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흑백의 강렬한 대비나 골드와 레드, 블루 등 원색을 사용했던 정진용(53·전북대 예술대 교수) 작가는 2019년 이후 자신의 주조색인 검정을 거의 쓰지 않는다. 2018년 전북 전주시 팔복 예술 공장 레지던시 전시, 빛이 들지 않는 전시장 황금색 조명아래 검정이 강렬했던 기억이 있다. 

화려하게 그려진 이미지 위에 0.2㎜ 크기의 미세한 인조 크리스탈 비즈가 표면을 덮었다. 세월의 흐름에 사라지는 이미지를 현재에 멈추는 ‘감금과 정지’의 상징이었다. 작가의 상상이나 감성에서 파생된 형태와 색은 크리스탈 비즈 투명 막 안에서 생생하게 빛이 났다.

정진용은 동양 전통의 산수화와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 또는 日月五峰圖) 및 십장생(十長生)을 모티브로 판타지적 경관을 구현한 ‘호연지경’(浩然之景) 시리즈를 선보여 왔다.

호연지경-해질녘 인상 180*112.5 먹, arcylic crystalbeads on canvas 2019.
호연지경-해질녘 인상 180*112.5 먹, arcylic crystalbeads on canvas 2019.

낙양(落陽)의 호숫가에 뜬 낡은 배와 같은 전통, 정치적 격동기에 매몰되는 고색창연하기만 한 근대와 비극적인 현대를 동양 미학과 서양 미감을 넘나들며 그려냈다.

작품 <촛불 행렬>은 마치 서구의 인상주의 화풍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화폭은 이분 구도로 대별되어 평온한 하단과 달리 상단의 하늘은 뭔가 엄청난 큰 일이 일어날 조짐과 암시를 담고 있다. ‘2016년 겨울 촛불시위’를 광화문과 그 너머 하늘로 대비시켰다.

과거지향적인 뉴욕의 마천루, 서울의 숭례문, 베이징의 쯔진청(자금성·紫禁城) 등 건축물 이면은 공포를 지니고 있지만, 권력에 대항하는 현실 풍경들은 광장을 매운 수백만의 촛불이었다. 거대 권력을 향해 뚫려 있는 큰 길 위와 광장, 골목골목까지 군중들의 촛불이 들어차 있었다. 작고 나약한 촛불들이 모여 만든 빛과 함성은 경이를 넘어 경외스럽다. 십자가를 연상시키는 길의 큰 갈래와 그 길을 메워버린 촛불 행진은 봉건 시대를 저물게 한 옛 거리들과 오버랩되었다.

정진용의 동양미학적 정신성과 넉넉한 사유의 폭, 활달한 붓터치가 구현한 화면은 동시대에 대한 형상과 사유의 통합이다.

“윤리적으로 부당한 것들이 미학적으로는 찬란하게 빛날 때가 있다. 파괴와 해체의 경계에서 인간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그러한 과정이 없다면 희망도 미래도 불가능하다”는 게 작가의 주장이다. 이 세상의 전쟁과 재난은 멈추지 않으나 그러한 상황이 재발해서는 안 되는 기원으로 그림을 남긴다.

촛불행렬 180 x140㎝, 수묵.아크릴릭 과슈.크리스털 비즈.천에 캔버스 2017
촛불행렬 180 x140㎝, 수묵.아크릴릭 과슈.크리스털 비즈.천에 캔버스 2017

정진용은 광대무변의 중국화를 홀로 상대한 조선회화의 금자탑 겸재 정선(謙齋 鄭敾·1676-1759)에 이르러서는 심경이 복잡해진다. 일제는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를 만들면서 이 땅의 전통회화에 ‘동양화’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명백히 조선화(朝鮮畵)의 맥을 끊기 위한 것이다. 조선화는 문인화 중심의 수묵과 직업화가 집단 도화서 소속 화원들의 채색화로 대별된다. ‘동양화’는 1990년대 ‘한국화’라는 명칭으로 병기된다.

정선의 '금강전도, 金剛全圖(18세기 중엽, 종이에 수묵담채, 130.8 x 94.5cm)'는 서구 기준으로 여전히 흑백 수채화일 뿐인 전통 중국화를 몇 단계 뛰어넘는다고 본다. 수평과 수직으로만 그려진 준법과 필획 등은 여전히 현대적이다. 정진용의 설명은 이어진다.

금강전도 앞에 선 정진용 작가 / 사진 =이승은
금강전도 앞에 선 정진용 작가 / 사진 =이승은

“겨울 금강산인 개골산을 그린 ‘금강전도’는 매의 눈처럼 드론의 카메라 시점이 있어 한 폭에 회오리치는 소용돌이 현상처럼 이미지들을 집어넣을 수 있다. 중국화에는 이런 시점이 없다.”

“(겸재 작품은)먹이 검다는 인식을 확 깨 버린다. (금강전도) 뽀족한 암산과 나무숲을 우거진 토산과 대비하면서 검은 먹으로는 점과 선으로 이어지는 포인트에만사용하였다.”  

정진용은 현대의 한국이 글로벌 미술의 중심에 다가가려면 범아시아적 요소를 수용, 중국을 활용하자는 주장이다. 현대적 판타지는 기괴(uncanny•weird)하다. 과학의 발달은 되려 미스터리와 불명확성을 재등장시키고 있다. 

“예술가는 익숙한 것과 결별해야 되며 그러한 상황에서 탈출해야 된다. 예술가는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깨부수는 직업이다. 머릿속에 머물러 있는 것을 구체적으로 실현시키지 않으면 무기력해진다.”

약 13년여 전 정진용 작품을 처음 보았을 때 나의 미학적 수준은 미미했다. 현대 중국화가 이렇지 않나 유추해보곤 했다. 동시대 미술의 주류에 올라선 중국 스타 작가는 언제든 상대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정진용의 창생(蒼生) 창작관에서 기인한다. 

“예술은 기본적으로 해체다. 해체가 빠진 작품을 만드는 이는 예술적 뿌리가 약한 기술자다. 쪼개더라도 곽희의 조춘도는 조춘도처럼, 청명상하도는 청명상하도처럼, 금강전도는 금강전도처럼 보이게 만들어야 한다. 가부좌를 튼 부처에 예수 얼굴을 붙여놔도 여전히 부처라는 사실을 안다. 금강전도의 획 하나하나를 수평으로 늘어놔도 금강전도다.”

정진용은 자신의 주요 조형 언어인 빛, 구조, 색을 충족 시키는 칸델라(candéla·라틴어 ’양초’)를 포도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 그는 포도를 원(circle)의 집합체, 수많은 구(球)의 조합으로 본다. 하나의 독립된 세계, 유니버스(universe)이다. 

포도 꼭지를 아래로 하면 샹들리에(chandelier) 모양이 된다. 칸델라 드로잉은 기존의 샹들리에 시리즈 작품의 모양, 형태를 넘어 아메리카 원주민의 주술 장식인 드림캐처(dreamcatcher) 또는 마을 어귀나 길가에 세운 장승류의 상징물로 보는 최초 이미지이다.

Candella, 162X130cm, K_ink, color, glass micro spheres on canvas, 2023
Candella, 162X130cm, K_ink, color, glass micro spheres on canvas, 2023

작가의 눈에 들어온 샹들리에는 어느 카페 회색빛 노출 콘크리트 천정에 매달려 공간을 살아있게 했다. 작가의 감정을 건드린 대상은 작품이 된다.

색채와 점묘로 재현한 ‘행오버(hangover)’ 시리즈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허름하고 초라한 행사장의 기물(棄物)로 전락한 샹들리에를 모티브 삼았다. 구도와 색은 장중하며 묵직한 레드 와인같으며 선은 호방하고 대륙적이다.

행오버 시리즈는 과슈를 사용한 번지기, 점묘 등의 기법을 적용하면서 좀 더 회화적이 되었다. 샹들리에 이전, 디비니티(divinity·神性) 시리즈는 그림 자체보다도 시간의 흐름에 상처 입지 않는 엄숙하면서도 결코 가볍지 않은 느낌을 추구하였다. 절대 권력인 신성에 고개숙이는 인간의 모습은 장엄하나 맹목적 경배의 경계에 서는 듯도 하였다. 이러한 ‘불편한 장엄’의 아우라를 가진 작품들은 스펙타클한 화면, 긴박하게 조이는 서사, 빠른 전개를 특징으로 한다.

낫초-군자의 왕, 2024
낫초-군자의 왕, 2024

작업의 변화는 작가의 정체성, 삶의 여정과 맞물려 자연스럽다. 지난해 광주시립미술관 전시 ‘시천여민(侍天與民)’에 나온 ‘낫초-군자의 왕’은 칼날 사이에 핀 난초 모습이다. 난초는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를, 낫은 거칠고 날카로운 민중의 삶을 상징한다. 전시가 계속되며 시들어가는 난초의 모습과, 꼿꼿이 서 있는 낫 이파리는 선명하게 대비된다. 작가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꽃은 시들어도 말여
날은 살아 있는겨”

심정택은 2009년 상업 갤러리(화랑) 경영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국내외 45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했다. 그 이전 13년여간 삼성자동차 등에 근무하였고 9년여간 홍보대행사를 경영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기사, 2019년 4월부터 작가 및 작품론 중심의 미술 칼럼 270여편,  2019년~ 2023년, 건축 칼럼(필명: 효효) 160여편을 기고했다. 뉴스버스에는 2021년 창간부터 주1회 미술작가 평론을 게재해왔다. <이건희전, 2016년> 등 3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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