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GIFT> 공연 덕분에 탄생한 영화다. <GIFT>는 이시바시 에이코(Eiko Ishibashi)의 라이브 (음악) 공연이다. 스크린에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상이 흐르고 이시바시는 혼자서 즉흥 연주를 한다. 이시바시 에이코가 자신의 음악을 연주할 때 어울리는 영상을 하마구치 류스케에 의뢰하면서 두 작품이 태어났다. 즉 공연을 위한 영상이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이다. 이시바시는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는 다재다능한 일본 음악가다.
GIFT> 공연은 11월 16일 오후 6시에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에서 약 74분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시바시는 화면이 켜짐과 동시에 연주를 시작했다. 화면에는 익숙한 이미지가 펼쳐졌다. 먼저 개봉한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를 극장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 공연을 위해 촬영한 영상을 별도로 편집해서 제작되었다. 그렇기에 대부분이 겹치는 화면이지만 전개되는 순서는 상당히 달랐고,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내용 중 어떤 부분은 없었다.
처음에 죽은 사슴 시체를 보여주는 장면은 강한 여운을 남긴다. 영화에서는 울창한 나무를 올려다본 화면이 꽤 오래 지속되는데 이 부분은 영화 보다 짧게 등장한다. 영화에서 연예기획사 직원이 차 안에서 대화하는 장면은 통째로 없다. 아무래도 연주를 위한 영상이다 보니 그렇게 편집된 것 같다. 또한 영상의 화질도 영화만큼 선명하지 않았고, 색감의 대비도 분명하지 않았다.
영화와 커다란 차이는 음악 연주를 위한 영상이라 화면에 소리가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영상의 내용을 따라가는 데는 무리가 없다. 자막을 통해 주요 내용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엔딩 부분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충격적이다. 이 부분은 영화를 본 사람도 여전히 이해가 잘 안되는 장면이다.
놀랍게도 화면에 펼쳐지는 영상(이미지)과 연주가 참 잘 어울렸다. 이시바시는 아마도 신디사이저를 사용한 것 같은데 한가지 음만을 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음을 통해 영상의 분위기를 창조해냈다. 때로는 초초함, 긴장감, 당혹감, 불안함,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공포감 등. 편안함을 느꼈던 적은 별로 없던 것 같다. 글로는 표현하기 힘든 다양하고 다채로운 감정을 표현하였다. 음악이 화면을 이끄는지 화면에 음악을 맞추는지 알 수 없었다. 이시바시의 라이브 공연이므로 그녀의 연주가 중심인 건 맞다. 하지만 사람은 청각보단 시각에 더 이끌리므로, 커다란 화면에 펼쳐지는 영상에 눈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스크린 크기는 영화관처럼 크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시바시 에이코와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함께 작업했는데, 그 경험이 이 공연에도 잘 녹아든 것 같다.
이시바시 음악을 위한 영상에 스토리를 넣겠다는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이디어는 신의 한 수다. 아름다운 화면만 보여준다면 음악에 보다 집중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처럼 음악과 영상이 서로 잘 어우러지면서 관객을 흡입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마구치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영상과 음악의 균형이랄까. 난 영상과 음악의 조화라고 부르고 싶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가 전하는 생경함
이 영화를 접하고 두 가지 점에서 깜짝 놀랐다. 먼저 화면의 아름다움이 나를 압도했다. 스크린을 뚫고 나올 듯한 쨍한 햇빛, 선명한 자연의 모습은 마치 그곳에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렇게 눈부신 화면에 모든 색이 살아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아마도 이것은 촬영장소가 주는 자연의 힘이 아닐까?
또 다른 점은 바로 영화의 결말이다. 하나의 실종은 완전한 반전과 긴장을 가져오지만, 엔딩은 관객을 극도로 혼란한 상태로 몰아넣는다. 타쿠미(오미카 히토시)는 왜 갑자기 타카하시를 공격했을까? 정답은 없겠지만, 하나를 구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타쿠미와 연예기획사 직원과의 대화에서 드러나듯이 총에 맞은 사슴 그리고 그 사슴의 어미나 아비는 사람을 공격한다. 어미 사슴은 이미 총에 맞았고, 하나는 그런 사슴에게 다가간다. 그런데 그 중요하고도 긴박한 순간에 끼어들려고 하는 타카하시를 타쿠미는 저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타카하시로 인해 사슴과 하나 모두를 놀라게 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즉, 타쿠미는 타카하시를 죽이기보다는 단지 기절 시키기를 원했던 것 같다. 그래서 타쿠미가 쓰러져 있는 하나를 데리고 떠난 후, 타카하시는 일어났다가 다시 쓰러진다. 나중에 들리는 헐떡이는 숨소리는 타카하시의 숨소리다. 타쿠미는 딸을 살려야 하니 그를 두고 갔고, 타카하시는 하나를 찾고 있던 사람들에 구해질 수 있을 테니까.
하나는 왜 총 맞은 사슴에게 다가갔을까? 하나는 8세의 아이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앳되고 순진한 아이 얼굴은 아니다. 어른 모습이 엿보인다. 영화 초반에 하나가 집에서 잠이 든 후의 시퀀스는 하나의 꿈이었다. 꿈을 꾼 다음 날 하나는 혼자서 꿈속의 장소를 찾아간다. 하나는 그곳에서 사슴을 만나진 못했지만, 대신 꿩 깃털을 주워서 돌아온다. 하나가 실종된 날 그녀는 다시 그 장소를 갔고, 거기서 총 맞은 사슴과 어린 사슴을 보고 얼어붙은 것 같다. 그런데 하나의 얼굴엔 공포보다는 안타까움이 묻어났다. 그런 연유로 자신의 모자를 벗어 사슴에게 다가간 것이 아닐까? 사슴이 자신을 해칠거라는 생각보다는 자신이 사슴의 상처를 보듬어 주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이 점에서 하나는 사슴과 일종의 텔레파시가 통한 것은 아닐까. 반복해서 영화를 보고 공연을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아온 주민으로 분한 타쿠미 역할의 오미카 히토시는 등장부터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통나무를 쪼개는 행위는 단순하지만, 그의 삶의 방식, 그곳의 삶의 방식을 대변한다. 그의 활동을 통해 숲이라는 장소가 주는 여러 복합적인 느낌이 잘 전달 되고 있다. 울창한 숲이 주는 아름다움, 땔감을 제공하는 나무들, 그곳을 흐르는 깨끗한 물, 청청한 공기, 맑은 하늘, 강렬한 햇빛, 하얀 눈과 그 위에 난 발자국, 물 위에 비친 숲의 풍경 등. 하지만 숲이란 밤이 되면 무서운 곳으로 변한다. 어둡고 춥고 눅눅하고 길을 잃기 쉽다. 그리고 무엇이 숲속에 튀어나올지 모르는 두려움과 공포감이 존재한다. 그곳에서 그는 딸 하나를 지켜야 한다.
한 아티스트의 영향력은 상당히 강력하다. <악은 존재하지 않는다>의 영상이 라이브 연주에서 어떻게 사용되었을까 하는 호기심이 <GIFT> 공연으로 이끌었다. 비록 공연장은 크지 않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정말 빠른 시간에 예매가 끝났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 공연에 관심이 있을 줄 몰랐다. 영화의 범주를 넘어 새로운 도전을 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에게 존경을 표한다.
김주희는 뉴질랜드 와이카토(Waikato)대학에서 ‘영상과 미디어’를 전공한 예술학 박사이다. 뉴질랜드는 피터 잭슨 감독이 <반지의 제왕>(2000~2003) 시리즈와 <킹콩>(2005)을 만들어 세계적으로 히트를 친 영화 제작 강국이다. 연세대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한 뒤 같은 대학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받았다. 여전히 소녀적 감수성을 간직한 채 유튜브 <영화와의 대화>를 운영하는 유튜버로 활동하면서, 뉴스버스에 영화칼럼도 기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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