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버스 심정택의 미술딜라이트]
백남준 로봇 아카이브전 두손갤러리에서 28일까지
연재 <심정택의 미술 딜라이트>는 작가들에 이어 갤러리스트(Gallerist) 즉 화상(畵商)들을 간헐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서구 근현대 미술사를 보면 위대한 작가와 함께 갤러리스트가 언급된다. 갤러리스트의 역할은 작가 발굴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일정 수준 이상의 컬렉터이기도 하다. 미술계 속설에는 ‘미술사(美術史)는 컬렉터가 쓴다’는 말이 있다. 김양수(75) 두손갤러리 대표는 어린 나이에 컬렉터로 시작했다.
1969년 남자반, 여자반으로 구분되어 입학한 미술대학 1학년 시절, 서울 중구 황학동 청계천 주변 중고서적상 거리의 이면 골목에 골동품 수집 목적으로 고물상을 차렸다. 중학시절에 도예가 지순택(1912~1993)을 만났고 민속학자 조자룡은 멘토였다고 한다.
당시 미술계는 동양화 전성기였다. 대학에서는 전성우(1934~2018)에게서 프랭크 스텔라(1936~2014) 등 미국 현대미술가들에 대해 배웠다. 1977년부터 현대미술 작품을 다루면서 본격적으로 화상의 길에 들어섰다.
김양수는 개인, 가족을 문학적 화제(畵題)로 끌고 간 이중섭(1916~1956)을 한국미술 구상의 효시로, 박수근(1914~1965)을 추상의 출발로 본다. <월간미술> 주간을 지낸 이규일(1939~2007)은 2000년 언론 기고 칼럼에서 화상 김양수를 언급한다.
“1979년 박수근의 미망인 김복순 여사는 두손갤러리 김양수 사장과 함께 회고전을 열기위해 (마가렛) 밀러 여사를 찾아가 사례금을 주고 30여점을 인수했다. 그러나 국내 애호가들의 극성에 못 이겨 회고전도 열기전에 인수작품을 모두 넘겨주고 말았다. 이때 호당 가격은 300만원이었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 박수근 작품 값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올랐다.”(2000. 9. 28. 한국경제)
김양수는 당시 이중섭 작품 가격과 격차가 컸던, “박수근을 이중섭과 동급으로 만든다는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 김양수는 마가렛 밀러를 ‘미술상’이라고 칭하며, “밀러는 박수근 사후에도 가족들로부터 작품을 사들였다”고 한다. 1984년 서울 동숭동에 '두손 갤러리'를 개관하였다.
김양수는 1992년 서울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백남준 회고전 ‘백남준·비디오때·비디오땅’ 전시에 결정적 기여를 한다. 1991년 10월 김양수는 미국 뉴욕 맨해튼 백남준 스튜디오를 찾아갔다. “백 선생님이 종종 황당할 때가 있다”면서 당시 백남준의 말을 전한다. “(칼솔웨이 갤러리가) 13점을 사는 조건으로 전시하자고 할거야.” 미국 신시내티의 칼 솔웨이 갤러리는 1980년대 중반 이래 백남준 작품을 도맡아 만들었던 곳이다.
김양수는 백남준을 만나기 전 스위스 취리히와 바젤에서 열린 전시 ‘비디오 시간-비디오 공간’의 강렬함을 지나칠 수 없었다. 전시의 핵심은 <나의 파우스트> 연작 13점이었다. 작품 대금과 기술 이전료 25만불 등 총 160만불이 필요했다. 김양수는 서울 동숭동 갤러리 건물(건축가 김석철 설계)을 담보 잡히는 등의 방법으로 선금을 마련해 작품 13점을 국내로 들여오는 데 성공하였다.
1992년, 7월30일부터 9월6일까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나의 파우스트>를 위시한 취리히·바젤 전시의 주요 컬렉션들을 들여와 지금도 회자되는 ‘백남준·비디오때·비디오땅’ 전시 무대를 펼치게 되었다. 김양수는 전시가 끝 난 뒤 잔금을 치르기 위해 작품들을 팔아야만 했다. 미국 스미스소니온에 기계 연작 등 기관과 개인 등으로 작품이 흩어졌다. “파우스트 연작은 흩어져도 괜찮다”고 한다.
대학 시절부터 우리 옛 것에 대한 관심은 중국 만주로 향했다. 김양수는 한반도의 잊혀진 왕조로 고구려와 고려를 든다. 한국이 중국과 수교(1992년)하기 이전부터 고구려 수도가 있던 중국 지린성(吉林省) 지안시(集安市) 고분 벽화들을 비밀리에 촬영했다. 조선일보 문화부 기자와 사진 기자로 이루어진 특별취재팀과 함께였다. 1993년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아, 고구려>전은 44만명의 관람객이 찾았다. 김양수는 가치 측면에서 고미술과 현대미술을 구분하지 않는다.
같은 해 김양수는 미국 뉴욕으로 이주한다. 자신의 표현대로 ‘10여년간에 걸친 유배 생활’의 시작은 뉴욕 맨해튼 소호 거리였다. 자수성가한 교포와 합작으로 200평 규모 에스프레소 바 겸 갤러리 ‘스페이스 언타이틀’을 운영하였다. 평범한 대리석 평상의 테이블에 시카고에서 컨테이너로 가져온 앤틱 명품 의자들을 수리하여 매칭시킨 인테리어로 뉴욕타임즈 주말판에 소개된 후 하루 매출이 20배로 늘었다.
‘스페이스 언타이틀’ 이웃에 백남준이 ‘무덤’이라고 표현한 지하층을 낀 백남준 스튜디오가 있었다. 그를 위한 <New York Center for Media Art>를 운영하였다.
2008년 귀국하여 서울 삼성동에 미술품 경매 및 갤러리 인터아트채널을 열었다. 이후 이태원, 삼청동으로 옮겨 다녔다.
2009년, '청자 리디자인 & 리바이벌 프로젝트' 전시를 가졌다. 2014년부터는 사업부문에 디자인과 접맥하며 확장한다. 1990년 이탈리아 가구 수입 이력은 2015년 목가구 작가 최병훈을 미국 마이애미 아트페어에 진출시키는 흐름으로 이어진다.
김양수는 학생 시절부터 갈비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아시아권의 ‘고행상(苦行像)’에 매료됐다. 이는 2017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서남아시아에 특화된 기획사와 함께 간다라 미술전 개최로 이어진다.
김양수는 한국 미술 시장을 2차 시장의 의미가 강한 ‘아울렛’으로 표현한다. 현대미술의 잠재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A급 보다는 B급이나 C급 작품에 자본이 몰리는 현상을 아쉬워한다. 디자인, 회화, 조각, 건축간 구분은 의미가 없다고 주장한다. 유럽은 회화, 조각, 건축이 여전히 순수미술 영역에 속한다.
김양수는 중국 운남성 출신의 친구와 함께 영국 런던에서 20분 거리의 레딩 교도소를 미술관으로 만드는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레딩 교도소는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 1854~1900)가 외설 혐의로 1895~1897년 2년여간 수감되었던 곳이다. 와일드는 시 '레딩 감옥의 노래'를 발표하기도 했다. 예술행동주의자 뱅크시(R. BANKSY)는 감옥 담장에 줄무늬 죄수복을 입은 한 남성이 교도소 담장을 넘어 천을 이어 만든 줄을 잡고 탈옥하는 장면을 그렸다. 많은 이들이 그림 속 탈옥수가 와일드라고 추측했다.
서울 중구 정동에 자리잡은 두손갤러리는 백남준 로봇 아카이브전 《Human tech for future》을 펼치고 있다. 1980년대부터 백남준과 협업을 한 수석 디자이너 및 기술 어시스턴트 마크 팻츠팔 (Mark Patsfall)의 로봇 제작과 관련된 자료를 공개한다. 작가의 구상이 작품으로 구현되는 과정을 엿볼 수 있다. 전시는 2월 28일까지다.
심정택은 2009년 상업 갤러리(화랑) 경영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국내외 45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했다. 그 이전 13년여간 삼성자동차 등에 근무하였고 9년여간 홍보대행사를 경영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기사, 2019년 4월부터 작가 및 작품론 중심의 미술 칼럼 270여편, 2019년~ 2023년, 건축 칼럼(필명: 효효) 160여편을 기고했다. 뉴스버스에는 2021년 창간부터 주1회 미술작가 평론을 게재해왔다. <이건희전, 2016년> 등 3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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