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상병 의혹·의료대란·당정갈등도 없다는 딴세상 인식
이재명·한동훈 회담 합의, 尹 ‘정치 시장’서 배제 가능성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29일 취임 후 두번째 국정브리핑을 했다. 지난 6월 영일만 석유·가스전 개발 발표에 이은 두번째 국정브리핑이었다. “4대 개혁 및 저출생 대응의 당위성을 알리겠다”고 하고, 또 넉달 만에 기자들을 만나 질문을 받겠다고 해서 혹시나 하고 기대했다. 끝없는 여야 대치에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와도 갈등하는 상황에서 이번에는 소통이 이뤄지나 했지만 희망은 여지 없이 무너졌다. 40분간의 국정브리핑은 구체성 없이 공허했고, 85분간의 기자회견은 또다시 독불장군의 혼잣말이 되었다. 다른 행성에서 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는 야당 논평이 무리가 아니다. 국민을 절망케 한 130분이었다.
가장 황당한 것은 채상병 특검법을 보는 시각이었다. 야당은 물론 자신의 오른팔이었던 한동훈 국민의힘 대표까지 제3자가 추천한 특검을 통해 진상을 규명하자고 수사 필요성을 인정한 사안이다. 그런데 윤 대통령은 “국회에서 야권이 개최한 청문회에서 외압의 실체가 없는 것이 자연스럽게 드러난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임성근 전 해병1사단장을 무혐의 처분한 것에 대해서도 “경찰에서 아주 꼼꼼하고 장기간 수사해서 수사 결과를 책 내듯이 발표했고, 제가 볼 때는 언론이나 많은 국민이 수사 결과에 대해서 특별한 이의를 달기 어렵다고 본다”고 했다. 용산 대통령실이 개입했다는 합리적 의심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이런 인식을 보이다니 어처구니가 없다. 그렇다면 국회 청문회에서 이종섭 전 국방부장관 등은 왜 증인선서를 거부했으며, 용산 대통령실 전화 800-7070의 발신자는 왜 못 밝히나? 윤 대통령은 “공수처 수사가 미비하면 먼저 나서서 특검을 자청하겠다”고 한 바 있는데, 이 말이 진심이 아님을 온 국민 앞에서 확인시켜주었다.
이날 브리핑의 핵심이었던 4대 개혁에 대한 상황인식과 평가도 놀라웠다. 윤 대통령은 “정치적 유불리는 따지지 않고 반드시 개혁을 추진하겠다”며 “개혁은 필연적으로 저항을 불러온다. 역대 정부가 개혁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이유가 이 때문”이라면서 자신이 옳다고 주장했다. 시민들에게 큰 불편을 주고 있는 의정 갈등에 대해서도 “응급실 상황은 갑자기 발생한 게 아니다”라느니 “의사들이 다 돌아올 때까지 버틸 수 있다”고 말했다. ‘응급실 뺑뺑이’가 빈발하는 상황과 환자 가족들의 고통을 완전히 무시했다. 의대생 증원은 하면서 의사들이 주장하는 의료계의 구조적 모순도 해결하는 접근이 필요한데 외곬수로 가겠다는 생각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정치상황에 대한 평가도 객관성 없이 현실과 동떨어지기는 매한가지였다. 한동훈 대표와의 갈등 상황에 대해서는 “당정 갈등은 없다”면서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 게 자유민주주의 아니냐는 말로 치부했다. 어찌됐든 60%가 넘는 지지율로 여당의 대표로 뽑힌 사람을 국정의 동반자로 보지 않고, 부하로 대하는 시각이 그대로 묻어났다. 민주당과 이재명 대표에 대해서도 “국회 인사청문회 등을 바라보고 있으면, 제가 보던 국회와 달라서 저도 좀 더 깊이 생각해봐야겠다”며 이 사태의 원인을 오롯이 야당으로 돌렸다. 김문수 노동부장관 후보자와 이진숙 방송통신위원장, 김형석 독립기념관장 등 누가봐도 부적격인 사람들을 잇따라 공직에 임명해 달라는 자신의 이상한 선택과 고집은 돌아보지 않고 남탓 하는데 아무런 주저함이 없다. 같은 어법으로 "국민들이 보던 대통령과 너무 다르다"고 되돌려주고 싶다. 그러면서 “영수회담을 해서 이런 문제가 금방 풀릴 수 있다면 열번이고 왜 못하겠습니까?”고 하니 문제가 풀릴 수 없다. 아직도 자신이 명령하면 모든 사람이 다 복종하는 검찰총장인 줄 착각하는 게 아닌가 싶다.
윤 대통령이 소신과 의지를 가지고, 먼 미래를 보고 정치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현실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하면 어떤 정책도 성공시킬 수 없다. 이날 회견을 보면, 윤 대통령은 이미 당대의 평가는 포기하고 역사와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역사와의 대화에 몰입하는 시기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빠르고, 그 강도 또한 높다. 그러나 큰 업적을 남긴 지도자들이 당대에 갈등만 일으킨 것은 아니다. 세종대왕은 이미 당대에 성군으로 평가되었다. 시민의 호응이 없이 먼 미래를 보면서 정책을 추진한다면서 야당과의 소통과 협상, 즉 당대의 정치를 포기하는 것은 결코 현명하지 않다. 지금 윤 대통령의 의료 개혁은 명분은 있지만 현실적 수단이 마땅치 않다. 그래서 역대 정권도 타협했고, 지금 여당도 돌아서 가려는 것 아닌가. 혼자 고집할 게 아니라 그 말에 귀기울여야 한다. 국정 동력도 없이 호기로 밀어붙이기만 하면 그 결말은 뻔하다.
민주당과 국민의힘이 논란을 벌이던 이재명과 한동훈 두 대표의 회담을 다음달 1일 열기로 합의했다. 윤 대통령의 기자회견이 끝난 직후 회담 성사가 발표됐는데, 이게 우연일까. 두 사람에게 윤 대통령은 ‘공동의 적’이 되었다. 이런 때에 국정 동력이 떨어진 윤 대통령이 계속 밀어붙이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 지 모른다.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라고 하고 ‘살아있는 생물’이라고 하지만, 그 말에는 그런 움직임 속에 누군가는 패자가 된다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최고 권력이라는 열차는 이미 다음 역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윤 대통령이 지금처럼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면 박지원 의원의 말대로 ‘정치 시장’에서 조기 배제될 수도 있다.
이중근은 경향신문에서 34년 동안 기자로 일하고, 2024년 퇴직했다. 편집국에서 정치(정당·외교안보·총리실·중앙선관위·청와대), 사회(경찰·검찰), 국제부를 거친 뒤 논설실장·논설주간으로 경향신문의 논평을 책임졌다. 국가의 정책이 어떤 과정을 거쳐 수립되고 집행되는지를 관찰한 것을 소중한 경험으로 여긴다. 글의 무거움을 절감하며 정파적 보도를 지양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평범한 것을 비범하게 하자’는 게 '신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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