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양대 스포츠 행사인 올림픽과 남자 축구 월드컵이 열리는 짝수 해에 광고계는 상대적으로 호황을 누린다. 아시아에서는 아시안게임이 열려 기름을 붓기도 한다. 짝수 해마다 열리는 미국 선거도 광고계의 대목이다. 특히 4년 주기로 대통령 선거가 찾아오면 중간선거보다 더 큰 광고 시장이 열린다. 한편으론 선거가 과열되다 보니 넘쳐나는 정치 광고에 염증을 내는 이들도 나타날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도 선거 때마다 유세트럭에서 흘러나오는 후보의 로고송이 거리 소음을 배가시켜 짜증날 때가 많다. 후보가 영상 광고에 나와 춤을 추기도 하는데, 괜히 보는 이가 낯 뜨거워지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런데 어울리지 않아서 차라리 히트를 한 선거 노래와 춤이 있다. 바로 1997년 대통령 선거에서 ‘Doc와 춤을’ 가지고 만든 ‘DJ와 춤을’이었다. 70대 노인 셋이라 오히려 경계가 허물어지고 차별화된 측면이 있었다.

개표 방송에서도 긴장감을 조성하려는 사회자의 요란한 목소리와 현란한 시각 효과가 소음 데시벨이나 짜증 측면에서 선거운동을 방불케 한다. 올해 미국 대선이야 꽤 일찍 판세가 트럼프 쪽으로 기울어져 개표 방송 긴장감이 비교적 덜했다. 그런데 2020년 바이든과 트럼프의 대결은 그렇지 않았다. 개표가 상당히 진행된 상태에서도 여러 주에서 ‘아직 결과 불투명’이라는 ‘too early to call’이라는 문자가 줄을 이었다. 이런 긴박한 CNN 개표방송의 후원 기업이라는 뜻의 ‘Brought to you by’ 다음에 오는 리스트에 수면과 명상을 위한 앱인 캄(Calm)이 있었다. 가장 시끄럽고 긴장감 넘치는 개표 방송 프로그램에 그와는 정반대의 환경을 조성하라는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한 셈이다.

2020년 미국 대선 때 CNN의 개표 방송 화면.
2020년 미국 대선 때 CNN의 개표 방송 화면.


캄 앱에서는 30초짜리 광고도 집행하고, 이를 트위터를 비롯한 SNS 채널로 내보냈다. ‘30초 동안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Do nothing for 30 seconds)’라는 자막과 함께 30초 동안 잎이 무성한 나무들이 들어찬 숲에 비가 내리는 광경이 빗소리와 함께 광고를 채웠다. 캄의 유튜브 채널에서는 8시간 동안 숲에 비가 내리는 광경을 송출했다. 마치 ASMR처럼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혀 주는 효과를 갖다 주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충분히 화제가 되긴 했다. 평소 캄이 날린 트윗에 대한 멘션이 500개 정도에 그쳤지만, 이 장면이 나온 후에는 20배가 넘는 9,700개 이상으로 급증했다.

이번 대선에서도 캄이 지난번과 비슷한 광고를 내보냈다. 바라보면 그냥 멍해 있을 약간 사이키델릭한 파란 색 화면을 30초 동안 내보냈다. 극도로 제한된 메시지는 자막으로 처리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30초의 정적(靜寂)을 드리기 위해 이 광고 시간을 샀습니다(We bought this ad space to give you 30 seconds of silence).’

2초 정도 시간이 흐른 후 더 짤막한 글귀가 나온다.

‘네, 그냥 정적이요(Yep, just silence).’

5초 이상의 시간이 지난 후 겸연쩍은 듯이 한 마디 더한다. 정치 광고나 방송에 지친 이들이 당연히 고마워할 것이라는 자신감이 바탕에 깔렸다.

‘천만에요(You’re welcome).’

영어로 ‘quiet, silent, calm’은 ‘조용하다’라는 비슷한 뜻을 가지나 약간의 어감 차이가 있다. ‘quiet’는 조용하기는 하나 그래도 약간 소리가 나는 상태이고, ‘silent’는 완전한 침묵이다. ‘calm’은 고요하다고 해야 할까, 소리 이상으로 에워싼 주변까지 차분하게 아우른다. 예전에 조선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고 할 때, ‘Land of Morning Calm’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대한항공에서는 아직도 ‘Morning Calm’이라는 표현을 여러 방면으로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다. 그런 게 ‘Calm’이다. 인간이 벌일 수 있는 가장 시끄럽고 어지러운 상황에서 두 번 연속 반전의 광고를 펼친 앱이, 많은 사람에게 ‘고요함(calm)’을 제공해 주기 바란다.

박재항은 삼성과 현대차그룹의 국내외 광고를 광고주와 대행사 양쪽에서 모두 경험하며, 변방의 싸구려에서 세계적 브랜드로 떠오르는 과정을 함께 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삼국지 키즈로 동양사를 학부에서 전공했고, 미국 뉴욕에서 대학원과 주재원 생활을 했다. 인문학과 글로벌 관점에서 마케팅을 연결하여 기획하고 해석하며, 대학 강의와 강연·기고 활동을 통해 전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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