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버스 심정택의 미술작가 평론 '미술딜라이트']
차명희 개인전 '기억속의 존재' 서울 금산갤러리서 27일까지
지난 9일 서울 도심의 전시 공간에서 차명희(77) 작가와 작품을 마주하였다. 2년여전 작업실에서 만난 뒤 쓴 글의 첫 문장은 “화폭에 드러난 공포스러울 정도의 자유로움은 작가가 살아온 시대의 부자유, 공허로부터 왔는지 모르겠다”였다. 작가 나이에 대한 고정 관념이 작용한 듯하다.
차명희 유채 작품들은 중국 전통회화인 묵화와 서양화 양쪽에 다 능했던, 대사(大師)로 불린 우관중(吳冠中·Wu Guan Jhong·1919~2010) 작품들을 떠 올리게 한다. 이 또한 차명희가 대학원에서 한국화(동양화)를 전공했다는 선입견과 관련된 연상이다. 작가는 학부시절 동양화, 서양화 구분 없이 공부했다.
차명희는 화폭 앞에서 어두운 모노톤의 색조가 떠 오른다든가, 유채색을 써야겠다든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떠한 느낌으로 작업할 지가 중요하다. 선을 강조하면 회갈색 또는 흑색의 모노톤 작업을, 봇물이 터지듯 거침없는 터치를 하고싶으면 강한 유채색 작업을 선택한다. 작업 영감과 모티브에서 오는 형태와 윤곽은 중요하지 않기에 ‘꼭 이렇게 해야되겠다’는건 없다. 편한대로 작업에 임한다.
관객이 전시장에서 한 작가의 작품들을 구분하려 드는건 선입견, 고정관념, 미술사 지식, 작가 서사의 이해 부족 때문이다. 차명희 작품 앞에서는 관객 자신의 경험을 내려놓고, 작가가 작업할 때의 느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 듯 오로지 지금 눈 앞에 펼쳐진 작품들을 온 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
1960년대 후반 이후 젊은 작가에게 동양화 전공이라는 사회적 '레테르'는 불리한 점이 많았다고 한다. 차명희는 1980년대 화단과 대학 일부에서 나타난 ‘수묵화 운동’도 스스로 잘 풀리지 않으니까 나타난 현상으로 본다. 채색이든 수묵이든 한국의 전통 회화이고 이의 구분과 어떤 것이 정통이냐 따지는 것은 현대미술이라는 괴물이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시대는 더욱 부질없는 짓이다.
2014년 6월 개인전 ‘시·공·실·연(時·空·實·演)’에 대해, 정석범(1961~2015) 한국경제신문 문화전문기자는 “저마다 굵기도 다르고 농담(濃淡·짙고 엷음)이 다른 꿈틀대는 불규칙적인 선들이 교차하면서 공간적 깊이를 만들어낸다. 수초(로 본)를 이루는 하나하나의 필선도 특별한 형상이라기보다 사물이 품고 있는 본질적 에너지처럼 다가온다”고 썼다.
차명희는 “(아크릴로 바탕 작업을 한 뒤)목탄으로 그은 선(線)은 본질(대상 또는 사물)을 더 단순하게 드러낸다. 가는 굵기의 목탄이 더 집중력을 높인다. 굵은 목탄은 칠한다(터치하)는 느낌이다. 접착제가 마르기 전에 그어야 하기에 감각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10년 전은 지금 만큼 능숙하지 못했다”고 한다.
목탄은 펼쳐지는 대상을 빠르게 형상화하는 회화적 수단이다. 나무를 태워 만든 목탄은 삶의 순환과 가장 닮은 자연적인 재료이다. 굵은 목탄은 손으로 문지르면 지워지면서 흔적을 남겨 그림에 이야기와 시간이 켜켜이 겹친다.
“선과 선을 많이 이용하다 보니 관객은 드러난 형상을 다양하게 이해한다. 숲, 나무, 바위 등 자연이 갖는 형태를 패턴과 리듬으로 풀어본 것이다. 필선으로 표현하는 데는 빠른 속도가 중요하다.”
차명희 작품은 메마른 수초가 떠있는 늦가을의 연못 풍경처럼 보이기도 한다. 선이 형태 안에서 노느냐 형태 밖에서 노느냐도 중요하다. 필자는 2년 전 작가의 작업 동작을 상상하며 글을 썼다. “화폭 속 선(線)은 낚싯대 앞에서 졸기만 하던 강태공이 순간적으로 월척을 낚아채듯 팽팽하며 그 튕김은 리듬을 탄다”
차명희는 ‘사물과 존재를 응시하는 창’으로서의 영상적 공간과 ‘기능적이고 평면적인 조형 공간’과의 중간쯤 되는 장(場)과 지점을 오가며 구성되는 세계를 작업의 대상으로 삼아왔다. 구도와 색은 자유로우면서도 묵직하다.
작가는 먹이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채색을 올려야 먹 특유의 번짐 효과를 기대하는 수묵담채 기법을 거꾸로 응용했다. 목탄으로 그은 선은 사라져 버리고 마는 의식과 시간을 멈추고 가두는 기제(機制)로 작용한다.
2000년대 이후 지속된 회갈색 또는 회청색 톤의 작업은 질 들뢰즈(Gilles Deleuze·1925~1995)의 말을 빌려 설명할 수 있다. <차이와 반복 / 1968년>에서 언급하였다.
“반복들은 매개물 없이 정신에 작용하며 정신을 자연과 역사에 직접적으로 통합한다. 단어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말하는 언어, 몸짓들, 얼굴들보다 앞선 가면들, 유령과 환영들 -'공포의 힘'에 해당하는 반복의 모든 장치들– 이다” (차이와 반복 p45 / 질 들뢰즈 / 김상환 역>
차명희가 낚아 올린 월척은 아직도 기운이 팔팔한 유령과 환영들로 보인다. 화폭의 팽팽한 긴장감은 날것 그대로 살아 움직이는 모든 물체를 쫓는 시선에서 나온다. 드리워진 낚시 줄 아래 수면 아래를 주목한다. 유령과 환영들은 유채색의 향연에서 춤추듯 실체를 막 드러내려 한다.
붓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탐미(耽美)가 선이 되고 색이 된다. 색은 내용과 형식을 아우른다. 무채색과 유채색, 자동기술(automatisme) 페인팅과 의지적 드로잉 구분이 의미가 없다.
철학자이자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1915~1980)는 자신의 자서전 서문에서 "이 모든 것은 소설 속 화자가 이야기하는 것이다(Tout ceci doit être considéré comme dit par un personnage de roman)"고 했다.
차명희는 작업 생애를 통해 마주하였던 화자로 등장하고 싶은 유령과 환영들이 화폭의 평면을 뚫고 춤출 수 있는 무대로 나오도록 안내한다. 그 무대는 장치가 갖추어져야 한다. 작가는 캔버스에 수면 위와 아래의 경계를 흐리며, 수면의 깊이에서 생기는 듯한 굴절을 평면화시켜 평면을 벗어난다. 화면에 보이지 않는, 하늘에 드리운듯한 덩어리는 그림자를 만들어 수면 아래 공간에 깊이를 더한다.
관객들은 일상의 리듬을 벗어난 이질적 시간 ‘헤테로크로니아(hetero-chronie)’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다. 유령과 환영들과 대화하고 춤출 수 있는 전시에 참여하는 건 흔한 일은 아니지 않나. 차명희 개인전 <기억 속의 존재>는 명동에 위치한 금산갤러리에서 9월 27일(금)까지 진행된다.
차명희는 천경자 탄생 100주년을 맞아 서울시립미술관이 기획한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전에도 23인의 작가들과 함께 ‘꼬리에 붙어’ 참여하고 있다.
심정택은 2009년 상업 갤러리(화랑) 경영을 시작한 뒤 지금까지 국내외 4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했다. 그 이전 13년여간 삼성자동차 등에 근무하였고 9년여간 홍보대행사를 경영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기사 60여편, 2019년 4월부터 작가 및 작품론 중심의 미술 칼럼 200여편, 2019년 10월 ~2023년 4월 매일경제신문에 건축 칼럼(필명: 효효) 160여편을 기고했다. <이건희전, 2016년> 등 3권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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