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수탈의 역사와 해방 후 산업화 흔적을 간직한 광명동굴로 들어가는 입구.(사진=황현탁)
일제강점기 수탈의 역사와 해방 후 산업화 흔적을 간직한 광명동굴의 입구.(사진=황현탁)

1910년 한일병탄조약이 체결되기 전인 1903년 경기도 광명시 가학동(駕鶴洞)에 시흥광산(始興鑛山)이 설립되었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한다.

이후 한일합방이 되고 조선총독부가 광상조사기관을 설치하여 그곳에서 금, 은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자 1912년 일본인 고바야시 토우에몬(小林藤右衛門) 명의로 다시 시흥광산이 설립되어 금, 은, 동, 아연을 채굴, 생산하게 된다. 전성기에는 광산노동자가 500인 이상이었고, 하루 250톤 이상을 채굴하기도 하였다. 채굴된 광물은 모두 일본으로 보내져 무기생산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해방과 더불어 광산은 한국인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운영되어 왔으며, 한국전쟁당시에는 피난처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960년대 초에는 임금삭감문제로 노사교섭이 결렬되어 노동조합총연맹이 광산을 고발하자 사측에서는 직원을 해고하고 직장을 폐쇄하는 사태가 있었다. 이런 연유로 시흥광산은 광명지역노동운동 발상지로도 알려져 있다. 광산주변에는 폐석이나 광물부스러기가 방치되어 있었는데, 1972년에는 홍수로 갱내수가 흘러나와 농경지로 흘러들어 카드뮴, 납, 아연 등 중금속으로 오염되어 보상 문제가 발생하자 폐광하였다. 

시흥광산은 갱도의 면적이 42,797㎡, 총 깊이는 275m, 갱도의 길이는 7.8km, 갱도의 층수는 입구 층(0레벨)에서 위로 1층 아래로 7층 등 모두 9개 층이다. 1955년부터 1972년까지 그곳에서 채광한 광물은 금이 52kg, 은 6,070kg, 동 1,247톤, 아연3,637톤으로, 폐광 전까지 주로 동과 아연을 생산하였다고 한다. 1978년부터 2010년까지는 소래포구에서 생산된 젓갈을 보관하는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는데, 수도권주민이 1~2회 김치를 담글 수 있는 3,000 드럼까지 보관할 수 있다고 한다. 

광산 소재지는 1981년 7월 광명시가 탄생하기 전까지 시흥군 서면 가학리였다. 2011년 광명시가 광산을 매입하여 일반에게 공개하기 시작하면서, 시흥광산(mine)이 광명동굴(cave)로 탈바꿈하게 된다. 시는 그곳에서 콘서트를 개최하거나 영화상영, 패션쇼, 주얼리쇼 등 문화예술공간으로 활용하기 시작하였으며, 2014년에는 동굴수족관을 설치하고, 빛의 세계전, 동굴레이저쇼 등을 열게 된다. 2015년에는 와인동굴을 오픈하여 한국산 와인을 전시, 판매하기 시작한다. 동굴 내 온도는 와인의 보관에 적절한 온도인 12~13도다.  

광명동굴 내 문화예술공연 등이 이뤄지는 동굴예술의전당.
광명동굴 내 문화예술공연 등이 이뤄지는 동굴예술의전당.

문경 탄광의 경우, 갱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나무나 쇠로 지지대를 세워 갱도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시흥광산은 암반지역이어서 지지대 같은 것은 없었으며, 관람객의 안전을 위해 낙석방지용 그물망을 촘촘해 설치해 놓았다. 또 금, 은, 아연 등이 함유된 암석의 경우 암석이 반짝일 것으로 생각되는데, 암반에서 그런 반짝이는 금속은 보지 못했으며, 습기와 전기불로 인해 번쩍일 뿐이었다. 

동굴입구로 들어서니 시원한 바람이 세차게 바깥쪽으로 불어 제키고 있었다. 별도의 환기시설을 설치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관람행로에 신선한 바람이 계속 불어 상쾌하기까지 하였다. 갱도를 구축할 때부터 통풍에 많은 신경을 썼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가사키의 폐탄광인 군함도에서는 조그만 섬 지하 1,000m까지 파 내려가 채탄을 하였다는 데, 암반에서의 275m정도는 ‘새발의 피’였을 것이다!  한편으론 일제강점기 탄광이니 ‘구축할 때 얼마나 철저했을까!’라는 일본인들의 철두철미함의 결과라는 생각도 했다. ‘동굴예술의 전당’ 같은 곳은 넓고 높은 엄청난 단일공간인데, 채광과정에서 인명사고는 없었을까 하는 궁금증도 들었다.  

시흥광산(가학광산으로 불리기도 함)은 1912년 일제가 자원수탈을 목적으로 개발을 시작한 일제강점기 징용과 수탈의 현장이자, 해방 후 산업화․근대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산업유산이다. 광명동굴은 산업유산으로서의 가치에 문화적 가치를 결합시킨 대한민국 최고의 관광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연간 100만 명 이상이 찾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많은 조선인이 고통을 겪고, 자원의 수탈이 행해지고 버려졌던 ‘조선의 광산’을 세계에서 손꼽히는 동굴테마파크로 변신시켜, 많은 사람이 찾도록 한 것이 바로 ‘극일이 아니겠는가!’ 단순히 역사자료관을 만들어 주입시키기보다 즐기고 가까이 할 수 있는 체험시설로 꾸며, 침탈의 역사와 선조들의 고초를 간접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하는 발상의 전환이 얼마나 큰 효과를 내는지를 관람객 수가 증명하고 있다. 

광명동굴에 전시된 동굴의 제왕 '용'. 길이가 41m에 달한다.
광명동굴에 전시된 동굴의 제왕 '용'. 길이가 41m에 달한다.

금을 채굴했던 광산답게 동굴 안에는 황금나무, 황금궁전, 황금폭포, 황금의 방을 꾸며 놓았고, 반지의 제왕, 호빗 등의 판타지 영화를 제작한 뉴질랜드 ‘웨타워크숍’이 제작한 실물크기의 골룸과 간달프 지팡이, 국내 최대의 용(길이 41m, 무게 800kg)인 ‘동굴의 제왕’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광물을 실어 나르는 광차, 바위에 구멍을 뚫는 착암기, 바위 속에서 새어나와 광부들의 생명수로 이용되던 암반수, 애환을 달래주던 낙서 등 광부들의 일상을 알려주는 흔적들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미디어 파사드 쇼나 일부 관람시설은 코로나19로 인해 운용하지 않고 있어 아쉬웠으나, 동굴은 여름 더위 피서지로는 적격이었다.  

황현탁은 미국, 일본, 영국, 파키스탄에서 문화홍보담당 외교관으로 15년간 근무했다. 각지에서 체험을 밑천 삼아 이곳 저곳을 누비며 여행작가로 인생2막을 펼쳐가고 있다. 『세상을 걷고 추억을 쓰다』, 『어디로든 가고 싶다』 등 여행 관련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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