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의 '착오'·박근혜의 '패착' 피해갈 수 있을까
'메시지'·'인사'에 이어 정책 통한 외연 확장 착수해야
멀고도 험한 정권 재창출의 길
민주주의와 독재를 구분하는 가장 확실한 기준은 공정하고 투명한 선거에 입각한 평화적 정권교체가 가능한지에 달려 있다. 이러한 견지에서 1997년 12월 18일에 실시된 제15대 대통령 선거는 대한민국이 명실상부한 민주국가의 반열에 올라섰음을 안팎으로 두루 알리는 기념비적 사건이었다. 야당 후보로 나온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집권당 후보자로 출마한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를 누르고 사상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실현했기 때문이다.
이는 한국이 정치발전의 측면에서 일본을 제치고 아시아의 최우등 선진국으로 발돋움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 해 전인 1993년에 출범한 일본의 호소카와 모리히로 연립내각은 오자와 이치로를 위시한 자민당 탈당 정치인들이 주축을 구성함으로 말미암아 불완전한 반쪽짜리 정권교체에 머물고 말았다.
1987년에 대통령 직선제가 부활한 이래 총 8번에 걸쳐 새로운 정부가 등장했다. 그중 노태우 정부, 김대중 정부, 이명박 정부는 정권 재창출에 성공했다. 반면에 김영삼 정부, 노무현 정부, 박근혜 정부, 문재인 정부는 여당의 재집권에 실패했다. 국회에서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윤석열 정부 역시 특별한 반전의 계기가 없는 한에는 정권 재창출에 실패한 정권으로 역사에 기록될 게 확실시되는 터다.
윤석열 정부까지 포함하면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사례는 세 번에 그치는 데 비해 재집권에 실패했거나 실패할 게 명확한 경우는 무려 두 배 가까운 다섯 차례나 된다. 이 사실은 정권 재창출이 얼마나 험난한 과제인지를 뚜렷이 알려준다고 하겠다.
프로스포츠팀 감독은 팀의 우승으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한다. 현직 대통령은 정권 재창출의 목표를 달성함으로써 민심의 최종적 시험에 합격한다.
문제는 역대 대통령들의 상당수가 선거 국면에서는 중도층 유권자의 표심을 붙잡으려 외연 확장에 노력하다가도 정권만 잡았다 하면 고정 지지층의 눈치를 보느라 지지기반을 축소하는 일에만 열중하기 일쑤라는 점이었다. 후보 시절에는 덧셈의 정치에 힘쓰다가, 대통령 취임식만 끝나면 그 즉시 뺄셈의 정치에 몰두하는 식이었다. 그 결과는 정권 재창출의 불발이고, 정권 재창출이 무산된 대통령들은 투옥과 사실상의 가택연금처럼 필설로 형용하기 힘든 수모와 곤욕을 퇴임 후에 예외 없이 겪어야만 했다.
지금은 어느 정치인과 어떤 정치세력도 단독으로는 집권이 불가능한 시대이다. 단일화와 선거연합이 대선 정국의 고정메뉴로 정착된 까닭이다. 나는 여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이렇게 선언하고 싶다. 지금은 어느 정치인과 어떤 정당도 단독으론 성공적 국정운영이 원천적으로 불가능 시대라고. 한마디로, 선거 때는 물론 선거 이후에도 부단한 외연 확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지속적 외연 확장과 성공적 국정운영이 착탈식이 아니라 일체형으로 묶인 시대임에도 지지 기반을 어떻게 확대할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체계적 연구는 의외로 부족하다. 중도층으로의 정치적 영토 확장을 선거 승리의 목적에 일시적으로 복무하는 정치공학적 수단 정도로 가볍게 여기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직행과 박근혜의 회군
외연 확장, 곧 중도 확장은 매우 섬세한 안목과 번거로운 절차를 요구하는 일이다. 따라서 신중하고 단계적인 접근이 필수적이다. 이제부터 하는 얘기는 정치학 교과서에도 없고, 기존에 나왔던 수많은 정치 관련 칼럼들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순전히 필자의 독자적이고 창발적인 생각의 산물이니 다소 생소하게 들릴지라도 주의 깊게 들어주시기를 감히 부탁드리는 바이다.
외연 확장은 호랑이의 등에 올라타는 행동과 흡사하다. 내 맘대로 탈 수는 있을지언정 내 멋대로 내릴 수는 없다. 함부로 내렸다가는 호랑이에게 잡아먹힐 수 있는 연유에서이다.
외연 확장은 일단 한번 시작했으면 확장의 한계에 봉착하는 그날까지 일관되고 뚝심 있게 계속돼야 한다. 중간에 그만두면 확장의 대상이 되었단 사람들과 확장에 반대했던 인간들 모두로부터 지독한 배신감만 사기 십상이다.
외연 확장은 단번에 성취되지 않는다. 보통은 메시지와 인사와 정책의 3단계로 숙성되고 진화해야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첫 번째로는 말(言)로 지지층을 넓히고, 두 번째로는 용인술로 지지층을 넓히고, 세 번째로는 콘텐츠로 지지층을 넓히는 이 3단계를 순서대로 통과했다.
3단계에 접어든 김대중(DJ)은 김종필(JP) 전 총리가 추천한 보수적 엘리트 경제 관료들을 기용해 IMF 구제금융 프로그램을 충실하게 수행함으로써 종국적으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할 수 있었다. DJ가 순혈주의와 정통주의를 맹목적으로 고집하는 진보 원리주의자들의 성급하고 무책임한 아마추어적 의견을 좇아 소위 자립경제를 지향한다며 국제통화기금과 무모하게 척을 졌다면 한국경제는 오늘날 헤어날 수 없는 깊은 나락에 빠졌을 것임을 이제는 다들 순순히 인정했으면 좋겠다.
3단계를 정석대로 착실히 밟은 DJ와는 달리 노무현 전 대통령은 1단계에서 2단계를 건너뛰고 3단계로 곧바로 직행했다. 그는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체결 작업을 대통령 스스로 주관하고 추진해 그나마 남아 있던 참여정부의 마지막 지지기반마저 완전히 소멸·붕괴시켰다.
만약 노 전 대통령이 열린우리당 창당을 강행하지 않고 중도 보수 성향의 인물들을 인내심 있게 안고 있었다면 그는 이들로 하여금 한미 FTA 협상의 총대를 메게끔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새천년민주당이 분당되면서 보수 성향 인사들이 대거 갈려 나가자 노무현은 대리기사 역할을 해줄 온건한 보수파 인사들 대신에 본인이 직접 운전대를 잡고 우회전을 위험하게 감행해야 했다. 노무현이 강경 진보진영으로부터 배신자 소리를 듣게 된 배경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궤적은 더 한심하고 뒤죽박죽이다. 박근혜는 메시지가 중심이 되는 1단계에서는 중도층의 심금에 호소하는 유연한 발언들로 유권자들의 거부감과 적대감을 적잖이 누그러뜨렸다. 폭넓고 포용적인 통합의 탕평 인사로 특징되는 2단계에서는 경제민주화의 상징 김종인과 20대의 파릇한 젊은이로 청년층의 대표성을 띠었던 이준석을 양 날개로 삼아 이념으로는 왼쪽으로 진출했고, 세대로는 젊은 유권자들로 지지기반을 팽창했다. 호랑이 등에 안정된 자세로 올라탄 셈이었다.
그러므로 박근혜는 집권 후에는 중도층이 환영할 만하고 온건 진보층이 선호할 법한 정책으로 외연 확장의 3단계를 완성해야만 옳았다. 그게 정권 재창출로 가는 올바르고 정상적인 경로였다.
실상은 정반대였다. 그는 김종인을 토사구팽했다. 이준석은 박근혜에게 미운털이 박혀 투명인간이 되었다. 친일 뉴라이트 분자들이 집필을 맡았던 국정교과서 파동에서 드러났듯이 정책은 마냥 극우로, 극우로 치달았다. 중도의 바다로 나아갔다가 극우의 우물 속으로 다시 급하게 유턴했으니 승객인 국민이 느낄 현기증은 더 극심할 수밖에 없었다. 박 정권의 비극적 말로는 현재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박스권에 갇힌 건 분명하다. 그런데 이재명이 갇힌 박스는 김문수부터 출발해 오세훈과 홍준표와 안철수를 지나 한동훈과 유승민에 이르기까지 여당의 대선주자들을 전부 억지로 욱여넣어도 커다란 공간이 여전히 넉넉히 남을 만큼 크기가 큰 상자이다. 이재명을 겨냥해 현 집권세력과 보수언론이 급조한 ‘박스 프레임’이 별다른 재미를 못 보는 까닭이다.
관건은 이재명 대표가 더 멀리 내다보며 외연 확장에 나서야 한다는 데 있다. 이재명은 메시지를 통한 외연 확장의 1단계에서 인사를 통한 외연 확장의 2단계로 막 진입하려는 찰나다. 그는 김종인과 윤여준과 이석연 등의 간판급 중도 보수 인사들과 차례로 회동하며 외연 확장에 가속도를 내고 있다.
한국의 선거 지형에서 중도층이 점유한 위상과 중요성을 파악한 이재명은 조기 대선이 치러지는 날을 즈음해서는 2단계 외연 확장까지를 완료할 전망이다. 집권의 꿈을 현실화한 이재명이 그다음에 착수해야 할 일은 정책을 통한 3단계 외연 확장이다.
1단계에서 3단계로 직행했다 배신자 프레임의 함정에 걸려든 노무현의 착오나, 2단계에서 출발점으로 아예 도로 회군해 정권의 수명을 절반가량 제 손으로 깎아 먹은 박근혜의 패착을 거대 야당 대표에서 대통령으로 변신한 이재명은 과연 피해갈 수 있을까? 실패한 외연 확장은 없다. 오직 중단된 외연 확장이 있을 뿐임을 이재명과 그의 핵심 참모들이 현명하게 깨닫기 바란다.
공희준은 “산업의 쌀이 반도체라면, 모든 콘텐츠의 쌀은 글”이라고 믿으며 정치평론과 인물비평을 중심으로 PC통신 시절부터 SNS 시대인 지금까지 글쓰기에 전념해왔다. '강남좌파', 먹고사니즘' 같은 21세기 한국사회의 시대상이 담긴 촌철살인의 신조어를 만들어낸 진짜 주인공이기도 하다. <이수만 평전> <지금은 강남시대> <보수의 종말> <퇴진하라> 등의 책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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