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전시 '나선형 궤적', 11월 17~30일 서울 가나 나인원 한남

 

Resonance(공명) Tempera on mixed media 53×45 2021
Resonance(공명) Tempera on mixed media 53×45 2021

작가 김영리는 지난 5월말~7월초 미국 뉴욕 일대를 방문했다. 무조건 쉬고 싶어서였다. 하루 14시간씩 캔버스 앞에 앉아있었다. 300여개의 글로벌 갤러리들이 모여있는 첼시 일대에도 코로나 팬데믹의 여파는 처참했으나 25년전 팽개치고 들어온 시장이 새롭게 보였다.

30여년전 전시 초대를 했던 월터 위키저(Walter Wickiser) 갤러리 유태계 오너가 작가를 반겼다. 최근 아들의 도움을 받아 만든 인스타그램에서 오너가 미리 연락을 주었다. 당시 월터 위키저 갤러리 전시는 먹과 아크릴을 재료로 쓴 도시와 인간을 주제로 한 반추상 작품들이었다. 이주와 문화 충격 속에서 학업과 생활의 어려움이 묻어났다. 오너는 만나자마자 온라인 뷰잉 전시 초대를 했다. 

그녀의 작품은 2차원 평면 회화에서 서서히 마티에르 질감과는 분명 다른 입체 회화로 변하고 있다. ‘평평함(level)+평평함(level)’이다. 마치 단면을 잘라서 보면 요 위에 이불을 덮듯이 캔버스에 물감을 얹는 방식이다. 

직전의 자신만의 회화적 리듬 단위는 처음에는 사각형(스퀘어)이었으나 곡면이 둘러싼 입체 알갱이로 변하고 있었다. 바둑판, 평행선, 사선 등 단순하고 반복적인 형태와 구도, 명도가 같은 유사색, 보색 등을 병렬시켜 조화를 추구하였다. 이 전체가 단색화라는 이미지를 벗어날 수 없었다.

단색화에 편입되는걸 거부하기로 했다. 당장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자신만의 세계가 어떻게 변해갈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작가는 ‘내려놨다’는 표현을 쓴다. 수영장이나 고요한 계곡 물에서는 몸에 힘을 빼야 부유할 수 있듯이 자신 안에 있는 의식이 또는 무의식이 자신을 이끌게끔 했다.     

Resonance(공명) Tempera & mixed media, 91×72 2021
Resonance(공명) Tempera & mixed media, 91×72 2021

작품은 1년여전 작업실을 방문했을 때와는 사뭇 다르게 변하고 있었다. 'Ah'와 'IN' 시리즈 작업은 진화하고 있다. 최근 수년간의 작업이 자신을 치유하는 과정이었다면 자신만의 세계를 벗어난, 관객과 공감을 도모하는 추상 세계로 진행중이다. 디자인에서도 많이 자유로워진 게 자신감의 회복이 있어 가능했다. 
1996년, 아쉬움이 많지만 10여년에 이른 호주·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경기도 양평, 양자산을 배면에 둔 항금리로 들어온뒤 한참동안 칩거 상태로 있었다. 열정이 식으면서 모든게 하얗게 변모 되었다. 금의환향하지 못한 자존심에 상처도 입었다. 집 주변 텃밭에 이것저것 심는 등 자연과 호흡하면서 자신이 서구화, 도시화가 많이되었음을 자각했다.

무엇보다 손이 돌아와야 했다. 심은 식물에서 꽃이 보였다. 이런저런 꽃을 그리면서 손이 풀렸다. 내면의 '어린 나‘와의 대화에 집중한 일련의 침묵 시리즈, 'Ah'와 'IN'에 천착하면서 편안해졌다. 예술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왔다. 승용차 없이 생활하면서 작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김영리는 캔버스에 옅게 석고(灰)를 발라 완전히 말린 후 그 위에 템페라(Tempera) 기법으로 작업한다. 템페라는 천연 안료에 달걀 노른자나 벌꿀, 무화과 즙 등을 용매제로 섞어 만든 물감을 사용한다. 자체 발광하며, 내구성이 좋고, 투명하다. 템페라는 서양화 재료지만 색감이나 전체 이미지가 동양화 느낌을 준다. 템페라는 구상 회화에서 추상화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매개가 되는 재료이다. 

김영리는 한국에서는 동양화를, 미국 뉴욕에서는 서양화를 공부했다. 동양화와 서양화는 그리는 대상, 방식이 확연히 다르다. 서양화는 인간을 주로 그린다. 캔버스에 물감을 얹는 방식이다. 동양화는 종이와 먹이 만나 관념적 자연을 그린다. 서양화에 비해 여백(공간) 배치나 활용이 뛰어나다.

Resonance(공명) Tempera on mixed media 53×45 2021
Resonance(공명) Tempera on mixed media 53×45 2021

그림 그리기는 끝나지 않을듯한 울트라 마라톤이다. 목적지에 이르는 길은 종종 갈림길을 만나며 몇 번의 하얘지는 경험을 한다. 지난해 작업실을 찾았을 때, 작가는 반드시 지나가야하는 길을 찾은듯하다며 기뻐했다. 

최근 작업은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패턴은 미묘하게 앞의 작품을 이어가고 있었다. 왜 그런지 자문을 해봤다. 반복의 근원을 들여다 보려고 노력했다. 김영리는 행동이 먼저가고 후에 정리하는 스타일이기에 머리 속에서 작품의 복기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마치 바둑을 둔 후 처럼.

디자인도 뭔지 모르지만 나왔다. 반복된 패턴과 디자인의 결합은 양모로 짠 태피스트리(tapestry) 작품을 보는 듯도 하다. 단순하게 색면에 궤적을 그리는 드로잉이 아닌 오브제가 더해진 듯 완성된 입체 디자인이다. 

자신에게서 나온 그림도 의식의 흐름에 따라 변한다. 잠재 의식속 이성이 젊은 시절부터 계속되어온 감성적 무당 끼를 눌렀다. 종종 삼매경(三昧境)에 빠져 스스로의 생각과 습관의 포로가 되어 머리를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잠깐 들어왔던 삼매의 영발이 끝났음에도 억지로 그 끝을 붙들고 있었던 것이다.

화가에게 영발도 시절인연(時節因緣) 같은 것이다. 시절이 맞고 인연이 닿았을 때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남녀간 연애든, 화가에게 작업이든 잘 하려면 일단 머리를 내버려둬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김영리는 서울 가나 나인원 한남에서 11월 17일부터 11월 30일까지 ‘나선형궤적’(Helical trace)이라는 타이틀로 초대 전시를 갖는다.  

심정택은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에서 근무했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이후 상업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50여회의 초대전, 국내외 3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3년차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써왔고,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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