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실 “나치식 선전선동” 비판은 적반하장식 과민반응
'사전 경고' 효과 충분, 민주당도 증거없는 주장 중단해야
윤석열 정부가 계엄령 발동을 획책한다는 의혹이 제기돼 여야가 한 주 내내 공방을 벌이고 있다. 지난 1일 이재명 대표가 “최근 계엄 얘기가 자꾸 나온다”며 “전에 만들어졌던 계엄(문건)을 보면 계엄 선포와 동시에 국회의원을 체포·구금하겠다는 계획을 꾸몄다는 이야기가 있다”고 말한 게 계기가 됐다. 그러자 정혜전 대통령실 대변인이 “나치와 스탈린의 선동주의를 닮아가고 있다”고 맹비난했다. 박찬대·추경호 두 원내대표가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같은 주장을 주고받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주변을 보면 꽤 많은 사람들이 윤 정부의 계엄 발포 가능성을 믿고 있다.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을 보면서 계엄령이 아니라 그보다 더한 조치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윤 대통령의 최근 발언을 보면 무리도 아니다. 윤 대통령은 ‘을지 자유의 방패(UFS)’ 훈련 첫날인 지난달 19일 “우리 사회 내부에는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위협하는 반국가 세력들이 곳곳에서 암약하고 있다”며 “혼란과 분열을 차단하고 전 국민의 항전 의지를 높일 수 있는 방안을 적극 강구해야 한다”고 했다. 김영삼 대통령 이후 들어보지 못한 퇴행적 언어이다. 그러더니 사상 처음으로 대통령이 국회 개원식에 불참했다. 대통령실은 야당을 향해 ‘나치식 허위 선동’이라고 했지만 적반하장 격 주장이다.
여기에 윤 대통령이 지난달 충암고 1년 선배인 김용현 전 경호처장을 국방부장관 후보자에 지명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김 전 처장은 대통령실을 용산으로 옮긴 아이디어를 낸 장본인으로, 윤 대통령과 공동운명체나 마찬가지다. 또 국군방첩사령관(옛 기무사령관) 여인형 중장도, 대북 감청부대인 777사령부의 박종선 사령관도 충암고 출신이다. 방첩사는 평시에는 군내 방첩을 맡지만 계엄시에는 주요 사건 수사를 지휘하고 정보·수사기관을 조정·통제할 합동수사본부를 주관하도록 돼 있다. 합수부장은 ‘서울의 봄’ 당시 전두환이 맡았던 바로 그 자리다. 또 국방부장관과 더불어 대통령에게 계엄 발령을 건의할 수 있는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도 충암고 출신이다. 계엄을 발동하는 핵심 기관의 장이 충암고 출신으로 채워진 것이다. 국민의힘이 야당이라면 이런 인사를 모두 우연으로만 보아 넘길 수 있을까?
국민의힘은 계엄이 엄격한 법적 절차와 국회 통제 하에 신중하게 운용하게 돼 있다고 주장한다. 국회가 계엄을 승인하지 않으면 발동이 안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역대 독재 정권은 이런 조건을 다 무력화시켰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군내 사조직 ‘하나회’를 이끌고 대통령을 겁박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권을 잡았다. 이 과정에서 광주 5·18이 일어났다. 검찰에 이어 군 핵심 지휘부까지 최측근으로 포진시킨 윤 대통령을 향해 ‘계엄령 공포’를 갖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계엄을 최종단계까지 운용하느냐와는 별개로 계엄 발동을 시도하는 데까지는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 점에서 박근혜 탄핵 과정에서 기무사가 작성한 계엄령 검토 문건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2018년 7월 문재인 청와대가 국방부로부터 받아 공개한 문건은 21개 항목 67쪽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위수령 발동으로 시작해 단계별 대응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 첫번째 항목은 ‘신속한 계엄선포와 계엄군의 주요 길목 장악 등 선제적 조치 여부가 계엄 성공 관건’이라고 적시했다. 중요시설 494개소 및 집회 예상지역인 광화문과 여의도에 계엄군을 전차와 장갑차를 이용해 신속하게 투입하고, 계엄해제 표결을 막기 위해 국회의원들을 현행범으로 체포해 정족수를 미달시키는 계획까지 세워놓았다. 합참 계엄과에서 2년마다 정기적으로 수립하는 계엄실무편람과 별도로, 오로지 박근혜 탄핵이 기각된 경우 상황만 가정해 만든 계획이었다. 국회 다수당이 의결하면 계엄은 무효가 된다고 하는 국민의힘 주장은 형식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군 장성들은 오늘날 계엄령을 실제로 발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문재인 정부 때 송영무 국방장관도 2017년 기무사 계엄문건을 보고받고 그냥 넘기자고 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민주당 내 전현직 국방위원들도 “계엄 편람을 업데이트하기 위해 통상적인 연습은 가능하나, 박근혜 정부 때 ‘기무사 문건’ 수준의 계엄 준비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입을 모았다고 한다. 계엄령이 내려진다 해도 시민들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군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계엄령 기획설은 김용현 후보자가 지명된 직후 유튜버들이 처음 제기했다. 이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이언주 의원이 같은 주장을 폈고, 마지막에 이재명 대표가 가세했다. 이런 의심을 키운 데는 윤석열 정부의 책임이 크다. 그러나 한국의 시민들은 계엄령에 굴복할 사람들이 아니다. 촛불 하나 들고 박근혜를 탄핵한 시민들이다. 민주당은 시민을 믿고 제 길을 가야 한다. 정성호 의원 말대로 “그런 사고를 할 수 있는 분들이기 때문에 미리 경고한 것”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예방 주사를 놓는 데 성공했다. 이제 그만 멈춰야 한다. ‘응급실 뺑뺑이’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다. 계엄 의혹에 목을 매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중근은 경향신문에서 34년 동안 기자로 일하고, 2024년 퇴직했다. 편집국에서 정치(정당·외교안보·총리실·중앙선관위·청와대), 사회(경찰·검찰), 국제부를 거친 뒤 논설실장·논설주간으로 경향신문의 논평을 책임졌다. 국가의 정책이 어떤 과정을 거쳐 수립되고 집행되는지를 관찰한 것을 소중한 경험으로 여긴다. 글의 무거움을 절감하며 정파적 보도를 지양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평범한 것을 비범하게 하자’는 게 '신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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