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분 비빈(妃嬪)의 남편, 16남 13녀의 아버지로 서른여덟에 생을 마감한 조선의 9대 왕 성종(成宗). 그 분이 잠든 곳이 바로 강남구 선정릉(宣靖陵) 묘역의 선릉이다. 현재는 도심 속의 왕릉이지만 1495년에 조성되었으니, 그 당시에는 궁궐에서 한강을 건너 고개를 몇 개나 넘어야 하는 수 십리 먼 길이었을 것이다.

(사진=황현탁)
(사진=황현탁)

수령 5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묘역에 있고, 아름드리 소나무와 참나무가 무성한 능을 좀 늦은 오후에 산책하니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간편복 차림’으로 나무그늘 벤치에서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 있다. 그늘과 쉼터를 제공해주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성종은 후세 백성들에게 ‘성은’(聖恩)을 베풀고 있는 셈이다.

재킷을 벗어 팔에 걸치고 2km남짓한 능 둘레길을 걸었다. 더운 날씨이고 바람도 없어 그늘 아래였지만 땀방울이 맺힐 정도였다. 코로나19 때문에 둘레길을 일방통행하도록 곳곳에 현수막과 안내판을 붙여놓았다. 숲이 우거져 길섶에는 이끼가 자랄 정도로 그늘이 깊다. 피톤치드 향 내음은 나지 않았으나 싱그러운 풀냄새가 기분을 상쾌하게 해준다. 

능역의 잔디밭이나 클로버가 있는 곳, 개망초가 피어 있는 곳에 까치나 비둘기가 ‘함께’ 모여 뭔가를 열심히 찾고 쪼고 있다. 좀 더 걷다보니 장끼 한 마리가 나지막한 나무 옆에서 지나가는 나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다. 도심의 새들이어서 사람들을 많이 본 탓인지 후드득 날아가지 않고 동태만 살핀다. 오랜 접촉 경험에 비춰 해코지할 ‘동물’은 아니란 것을 체득한 모양이다.

(사진=황현탁 칼럼니스트)
(사진=황현탁)

새는 우짖는다. 그런데 4000보를 걷는 동안 새소리를 듣지 못했다. 다른 곳에선 까작까작, 구구구, 꿔겅꿔겅 소리를 내면서 날아가는 것을 보기도 했는데, 선정릉의 새들은 날 생각을 하지 않고 소리도 내지 않았다. 새우깡을 부숴 던져주고 살펴보고 싶었다.

인간에겐 쉼터를, 새들에겐 삶의 터전을 남긴 조선의 임금 성종 내외분과 아들인 11대 중종의 능이 모셔진 선정릉. 놀라고 슬퍼 ‘우짖기’보다 즐겁게 ‘지저귀’는 새 소리라도 들렸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으로 능 산책로 한 바퀴를 돌았다.

황현탁은 미국, 일본, 영국, 파키스탄에서 문화홍보담당 외교관으로 15년간 근무했다. 각지에서 체험을 밑천 삼아 이곳 저곳을 누비며 여행작가로 인생2막을 펼쳐가고 있다. 『세상을 걷고 추억을 쓰다』, 『어디로든 가고 싶다』 등 여행 관련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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