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술자리, 민란의 시작
1800년(순조 즉위년) 8월 15일 저녁. 경상도 인동(현 구미시 인동)의 사대부 장시경(張時景)의 집에서 작은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장시경은 집안의 노비들과 인근의 남자들을 불러 술을 빚어 대접했다. 술자리에 참여한 노비들은 갑작스런 술자리가 영 이상했다. 얼마 전 임금이 죽어 매우 슬퍼하고 집밖으로 나가지 않던 주인 장시경이 갑자기 술을 베풀었기 때문이다.
노비들도 분위기가 이상해서 어떤 연유로 술을 주는지 물었다. 장시경은 아무런 소리를 하지 않고 그냥 오늘은 많이 마시라고 하였다. 그리고 나의 분부를 들으면 된다고 하였다. 참으로 이상한 술자리였다.
어느정도 술자리가 끝나자 장시경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따르라고 하였다. 마을 인근에 있는 묘향산의 장씨 집안의 쌀창고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이곳에서 충격적인 발언을 하였다. 바로 돌아가신 임금의 원수를 갚자는 것이다. 한달 여 전에 돌아가신 임금, 정조(正祖)의 원수를 갚자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때 알았다. 민란이 시작된다는 것을!
장시경은 누구인가?
장시경을 인동 사람들은 ‘생불(生佛)’이라 불렀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에게 살아있는 부처님이라고 불렀으니 장시경의 인품이 얼마나 좋았는지 알수 있다. 장시경은 단 한번도 노비나 마을 사람들에게 하대를 하지 않았다. <일성록>에 의하면 그가 서학(西學)에 빠진 사람이라고 하지만 이는 확인할 수 없다. 당시 서학을 믿었던 사람들이 노비를 해방시키거나 노비에게 하대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약용과 정약전의 스승이었던 권철신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어쨌든 장시경의 인품이 양반 사대부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게 군림하지 않았던 사람임은 분명했다.
장시경은 영남 남인의 대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후손이었다. 여헌 장현광은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은 남인의 영수였다. 실제 남인 실학을 창시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니 장시경은 장현광의 후손에다가 높은 학문과 고매한 인품까지 갖춘 지역의 명망가였다. 이러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가 민란을 일으키자고 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를 믿고 민란에 참여한 것이다.
장시경은 정조의 죽음에 충격을 받았다. 정조가 죽기 8년 전 영남 지역에서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해야 한다는 선비 1만368명의 연명상소(聯名上疏)가 있었다. 이름하여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이다. 이를 주도한 이우(李瑀)와 장시경은 매우 가까운 사이였고, 장시경 또한 영남만인소에 주도적이었다. 장시경은 노론에 의해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정조의 왕권을 강화하여 백성들을 위한 개혁정책을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기를 바랬다.
그런데 그렇게 믿고 따르던 군주 정조가 갑작스럽게 죽은 것이다. 장시경은 이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다. 충격적인 시간을 보내고 있는 때에 장시경은 정조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채홍원(蔡弘遠)의 편지때문이었다. 채홍원은 정조가 신뢰한 영의정 채제공(蔡濟恭)의 아들이자 다산 정약용의 친구였다.
채제공은 정조가 “공적으로는 군신(君臣)의 관계이나 사적으로는 부자(父子)의 관계다”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아버지처럼 따랐던 사람이다. 채제공이 영조 재위시 도승지(都承旨)를 할 때 영조가 사도세자의 폐위(廢位)를 지시하자, 영조의 발목을 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서 세자위 폐위 지시를 철회해달라고 했다. 이는 조선시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선시대 군주의 얼굴을 보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국왕의 발목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처럼 목숨을 걸고 사도세자를 보호했던 채제공은 당연히 정조의 신뢰를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채제공은 정조를 도와 상당한 개혁정책을 만들었고, 영남만인소 작성을 은밀히 지원해주었다. 채홍원 역시 아버지 뒤를 이어 영남 남인들과 소통하며 영남 지역 사대부들이 사도세자의 명예회복만이 아니라 백성을 위한 새로운 나라 만들기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조선왕조실록>과 또다른 관찬사서 <일성록>에 의하면 채홍원은 장시경에게 정조의 죽음이 노론에 의해 독살된 것이라고 전해주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아마도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채홍원을 유배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관료들도 있었다. 정조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된 어린 순조는 처음 채홍원에 대해 선대왕의 측근이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옹호하였지만 후에 채홍원은 끝내 사약을 받고 죽음에 이르렀다.
중요한 것은 장시경의 판단이었다. 장시경은 정조가 노론에 의해 죽음을 당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자 하는 정순대비와 노론이 정조를 독살하게 만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국왕을 죽음으로 만든 세력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로 자신의 집안 노비들과 마을 사람들을 무장시켜 인동 관아를 점령하고, 영남지역의 여러 세력들과 함께 한양으로 진격하여 노론이 장악한 궁궐을 쳐들어가 정조 죽음의 진실을 밝히고 정의를 바로 세우려고 하였다.
정조(正祖) 죽음 직전의 정치적 상황
정조는 죽기 직전 정치적으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1795년(정조 19) 화성행궁에서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치른 이후 화성건설을 통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고 장기적으로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숭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도에 반하는 반대세력이 커져 나갔기 때문이다.
노론벽파 입장에서는 사도세자가 국왕으로 추존된다면 과거 1762년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갔던 자신들의 행위가 오히려 역적 행위로 몰릴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기때문에 정조와 대립의 강도가 더 심해질 수밖에 없었고 정조는 이를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정조는 노론벽파의 세도를 바로잡기 위해 ‘솔교(率敎)’와 ‘교속(矯俗)’을 강조하였다. 즉 국왕의 말씀을 따라야 한다는 것과 잘못된 습속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자신에 대한 반항을 차단시키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반대 세력들의 힘은 만만치 않았다.
정조는 당시 신하들이 관직을 얻기 위해서라면 부모도 없고 임금도 없을 정도로 세도있는 신하들에게 아첨하는 참으로 어이없는 세상으로 보고 있었다. 이러한 평가는 자신의 절대 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이제 몇 년만 지나면 자신이 계획했던 모든 일이 마무리되어 갈 수 있는데 신하들의 조직적 반대가 그를 더욱 피곤하게 하고 절망감이 들게 한 것이다. 자연스럽게 몸은 지쳐가고 건강은 이상 징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오죽했으면 정조 스스로 “날은 저무는 데 갈 길은 멀다”고 했겠는가!
정조는 이와 같은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하기 위해 5월 그믐날의 경연 자리에서 자신이 이조판서로 임명한 이만수를 탄핵한 홍문관 교리 김이재를 귀양보내는 조처를 취했다. 정조는 그러면서 모든 대소관료들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강요했다. 이 일이 그 유명한 ‘오회연교(五晦筵敎)’이다. 당시 우의정 이시수가 자신의 동생 이만수를 탄핵한 김이재에 대한 귀양 조처가 너무나 가혹한 것이라 상소를 올렸으나 정조는 단순히 김이재의 문제가 아닌 반대세력들의 조직적 대항으로 판단했다. 실제 상황 역시 노론벽파의 정조에 대한 도전이었다.
하지만 정조의 의도와 달리 노론 신하들은 움직일 줄 몰랐다. 정조는 6월 12일에 신하들을 불러 국왕에게 의리(義理)를 천명하든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밝히든지 하라고 다시금 강조했다. 다시 말해 자신의 정책에 대해 지지를 표시하고 국왕을 따르든가, 아니면 국왕의 정책이 잘못되었다고 공개적으로 말하라는 것이었다. 정조의 이 정치적 발언은 마지막 발언이 되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생긴 종기로 인해 그는 죽음의 상황으로 내몰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죽고 말았다.
정조 죽음의 미스테리
참으로 이상한 것은 정조가 종기가 난 것을 거의 치료했던 상태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우의정 이시수는 장용영 장교였던 심연(沈鍊)이 종기를 치료하기 위해 사용했던 ‘연훈방(煙薰方)’ 치료법을 제안했다. 정조의 종기치료에 더 이상 고약이 효능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연훈방은 당시 직제학 서정수를 치료했던 방법이기도 했다. 이시수의 이와 같은 치료법에 정조는 마침내 6월 24일 연훈방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연훈방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종기에 가득했던 피고름이 하루 만인 6월 25일에 엄청나게 흘러내린 것이다.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 싶었던 정조는 급하게 신하들을 불러 진찰하게 하였다. 진찰 결과 모든 신하들은 정조를 괴롭힌 종기의 근이 이미 녹았다고 판단했다. 며칠만 조리하면 쾌차한다고 판단한 신하들은 정조의 마지막 치료와 몸조리에 정성을 기울였다. 정조의 종기 치료에 대한 노력도 대단했다. 연훈방이라는 것이 방문을 닫아놓고 수은을 태워 그 연기를 쐬는 것이기에 숨도 쉬기 힘들 정도의 고통이 수반되었다. 하지만 자신이 살아나야 새로운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정조는 온갖 고통을 감내하면서 연훈방을 통한 고통의 치료를 감내했다.
마침내 창문을 열어놓아 맑은 공기를 마실 정도로 호전된 정조는 스스로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하면서 소요산(逍遙散)을 먹으면 좋아질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열흘 가까이 음식을 먹지 못한 정조는 조금씩 미음을 먹어가며 원기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서 정조는 자신의 체질을 신하들에게 설명하며 가장 좋은 탕약을 만들어줄 것을 지시하였다. 정조는 영조와 혜경궁을 간호하기 위해 의학을 공부하였고, 이를 통해 <수민묘전(壽民妙銓)>이라는 의학서를 편찬할 정도로 의학의 대가였다. 따라서 자신의 몸 상태를 정확하게 이해하였고 스스로 원기를 회복하는 처방을 의관들과 상의하고 지시하였던 것이다.
마침내 운명의 6월 28일이 왔다. 지방 의관 김기순과 강최현이 들어와 내의원 의관 강명길과 더불어 진맥을 하였다. 정조가 내의원 의관을 신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원기가 부족하기는 하였으나 점차 회복되는 분위기였다.
지난밤부터 방안에서 몸을 일으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던 정조는 스스로 창경궁 영춘헌으로 거동할 정도로 상태는 호전되었다. 그리고 승지로 김조순을 새로 임명하고 신하들을 불러 접견하고 이야기하였다. 하지만 오랜 치료가 그를 피곤하게 했고 열흘 가까이 잠을 이루지 못했던 정조는 잠을 자다 깨다 했다.
이때 정조의 치료기간 중 단 한번도 찾아오지 않았던 정순대비가 찾아왔다. 정조의 병이 과거 영조가 1766년에 겪었던 증세와 비슷해서 그때 복용했던 ‘성향정기산(星香正氣散)’을 복용하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춘헌에 있던 모든 신하들을 내보내고 혼자 약을 들고 정조의 침전으로 들어갔다. 왕실 법도상 어떠한 경우에도 사관은 반드시 국왕 곁에 있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정순왕후는 사관마저 전각 밖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잠시 후 정순왕후는 전하가 승하하셨다는 통곡을 하며 영춘헌 밖으로 뛰쳐나왔다. 승지 이만수가 급하게 정조의 침전으로 들어가니 정조는 무엇인가 급하게 소리를 지르는 듯 하였다. 정조가 혼신의 힘을 다해 마지막으로 토한 말은 바로 ‘수정전(壽靜殿)’ 세 마디였다.
수정전은 바로 정순왕후의 거처였다. 아마도 정조는 혼미한 상태로 누워있는 동안 정순왕후가 자신에게 어떤 조처를 취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정조는 정순왕후가 들어온 뒤 곧바로 숨을 거두었다. 조선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왕의 죽음에 여인 한 사람만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조의 죽음에 대한 미스테리이다.
장시경의 결단
정조 죽음 이후 영남지역은 정조가 정순대비의 지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그 소문은 곧 확신으로 변했다. 그리고 정조와 함께 개혁을 추구하던 남인들이 모두 쫓겨나고 노론들이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국가의 운영이 엉터리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모두가 속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노론들은 정조의 죽음을 기뻐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영남지역 남인들은 ‘국상(國喪)’을 당해 삼베옷과 대나무로 만든 죽관(竹管)을 쓰고 국왕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는데, 노론인 인동부사 이갑회는 아버지 회갑이라 하여 기녀들을 불러놓고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장시경과 그의 아들 장현경은 국상중에 술을 마시고 잔치를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호통을 쳤다. 이 일로 장시경은 더욱더 노론이 정조를 독살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8월 15일 노비들에게 술자리를 베풀어준 후 마을 옆에 있는 묘향산으로 가서 정조에 대한 원수를 갚겠다고 천명했다. 노론이 임금님에게 바치는 약에 독을 타서 죽였으니 우리가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 국가에서 어약(御藥)을 과도하게 써서 갑자기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당하게 되었는데 어린 세자가 사위(嗣位)하고 노론이 득세하게 되자 남인은 남김없이 쫓겨났으며 민생(民生)은 날로 고달프게 되었으니, 이렇게 국세가 외롭게 되었을 때를 당하여 나와 너희들이 어떻게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방금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올라가서 국가의 위급함을 구하려 한다. 일이 만약 성공하게 되면 이것이 충신(忠臣)이 되는 것이다”
장시경이 모은 인원은 61명이었다. 거의 대부분 인동장씨 집안의 가족들과 그들의 노비들이었다. 장시경은 인원을 더 모으기 위해 사촌 형제들을 찾아갔다. 거의 대부분 장시경의 말에 따라 합류하였지만 일부 형제들은 목숨을 건 투쟁이었기 때문에 거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그의 인품이 너무도 높아 대부분 형제들과 노비들이 그를 따랐다.
하지만 이 인원은 인동관아와 경상감영이 보유한 군대와 싸우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인원이었다. 실제 무예를 할 수 있는 장사는 장우성 한명 밖에 없었다. 이들은 농사만 지었기 때문에 칼을 휘둘러본 적이 없었다. 장시경이 이들의 손에 쥐어준 것도 칼이 아니라 그저 몽둥이일 뿐이었다.
장시경의 생각은 자신이 한양으로 진격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신과 뜻을 같이해서 합류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엄청난 오류였다. 그토록 준비를 많이했던 이인좌의 난도 실패하였는데, 인동에서 글만 읽던 선비가 당시의 정세 파악과 인간의 욕망 혹은 심리를 읽지 못했기 때문에 너무도 안이하게 준비를 했던 것이다. 정의만으로 사람들은 살아가지 않는 다는 것을 장시경도 알았어야 했다.
몽둥이를 들고 인동관아로 간 장시경은 관아를 점령하고자 하였다. 새벽에 갑작스럽게 방문한 장시경과 무리를 보고 인동 관아의 군사들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관아 정문 근처에는 10여 명의 군사 정도가 있었다. 장시경은 집안에 살인사건이 나서 수령에게 진상을 고하려고 하니 문을 열어달라고 하였는데, 군사들은 돌아가라고만 할 뿐이었다. 인동 관아의 군사들도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낀 것이다.
그때 장시경의 큰아들 장현경의 지시로 관아의 담장을 부수기 시작했다. 얼기설기 만들어진 관아의 담장은 쉽게 무너졌다. 60여 명의 사람들이 관아로 쳐들어갔지만 이들은 군사들의 싸움 대상이 되지 못했다. 관아 뒤편에서 나온 군사들에 의해 모두 포박되거나 노비들은 도망가기 시작했다.
상황이 자신들의 뜻과는 전혀 반대 방향으로 흘러가자 장시경과 장현경은 도피할 수 밖에 없었다. 의기는 높았지만 너무도 허무한 민란의 패배였다. 장시경은 그의 형제 2명과 인근의 천생산성(天生山城) 낙수암(落水巖) 위로 올라갔다.
장시경은 “장차 대사(大事)를 도모하려 했는데 일이 어긋나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일찍이 곧 자처(自處)하는 것이 낫다”고 하며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자살을 하였다. 그의 동생 장시욱은 사촌동생 장시호가 차고 있는 칼로 두 번 목을 찔렀고 한 번 가슴을 찔렀는데, 오히려 죽지 않자 다시 낭떠러지로 떨어져 자살을 하였다. 장시호는 차마 자살을 하지 못하고 살아남았다. 물론 그도 관아로 잡혀가 국문을 당한 후 바로 사형을 당하였다.
아들 장현광은 아버지 장시경을 쫓아가다가 관군을 피해 달아났다. 그도 1년여 가까이 숨어지내다가 체포되어 그 역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정조 죽음 이후 최초로 이루어진 민란(民亂) 장시경의 난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장시경의 난 이후 여인들의 죽음
장시경의 민란이 진압된 후 영의정 심환지는 실질적인 군주인 정순대비에게 장시경 집안 사람들을 유배보내야 한다고 하였다. 어쩌면 당연한 조처였다. 영남 남인의 명문가 장시경의 집안은 완전히 쑥대밭이 되었다.
이 결과 장현경의 아내, 13살과 5살인 두 딸과 겨우 1살이 지난 아들을 관노로 만들어 고금도로 유배를 보냈다. 고금도는 전라도 강진 앞바다에 있는 섬으로 대역 죄인들이 유배를 가던 척박한 땅이었다. 특히 고금도의 군졸들은 거칠기 그지 없었다.
장현경의 큰 딸은 미모가 있어 성장하면서 고금도 군졸 한명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기 시작했다. 이 군졸은 자신에게 몸을 바치지 않으면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괴롭히겠다고 협박하며 장현경의 큰 딸을 겁탈했다.
장현경의 큰 딸은 22살이 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성노예가 된 것이다. 군졸은 저항하는 여인에게 “네가 비록 거절한다 해도 끝내는 나의 처가 될 것이다”고 협박을 일삼았다. 마침내 이 장현경의 큰 딸은 유배온 지 9년 만인 1809년 7월 28일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자결하려고 바다로 나갔다.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와 여동생이 뒤쫓아 갔지만 큰 딸은 어머니의 간절한 호소에도 불구하고 푸른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러자 어머니는 하늘을 보고 자신 역시 바다에 몸을 던지려고 하였다. 14살의 둘째 딸이 같이 죽으려 하자 어머니는 어린 남동생을 부탁하려니 너는 죽지말라고 말한 후 바다로 몸을 던져 큰 딸과 함께 바다의 넋이 되었다.
이 순간 바다에서 거센 바람이 불고 큰 해일이 일었다. 그리고 이듬 해 7월 28일에도 거센 바람과 해일이 불어 고금도 사람들은 장씨 여인들의 피맺힌 한(恨) 때문에 생긴 바람이라고 하여 ‘처녀풍’이라고 불렀다. 아무 힘도 없는 여인이 군졸의 폭력과 협박에 의해 지속적인 겁탈을 당하고 끝내 죽음에 이른 것이다. 장시경의 집안은 여인들까지도 이렇게 비참하게 생을 마감해야 했다.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위대한 항거, 장시경의 난!
비록 실패하였지만 장시경의 항거는 백성들에게 오랫동안 기억으로 남았다. 백성들은 개혁군주 정조를 죽인 노론 세력들이 나라를 망치고, 또 일본에 나라를 넘겼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들의 이러한 생각이 맞는지는 모르겠다. 정조의 죽음이 오늘날까지 미스테리이기 때문에 장시경의 판단이 그릇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 자신의 목숨이 사라지고 집안이 멸문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음에도 잘못된 것에 대한 항거를 한 장시경과 그의 일가들의 투쟁은 높이 평가받았다.
이들의 항거를 그저 무모하다고 하지 말자. 세상에 차분히 준비되고 성공한 항거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같은 작은 항거, 성공하지도 못하고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항거도 있지만, 이 항거가 있었기에 역사는 도도히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작은 몽둥이만 있으면 엄청난 칼과 대포에도 항거한다는 것을 장시경은 보여주었다. 그래서 이 항거는 위대하다.
김준혁은 역사학자다. 정조(正祖)가 건설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경제적 기반인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화성의 복원 등에 참여하였고,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을 지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 한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리더라면 정조처럼> 등 정조 관련 다수의 저서가 있다. 오랫동안 수원에서 시민운동을 하였고, 촛불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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