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득권 내던지고 초연하게 사라진 '기남아'
김원술의 목을 베어주십시오!
“석문전투에 패배한 김원술의 목을 베어야 할 것입니다.”
신라의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은 국왕 문무왕(文武王)에게 아들인 김원술의 목을 베달라고 요청하였다. 서라벌 반월성에 있는 궁궐안에 있는 고위 관료들과 장수들은 모두 충격에 빠졌다.
“당나라 사람들의 계략을 예측할 수 없사오니, 장졸들을 시켜 제각기 긴요한 곳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 다만 원술은 왕명을 욕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가훈(家訓)마저 저버렸으니 목을 베어야 할 것입니다.”
김유신은 참으로 단호했다. 김유신의 청천벽력같은 말에 대해 모든 대신들은 침묵에 쌓였다. 김유신이 어떤 존재인가? 고구려, 백제, 신라중 가장 약소국이었던 변방의 나라를 강하게 만들어 백제를 무너뜨리고, 고구려마저 무너뜨려 삼국을 통일시킨 장본인이 아닌가? 그의 힘은 신라의 국왕 문무왕의 이상이었다. 그런 그가 아들을 죽여야 한다고 국왕에게 이야기하고 있으니 어느 누가 감히 나서서 반대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문무왕은 김유신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하였다.
“김원술은 그대의 아들이지만 나에게는 조카입니다. 나는 내 조카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김원수에게 사형을 시키지 않겠습니다.” 문무왕의 결단으로 김유신의 아들이자 장차 신라의 중요 인사가 될 화랑 김원술은 죽음의 위기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신라 최고의 명문 화랑에서 이름없는 무사로 살아가야 할 운명이 되었다.
당나라의 신라 복속 야욕
그렇다면 김원술은 왜 아버지로부터 사형에 처해 달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을까? 실제 그가 죽어야 할 만큼 대역죄를 저지른 것일까? 얼마나 잘못을 저질렀기에 석문전투의 패배 책임자들도 모두 사형을 당하지 않고 그 직책을 유지하고 있는데, 김원술만 죽음 직전까지 가야 했을까?
사실 김원술은 석문 전투의 패배에 큰 책임이 없었다. 그는 신라군 사령관의 의복과 장춘 장군의 부관인 비장(裨將)의 역할을 맡고 있던 화랑이었다. 그는 대장군들의 명령을 전달하는 작은 임무를 맡았고, 그 책임을 온전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문제는 석문전투의 패배가 너무도 컸기에 김유신은 그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김유신이 나이가 많아 전장에 참여할 수는 없다 해도 당나라와의 전쟁에 실질적인 책임자였기 때문에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워야 할 사람은 있어야 했다.
선덕여왕 때부터 김유신과 김춘추는 삼국을 통일한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어떻게든 신라의 군사력을 높이기 위하여 참으로 다양한 노력을 하였다. 그 일환으로 김춘추는 당나라 황제 고종(高宗)을 찾아갔다. 그는 고종에게 신라의 삼국 통일을 위하여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다. 이러한 김춘추의 요청은 후대 역사가들에게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당나라에 사대(事大)를 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물리친 역사의 죄인이라고 평가되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당시 신라의 입장에서 보자면 김춘추의 행위는 애국적 행동일 수 있었다. 오늘날의 잣대로 모든 역사를 평가하는 것이 무조건 올바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김춘추의 행동을 정당하다고 평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는 않다.
김춘추와 김유신은 당나라가 엄청난 대군을 신라로 보내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도움을 준 이후에 분명히 신라마저 집어삼키려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실제 당나라 황제 고종과 장군들은 진짜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나라는 신라에게 “백제·고구려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땅을 모두 신라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당나라는 손바닥 뒤집듯 약속을 파기했다. 오히려 당나라는 신라를 완전히 점령, 한반도 전체를 당나라 영토로 만들고자 했다. 처음부터 신라에 파병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음모를 신라에 알린 이는 바로 진골 출신 승려 ‘의상(義相)’이었다. 당나라 수도인 장안의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서 공부를 하던 그는 자신의 스승인 ‘화엄종(華嚴宗)’의 2조(祖)인 지엄(智儼) 종사에게 고종이 신라를 함락하여 하나의 나라로 만들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 화엄종의 ‘3조’가 되어 달라는 부탁을 거절하고 신라로 돌아온 그는 당나라 군대의 야욕을 알려주었다.
석문전투 패배가 주는 공포감
김유신과 김춘추는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과 의상 대사의 말이 같음을 확인하고 당나라와 함께 삼국통일을 위한 전쟁을 준비하면서, 한편으로는 당나라와 전쟁할 것을 준비하였다. 김유신의 준비는 은밀하면서도 철저했다. 이미 화랑 관창을 죽음으로 내몰아 패전을 거듭하던 황산벌 전투를 승리로 이끈 경험을 토대로 해서 화랑들을 더욱 가열차게 훈련을 시켰다. 그리고 정예화된 군사들을 조직하여 전 세계 최고의 군사대국인 당나라와 맞붙어 싸우기 시작했다.
그래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석문전투에서 패배하기 직전까지 여러 차례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육지의 전투만이 아니라 바다의 전투에서도 승리했다. 사찬 사득이 이끄는 신라 수군(水軍)은 소부리주 기벌포(오늘의 새만금 일대)에서 당나라 수군과 첫 개전에 패배하였다가, 나머지 22회의 싸움에서 모두 승리하였다. 당시 신라 수군의 전력과 군사기술 그리고 함대의 장비도 당나라 군대보다 더 우수했다. 이는 김유신의 전쟁 준비가 얼마나 철저하였는지를 알 수 있었다.
당나라는 이러한 패배에 너무도 충격을 받아 대규모 군대를 파병하였다. 오늘날 평양 일대에 주둔을 하고 있다가 오늘날 황해도 서흥 지역인 ‘석문’에 주둔하였다. 신라군은 자신들이 자랑하는 장창군(長槍軍)을 대거 투입하여 당나라 군대를 궤멸시킬 준비를 하고 있었다. 실제 전투에서도 신라군이 우세하였다. 이 전투는 나당 전쟁 이후 가장 큰 전투였다. 그런데 승기를 잡아가던 전투는 대아찬 효선과 사찬 의문 등의 오판으로 엄청난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 전투의 패배로 전 신라인들은 공포에 떨었고, 672년 9월에 신라는 당나라에 사죄사를 파견하였다. 그때 당나라 황제에게 보내는 문무왕의 상주문에 “신(臣) 모(某)는 죽을 죄를 짓고 삼가 아룁니다. 저는 머리를 조아리고 죽어 마땅합니다” 라고 썼다. 문무왕이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얼마나 큰 공포에 사로잡혔는지 알 수 있다.
결국 석문전투의 패배에 대해 김유신은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그 전투 패배의 책임을 자신이 감당하기로 했다.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서 책임지자는 것이었다.
원하지 않은 원술의 퇴각
신라에 대한 분노로 당나라 군대가 말갈(靺鞨)과 함께 석문(石門) 들판에 진영을 차리자 문무왕은 장군 의복(義福)과 춘장(春長) 등을 보내 이를 방어하게 하였다. 앞서의 이야기처럼 신라의 장창부대 3,000명이 당나라 군대를 물리치자 신라의 장군들은 판단 착오를 일으켰다. 당나라 군대를 얕잡아보고 신라 군사들을 분산하여 배치하였다. 군사들을 분산 배치하는 동안 전열이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나라 군대와 말갈 군대가 급습을 하여 대패하고 신라의 장군 효천(曉川)·의문(義文) 등이 죽었다.
이때 김원술은 비장으로서 싸우다 죽으려고 하였다. 화랑으로서 당연한 일이었고, 집안의 가훈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를 보좌하던 담릉(淡凌)이 만류하며 말했다. “대장부는 죽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라, 죽을 때를 택하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죽어서 성과를 얻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살아서 훗날의 공적을 도모하는 것이 낫습니다.” 원술은 담릉의 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우고자 한 것이다. “남아는 구차하게 살려고 하지 않는 법이다. 장차 무슨 면목으로 아버지를 뵙겠는가?” 그는 당나라 군대가 있는 곳으로 말을 채찍질하며 달려가려 하였으나, 담릉이 말고삐를 쥐고 놓지 않는 바람에 끝내 나가지 못하고 퇴각하고 말았다. 이것이 원술의 평생 한(恨이)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원술은 상장군을 따라 무이령(蕪荑嶺)으로 나왔는데, 이때 당나라 군대가 추격을 하였다. 오늘날 경남 거창군인 거열주(居烈州) 대장 일길간(一吉干) 아진함(阿珍含)이 상장군에게 말했다. “공들은 힘을 다하여 속히 가도록 하라. 내 나이 벌써 칠십이니 얼마나 더 살 수 있겠는가? 오늘이 내가 죽을 날이다.” 아진함은 창을 들고 적진으로 달려가 싸우다가 마침내 전사를 하였고, 아진함의 아들도 아버지를 따라가서 싸우다가 역시 전사하고 말았다. 이것이 신라의 장군들과 화랑들의 용기있는 항거였다.
결국 석문전투에서 패배한 대장군과 군사들이 서라벌로 들어왔다. 그러나 문무왕과 김유신은 그들을 용서하고 다시 당나라와 싸울 준비를 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오직 김원술만 용서받지 못하고 서라벌을 떠나게 되었다.
원술의 절망
자신의 외삼촌인 문무왕에 의해 살아남은 원술은 아버지 김유신을 만날 용기가 없었다. 너무도 무서웠을 것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 김유신이 죽고 말았다. 너무도 슬픔에 빠진 원술은 어머니 지소부인(智炤夫人)을 만나고자 하였다.
김원술의 어머니이자 김유신의 아내 지소부인은 태종 무열왕의 셋째 딸이다. 김유신의 여동생 문희가 태종인 김춘추와 결혼을 하여 문무왕과 지소부인을 낳았다. 지금 시대로 생각해보면 이 결혼은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관계이지만 신라 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은 아니었다. 김유신은 자신의 조카와 결혼을 한 것이다. 지소부인은 김유신과의 사이에서 아들 다섯과 딸 넷을 낳았는데, 그중 둘째 아들이 원술이었다.
김유신이 죽고 나서 지소부인은 오빠인 문무왕의 많은 배려를 거부하고 머리를 깎고 베옷을 입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때 김원술은 어머니를 만나고자 하였는데, 지소부인은 아주 냉정하게 그를 거부했다. “부인에게는 삼종의 도리가 있다. 이제 내가 과부가 되었으니 마땅히 아들을 좇아야 할 것이나, 원술과 같은 자는 이미 돌아가신 아비에게 자식 노릇을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의 어미가 될 수 있겠는가?”
참으로 냉정한 어머니였다. <삼국사기>열전, 김유신에 기록된 지소부인의 말을 토대로 그 유명한 유치진 작품의 ‘원술랑’ 이라는 연극이 나온 것이다. 원술은 통곡하며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떠나지 못하였으나, 어머니 지소부인은 끝내 만나주지 않았다. 원술은 깊이 절망하고 탄식하며 “담릉 때문에 일을 그르친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하고 곧 태백산(太伯山)으로 들어갔다. 영원히 은거하여 세상에 나오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가르친 가훈을 새기면서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당나라에 대한 항거를 준비하였다. 태백산에서 젊은 날 아버지 김유신이 하였듯 무예를 수련하고 병법을 연구하였다. 자신을 가족과 국가로부터 버림받게 한 당나라에 대한 진찌 항거를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술의 항거, 매소성 전투 승리
석문전투 패배 이후 신라는 당나라와 몇 년 간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루었다. 마침내 당나라 군대는 675년 2월에 대규모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당나라의 명장 유인궤는 자신의 군대로 파주의 칠중성을 공격하고 말갈군을 시켜 바닷길로 들어와 임진강 일대의 전략적 요충지를 장악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들은 신라와 고구려 부흥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끝내 승리할 수 없었다.
당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명장 이근행은 오늘의 경기도 연천 대전리 산성인 매소성에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신라와의 결전을 준비했다. 얼마 전 고구려를 멸망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여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떤다는 당나라 명장 설인귀가 너무 오만하게 행동하다가 임진강 입구에 있는 천성(오늘날 오두산성으로 추정)에서 신라군과 맞붙어 대패하였다.
신라군은 천성 전투에서 당나라 군사 1,400명을 죽이고, 전선 40척을 빼앗았다. 설인귀는 전투마 1,000필을 남기고 겨우 평양으로 도망갔다. 이처럼 승기는 신라군이 잡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이근행은 만만한 장수가 아니었다. 더구나 이근행이 거느린 군사들은 대부분 말갈족이었고 그들은 벌판 전투에 능한 군사들이었다.
당시 신라군은 3만 명에 불과했다. 20만명 대 3만명의 대결은 불을 보듯 뻔했다. 더구나 당나라 군사들은 기병이고 신라군은 보병이 아닌가! 이때 등장한 인물이 바로 김원술이다. 2년 전인 673년 7월, 끝까지 당나라와 투쟁하라는 유시(諭示)를 남기고 죽은 김유신의 아들인 김원술이 바로 그였다.
앞서 이야기처럼 석문 전투에서 패배하여 가문으로부터 죄를 짓고 서라벌을 떠나 태백산에서 무예 수련을 하던 김원술은 다시 복권되어 매소성 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다. 문무왕은 자신의 조카인 김원술을 인정하고 그를 나당 전쟁의 가장 중요한 전투에 참여하게 하였다.
김원술이 처음부터 매소성 전투에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매소성 전투가 당나라 군대의 위용으로 신라 군대가 의기소침해지면서 패색이 나타나기 시작하자 문무왕은 김원술을 부른 것이다. 뒤늦게 김원술이 매소성으로 들어오자 성안의 신라군은 사기가 올랐다. 화랑 관창이 목이 베어져 죽는 바람에 신라 군대가 독이 올라 계백 장군의 백제군을 물린 친 것과는 상황이 다르지만 김원술의 참여로 인하여 신라군은 엄청난 기세를 올리게 되었다. 아마도 전설의 명장 김유신이 다시 살아 돌아온 것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김원술은 대장군에게 자신이 생각한 비책을 제안하였다. 즉 장창부대와 쇠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당나라 20만 명의 대군을 물리치자는 것이다. 이 비책은 성공했다. 매소성 밖의 너른 벌판에서 벌어진 대결에서 장창과 쇠뇌는 엄청난 위력을 발휘했을 것이다. 한때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보유했던 돌궐군도 물리친 역전의 노장 이근행도 신라의 장창부대와 쇠로 만든 장거리 활인 쇠뇌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당나라 군대는 전마 3만380필과 수많은 무기들을 버리고 북쪽으로 철수하였다. 이 매소성 전투의 영향은 컸다. 이후 신라는 크고 작은 전투 18번을 모두 이겼다. <삼국사기> 문무왕 15년 조에 18번의 승리를 자랑스럽게 기록하고 있다. 당나라 군대는 매소성 전투 이후 기세를 잃어버렸다.
불후의 기남아 김원술!
당나라는 고구려를 망하게 한 천하명장 설인귀를 다시 보내 신라를 제압하고자 했지만 신라군의 강력한 투쟁으로 676년 금강 입구인 기벌포에서 4000명이 죽음으로써 끝내 패배하고 말았다. 결국 매소성 전투의 패배로 당나라는 그들의 안동도호부를 평양에서 요동성으로 옮기고 말았다. 세계 최고의 제국 당나라를 한반도의 작은 나라 신라가 물리친 것이다. 이는 세계 전쟁사에 빛나는 불후의 승리다.
이 승리의 주역이 바로 김원술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젊은 화랑 김원술은 당나라에 대한 불굴의 항거로 매소성 전투에 참여하여 신라의 자주적 승리를 이끌어 낸 것이다. 아마도 아버지 김유신과 어머니 지소부인은 당나라에 항거할 수 있는 더욱 강인한 신라의 장군으로 성장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아들에게 고난을 준 것일 수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비정한 버림을 항거의 기반으로 만든 김원술은 참으로 위대한 인간이다.
나당전쟁의 승리 이후 김원술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신라를 이끌어갈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문무왕의 조카였으니 그가 마음을 먹으면 최고의 지위에 올라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원술은 조용히 세상과 이별을 하였다. 그가 어디로 가서 살았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버림받은 이후 찾아간 태백산에서 부모님을 생각하며 조용히 살아갔을 것이라 추정해 볼 뿐이다.
부귀와 명예를 내던지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진 김원술! 정말 멋진 ‘기남아(奇男兒)’라 아니 할 수 없다.
김준혁은 역사학자다. 정조(正祖)가 건설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경제적 기반인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화성의 복원 등에 참여하였고,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을 지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 한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리더라면 정조처럼> 등 정조 관련 다수의 저서가 있다. 오랫동안 수원에서 시민운동을 하였고, 촛불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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