이 그렇게 놀랄 뉴스로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이 글을 시작한 오늘 서울은 38도이고, 광명과 양양은 40도를 넘겼으니까요. 우리나라도 이제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우린 습도와 열대야로 그런 고온의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고통스럽습니다. 세비야조차 밤 기온은 절반으로 뚝 떨어져 열대야는 없기 때문입니다.
위의 작년에 쓴 영국 여름에 관한 글에서 저는 영국이 다른 유럽 국가들을 제치고 과학과 산업혁명을 통해 세계 최강으로 올라설 수 있었던 이유들 중 하나로 여름에도 쉬지 않고 일을 할 수 있다는 점을 뽑았습니다. 국가 환경의 덕을 봤다는 것입니다. 다른 유럽의 국가들은 여름만 되면 덥다고 일터와 학교를 떠나 바캉스나 휴가를 가는데, 영국은 우리의 가을과도 같은 쾌적한 여름 날씨로 계속 일이나 연구를 할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날이 너무 덥고 습한 상황에서 영국에 대한 글을 쓰니 주제와 상관없이 이렇게 날씨에 대해서도 한 마디하고 지나갑니다.
윈저 성에 도착했습니다. 기차가 다니는 윈저 역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과거 다녔던 앙증맞은 증기기관차였습니다. 그 앤틱한 기관차가 역에 전시되어 오는 관광객들을 가장 먼저 맞고 있었습니다. 말과 마차로 오가던 윈저 성은 산업혁명 후엔 이렇게 기차로 이동이 가능해졌을 것입니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도 런던의 버킹검 궁에서 이 증기기관차를 타고 윈저 성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버킹검 궁과 윈저 성,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 있는 홀리루드 궁전은 영국 군주의 공식 주거지입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버킹검은 주중 근무지이자 메인 주거지, 윈저는 주말 체류지, 그리고 홀리루드는 여름 체류지이자 휴가지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인인 왕 마음대로입니다. 현재 군주인 찰스 3세는 버킹검 궁이 아닌 본래 살던 클래런스 하우스에서 계속 거주하고 있습니다. 버킹검 궁엔 연회나 공식 행사가 있을 때만 출근합니다. 현재 버킹검 궁은 리뉴얼 공사 중이라는데 끝나면 그가 입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빅토리아 여왕 이전엔 런던의 런던타워, 웨스트민스터, 화이트홀, 세인트제임스 궁,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밸모럴 성 등이 왕가의 주 거주지 역할을 했었습니다. 밸모럴 성은 앨리자베스 2세가 2022년 그곳에서 체류할 때 사망하여 유명세를 탔었습니다. 물론 엘리자베스 2세는 생전에 윈저 성도 매우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고조모인 빅토리아 여왕은 그 성을 훨씬 더 좋아했습니다. 알버트 공 사후 40년간 그곳에서 아예 살았으니까요.
윈저 성은 유서 깊은 장소입니다. 1066년 영국을 침략해 영국 왕실의 시조라 불리는 노르만 왕가를 개창한 정복왕 윌리엄 1세 때 세워졌으니 말입니다. 그는 잉글랜드를 정복하며 요새로 런던엔 런던타워를 세웠고 윈저엔 윈저 성을 세웠습니다. 모두 템스강으로 연결된 강가의 성채입니다. 두 성간의 거리는 가장 빠른 육로로 40km에 달합니다. 물론 구불구불한 템스강 물길로는 훨씬 멀 것입니다. 윈저 성이 공식적으로 영국 왕실의 소유가 된 것은 튜더 왕가의 악명 높은 헨리 8세 때였습니다. 그전까지는 왕실은 윈저 성을 지은 윌리엄 가문에게 임대료를 내고 사용했었는데 그가 매입한 것입니다. 아마도 윌리엄 가문의 노르만 왕가가 끊어지고 플랜태저넷 왕가가 시작될 때부터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유추해 봅니다.
언덕 위에 있는 윈저 성을 향해 걷다 보면 성 입구의 동상이 가장 먼저 보입니다. 마치 그 성의 주인과도 같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동상은 서있습니다. 맞습니다. 빅토리아 여왕입니다. 천년 넘게 윈저 성을 거쳐간 수많은 왕과 여왕들이 있었지만 그 성의 제1 주인은 누가 뭐래도 그녀입니다. 윈저의 과부라 불리고 있는 그녀이니, 그 얘기는 그녀가 윈저의 안주인이라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마치 우리 이조 시대 때 과부가 되어서도 시댁의 곳간을 굳건히 지킨 대갓집의 며느리와도 같이 말입니다.
아마도 그녀가 버킹검궁을 더 아꼈다면 버킹검의 과부로 불렸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녀는 버킹검 궁에 최초로 입주한 군주이기 때문입니다. 그전까지 왕실의 주궁이었던 세인트제임스 궁전에서 살다가 1837년 여왕으로 즉위하며 버킹검 궁으로 거처를 옮긴 것입니다. 그리고 3년 후 알버트 공과 결혼하며 신혼살림도 차린 곳이니 버킹검 궁 곳곳엔 그들 부부의 손길이 스며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녀는 알버트 공이 사망하면서부터는 윈저 성으로 들어가 런던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거미줄이 쳐진 버킹검 궁은 1901년 빅토리아 여왕이 죽고 그녀의 아들인 에드워드 7세가 즉위하면서 다시 활기를 찾게 됩니다.
오늘날 영국 왕실의 이름인 윈저 왕가라는 이름은 윈저 성에 기인합니다. 보듯이 이전의 다른 왕가들처럼 가문의 이름이 아닌 것입니다. 이는 윈저 왕가의 뿌리가 독일계 혈통이고, 와중에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대전을 일으킨 독일제국에 반감을 가진 영국민들의 정서를 고려해 본래 가문의 이름을 버린 것입니다. 하노버 왕가를 이은 작센-코부르그&고타 왕가라는 이름을 버리고 친근한 윈저 왕가로 개명했습니다. 하노버 왕가의 마지막 군주인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인 조지 5세 때의 일입니다. 만약 아직까지도 그전처럼 있으면 그 길고도 어려운 이름 때문에 부르기 힘들었을 작센-코부르그&고타는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알버트 공의 가문 이름입니다. 그렇게 이름이 바뀌면서 윈저 성을 사랑했던 여왕의 후손들은 지금 윈저라는 이름으로 모두 불리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선 국산 위스키 이름으로 유명했었습니다.
이렇게 윈저 왕가로 불리니 영국의 왕실은 앞으로 혈통의 이름을 쓸 일이 없어졌습니다. 지금까지는 아들이 없어서 딸이 여왕으로 즉위 시 남편 가문의 이름을, 또는 딸도 없어서 방계가 왕위에 오를 경우 그 가문의 이름으로 왕조가 바뀌었는데 이젠 누가 왕이 되어도 윈저 왕가로 불려도 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경우에도 남편인 필립 공이 그리스계인 마운트배튼 가문이기에 찰스 3세부터는 윈저 왕가가 아닌 마운틴배튼 왕가로 불려야 한다는 설이 있었습니다. 남자가 권력은 없어도 가문의 이름을 간판으로 내세울 수 있게 만든 이 왕가의 룰은 부계 사회가 만든 관습일 것입니다. 재미있는 영국 왕가의 이야기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은 1837년부터 1901년까지 64년간 영국과 인도를 비롯한 영연방 국가들을 다스렸습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British Empire)을 다스린 군주였습니다. 영국이 세계 1등 국가로 역사상 가장 강성했던 시기였습니다. 영국의 전함이나 상선들은 유니언잭을 펄럭이며 세계의 바다를 헤치고 다녔습니다. 과거 2천년 로마제국이 지중해를 내해로 삼으며 장악했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장대한 스케일이었습니다. 지금도 전 세계엔 56개의 영연방 국가가 있습니다. 착취당한 식민지 국가들이 아직까지도 영국의 팬으로 있다는 것이 우리로선 이해가 안 가지만 그만큼 영국이라는 나라가 대단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결과일 것입니다. 그 국가들은 우리 언론엔 한 줄도 보도되지 않는 럭비와 크리켓 월드컵을 4년마다 여는 등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자국의 영토로 보아도 빅토리아 여왕 재임 시 영국은 가장 넓은 나라였습니다. 오늘날 영국의 영토는 브리튼섬에 속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와 그 옆 아일랜드섬의 북아일랜드를 더한 유나이티드 킹덤(UK)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아일랜드의 경우 북쪽만 영국인 것은 1937년 왕이 필요 없는 공화국으로 독립하며 영연방에서 탈퇴하고 영국 잔류를 희망했던 북아일랜드만 남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이전 빅토리아 여왕 재임 시엔 아일랜드섬 전부가 영국의 땅이었습니다. 진정한 UK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윈저의 과부에서 유럽의 할머니가 된 빅토리아 여왕은 광대한 UK와 British Empire 전체를 다스렸습니다. 그래서 한 시대가 그녀의 이름이 된 군주가 되었습니다. 빅토리아 시대입니다.
하광용은 대학 졸업 후 오리콤, 이노션 등에서 광고인 한 길로만 가다가 50세가 넘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세상사 이때 저때, 이곳 저곳, 이것 저것, 이사람 저사람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이 많다. 박학다식한 사람은 깊이가 약하다는 편견에 저항한다. 그래서 그는 르네상스적 인간을 존경하고 지향한다. 박학과 광고는 어찌보면 ‘넓다’라는 측면에서 동일성을 지닌다. 뉴스버스 연재 에세이를 추려 인문교양 에세이집을 출간한 그는 태평양인문학교실의 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 아래는 하 작가의 책 '테이크아웃 유럽예술문화', '테이크아웃 유럽역사문명', '테이크아웃 일본근대백년' 소개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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