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에서 내쫓긴 사람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다

다산 정약용의 장인 홍화보

무관 홍화보(洪和輔)!
우리 역사에는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아간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있을 것이다. 그중에는 이름 있는 이들도 있고, 세상에 이름을 날리지 않은 이들도 있다. 이순신, 권율, 곽재우처럼 백성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가난한 백성들이 진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고 인정해 줄 만한 이 중의 하나가 홍화보라고 생각한다.

홍화보는 우리 국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무관하면 떠오르는 인물들 대부분은 전쟁과 함께 살아간 장수들이다. 을지문덕부터 시작하여 이순신에 이르기까지 전쟁 영웅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전쟁이 없던 화평한 시기에, 그것도 엄청난 무(武)의 성과를 이루어 내지 않은 사람을 기억하지는 않는다. 그런 측면에서 홍화보는 우리에게 무척이나 낯선 인물이다.

다산 정약용.

그러나 홍화보를 어떤 인물과 연계시켜 이야기하면 ‘아~’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이들이 있다. 그 인물은 바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다. 홍화보는 다산 정약용의 장인이다. 다산의 장인이라고 소개를 하면 그때부터 홍화보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다. 도대체 이 사람은 어떤 인물일까? 어떻게 다산의 장인이 되었을까? 그의 딸인 다산의 아내는 어떤 여인일까? 이러한 궁금증이 있음에도 홍화보에 대한 기록이 많지 않아 그를 제대로 알 수는 없었고, 그래서인지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도 않았다.

다산은 우리에게 곧고 뛰어난 인물로 기억되고 있는데, 그러한 기억의 기반을 마련해준 핵심 인물이 장인 홍화보라고 생각한다.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도 훌륭한 분이고, 다산의 형제들인 정약전, 정약종도 역시 뛰어난 인물이어서, 다산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지만, 다산의 기개와 용기는 그의 장인으로부터 배운 것이라 생각한다.

호탕한 홍화보  

홍화보는 조선시대의 명문가인 풍산(豐山) 홍씨 집안이었다. 보수 우파와 언론 재벌로 세간에 이름이 알려진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풍산 홍씨이다. 홍석현은 다산의 후손이라고 해서 다산 탄생 250주년 묘제(墓祭) 때 초헌관을 했었다. 그가 다산의 실학정신을 계승한다고 했는데, 진정 실천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풍산 홍씨는 홍화보의 5대조였던 대사헌 홍이상(洪履祥)에 이르러 크게 번창하였다. 이때부터 조정에 출사하였고, 그의 후손인 홍만기(洪萬紀)는 오늘날 대통령실 비서관에 해당하는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역임하였다.

홍화보는 처음부터 무관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신체적 조건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는 몸이 가냘파서 마치 여인과 같았다. 키도 작아 어느 누가 보아도 무인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용맹은 남보다 뛰어났으며, 타고난 성품이 호탕하여 병법(兵法)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좋아하였다.

홍화보가 신혼(新婚) 때 장인의 말을 빌려 타고 성 밖으로 나가 노닌 적이 있었다. 그때 어떤 집을 지나려니 울음소리가 매우 슬프게 들려오므로 사람들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사람들 이야기가 그 집안사람 모두가 염병에 걸려 죽고 딸 하나만이 살아남았는데, 그 딸이 돈이 하나도 없고 너무 슬픈 나머지 염습(殮襲)도 하지 못하고 울고만 있다는 것이었다.

홍화보는 곧 말을 저당 잡혀서 엽전 1백 냥(兩)을 마련하여 주고는 돌아와 장인에게 그 일을 알렸다. 참으로 호탕한 사람이 아닐 수 없다. 불쌍한 사람을 그냥 보지 못하는 성미 때문에 자신의 것도 아닌 장인의 말을 저당 잡혀서 장례를 치르게 해주었으니 그 얼마나 대단한 인물인가? 장인도 사위의 행동에 대하여 시비를 걸지 않고 호쾌하게 받아주었으니 그 장인에 그 사위였다.

무인으로서 자질을 보여주다

홍화보는 성장하면서 경전과 역사를 공부하였고 시를 잘 지었다. 특히 변려문에 익숙하였다. 반려문은 문장 전체가 4자와 6자를 기본으로 대구로 구성돼 있는 문체로 4자 구와 6자 구로 구성돼 사륙문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하늘이 때를 주지 않아서인지 끝내 과거시험엔 합격하지 못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여러 번 문과 급제에 실패하자 그는 혹시나 해서 점을 치러 가보았다. 그 점쟁이가 점치는 도구인 산대를 벌여놓고 한참 있다가 혀를 차며 혼잣말로, “아깝구나, 그 길로 들어선 것이!” 하였다. 

이때 홍화보는 “그 길이라는 것이 무엇이오?” 라고 물었다. 그랬더니 점쟁이가 대답하기를, “일찌감치 무(武)의 길로 갔더라면, 당연히 대장(大將)은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조금 늦었지만, 아직 해볼 만 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홍화보는 “나는 무인이 될 수 없소” 라고 말하였다. 아마도 무과로 급제하는 것이 싫었던 것이었다.

홍화보는 점장이를 만나고 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양 도성 밖으로 말을 타고 가다가 말이 뛰는 바람에 그의 왼쪽 다리가 등자에 끼었다. 홍화보는 왼손으로는 안장의 꼭대기를 잡고, 오른손만으로 고삐를 쥐고 말을 달렸다. 한양 도성(都城) 안으로 돌아오다가 길옆에 말뚝이 하나 있는 것을 보고 그것을 잡고 온 힘을 쏟으니, 안장이 찢어지면서 말은 달아나고 홍화보는 몸을 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늘어서서 이를 보았는데 장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홍화보는 평소에 병법을 좋아하여 온갖 진법(陣法)을 익혔으며, 또 스스로 ‘오공진(蜈蚣陣)’과 ‘칠성진(七星陣)’ 등을 만들었는데, 친구들 중 알아주는 이들이 꽤나 있었다. 이때부터 자신감을 얻자 홍화보는 본격적으로 무예에 관심을 갖고 무과를 준비하였던 듯 하다.

조정에 천거된 홍화보

영조 어진. 

1761년(영조 37)에 영조는 장상(將相)과 대신(大臣) 들에게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장수가 될 만한 자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이때 상당수의 대신들이 홍화보를 추천하였다. 아마도 그의 명성이 세상에 알려졌던 것 같다. 여기에 더해 영조의 탕평정책도 한몫 했을 것이다. 홍화보의 집안 풍산 홍씨들은 당파로 보자면 노론(老論)이었다. 그러나 같은 풍산 홍씨 집안에서도 특이하게 홍화보 집안은 남인이었다. 그러니 풍산 홍씨라는 명문 가문이라 해도 그의 집안이 남인(南人)이었으니 소외된 가문이었을 것이다. 영조는 이런 소외된 남인을 무관으로 임명하여 탕평의 모양새를 갖추고자 했을 수도 있다.

당시 많은 대신들이 홍화보를 추천하였는데, 그 가운데에서도 김성응(金聖應) 훈련대장이 힘써 추천했다. 김성응은 젊은 날 숙종대 전설의 포도대장 장붕익이 추천한 무장으로 여러 공을 세워 병조판서까지 역임한 인물이다. 김성응은 업무를 수행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죽었기 때문에 더욱더 조정과 백성들에게 추앙된 장수였는데, 이러한 임금의 신뢰를 받았던 김성응이 추천을 했으니 홍화보는 여러 조정 관료들에게 인정을 받아 어렵지 않게 조정에 들어올 수 있었다.

홍화보는 처음 훈련원 초관(訓鍊院哨官)에 임명되었다. 며칠 뒤 성균관 입학시험인 ‘국자시(國子試)’가 있었는데, 홍화보가 남몰래 시험장에 들어가 답안지를 제출하였는데 뜻밖에 1등에 합격하였다. 그런데 이 합격은 오히려 그에게 좋지 않은 결과를 주었다. 영조가 훈련원 초관이 몰래 성균관 유생 시험에 응시한 것은 군율(軍律)에 어긋나는 짓이라고 하여 대장군에게 죄를 주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홍화보는 벌을 받아 유배를 가거나 아니면 멀리 지방의 군영으로 쫓겨나지 않고, 궁궐안에서 국왕의 행차를 호위하거나, 국왕의 명령을 전달하는 선전관(宣傳官)으로 전보되었다. 이 자리는 무관들 중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좋은 자리였다. 아마도 영조가 홍화보가 뛰어나다고 생각하여 일부러 혼을 내키는 척하면서 자신의 곁에 두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그때 마침 창덕궁 후원에서 특별 무과를 위한 활쏘기 시험이 있었다. 이때 홍화보는 과녁에 명중시키지도 못했는데 영조가 일부러 북을 치는 사람이 제대로 북을 치지 못해 홍화보가 활을 제대로 쏘지 못한 것이라고 하며 그를 무과에 합격시켜주었다.

이때 영조는 “입신(立身)하여 임금을 섬김에는 문(文)과 무(武)의 구별이 없으니, 그대는 마음을 편히 지니라" 하였다. 영조가 홍화보를 일찍부터 눈여겨보고 가까이 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 영조, 사도세자를 죽이려 하다.

홍화보의 인품과 명성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정조의 부친인 사도세자가 비극적 죽음을 맞이할 때였다. 임오년(1762, 영조 38) 이전부터 영조와 사도세자는 갈등이 있었다. 

당시 정승인 김상로와 홍인한은 모두 노론이었는데, 이들은 사도세자가 장차 조선의 국왕이 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만약 사도세자가 국왕이 되면 노론을 모두 내치고 소론과 남인들이 조정을 장악할 것으로 생각했다. 사도세자가 노론의 기득권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틈만 나면 거짓으로 임금인 영조에게 보고하여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이간질 시켰다. 

노론은 사도세자가 평양에 있는 군대를 동원하여 아버지 영조를 죽이고 왕이 되고자 역모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였다. 평소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거짓 내용을 들으니 영조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창경궁 휘령전으로 아들을 불러오게 하여 칼을 주고 자결하라고 지시하였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공부 열심히 하고, 아버지가 원하는 아들이 되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영조는 매정하였다. 자결 지시를 거둬들이지 않았다. 사도세자는 더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칼을 잡고 자결하려고 하였다.

이때 사관(史官)들이 말려서 자결하지 못하자 바닥과 궁궐 담장에 머리를 짓이겨 자살하려고 하였다. 머리에 피가 줄줄 흐르자 사관들은 어의(御醫)를 불렀다. 그때 어의(御醫) 중 최고의 지위에 있는 방태여(方泰輿)가 사도세자를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우황청심환을 올려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하였다. 방태여는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다.

창경궁 문정전. 영조는 문정전 앞 마당에서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했다. 
창경궁 문정전. 영조는 문정전 앞 마당에서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했다. 

영조의 부당한 명령에 항거하다 

방태여가 사도세자를 치료해 주었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는 엄청나게 화가 났다. 자신은 아들에게 죽으라고 명령을 하였는데, 의관이 사도세자를 치료해 주었으니 임금인 자신을 능멸하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영조는 선전관으로 있는 홍화보에게 방태여의 머리를 베어오라고 명령을 하였다.

홍화보는 선전관들이 함께 영조의 명을 듣고 방태여의 집으로 갔다. 머리를 베어오라는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홍화보는 방태여의 머리를 베어 그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생명은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이 간 선전관들의 생각은 달랐다. 무조건 임금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방태여의 머리를 베고자 한 것이다. 이때 홍화보는 선전관들의 행동을 제지하였다.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하여 기록한 <대천록(待闡錄)>에 홍화보의 말과 행동이 기록되어 있다. 그 기록을 보면 홍화보가 얼마나 담대하고 거대 권력과 허위에 대해 항거하는 인물인지 알 수 있다. 물론 이 내용은 <영조실록>에도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람의 목숨은 지극히 소중한 것이요. 상께서 머리를 자르라고 명령하셨지 목을 베라고 명령하지는 않으셨소. 머리와 머리카락은 다르지 않으니, 상투를 잘라 바쳐야 하오”

영조에게 명령을 받은 선전관이 처음에는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자 홍화보가 말하였다. “만약 죄를 얻게 된다면, 홍화보가 시켜서 그런 것이라 하라. 그러면 내가 감당하겠소.”

그때서야 그 선전관은 홍화보의 말에 따라 방태여의 상투를 전부 자르려 하였다. 이때 홍화보는 선전관의 행동을 말렸다.

“설사 살아남는다고 한들 이게 무슨 꼴인가? 전부 자르거나 약간만 자르거나 별 차이는 없소” 그리고는 홍화보가 직접 방태여의 머리카락을 약간만 잘랐다.

<대천록>만 홍화보의 행동을 기록한 것이 아니다. <현고기>에도 거의 같은 내용으로 홍화보의 용기있는 행동을 기록하고 있다. 당대 사회에서 임금의 명령을 거부하고 사람을 살리려는 이 엄청난 행위는 조선 백성들 사이에서 퍼져나갔을 것이고, 그래서 여러 사대부들이 사도세자 죽음에 대한 진상을 은밀하게 기록하면서 홍화보의 담대한 행동을 기록한 것이다.

결국 홍화보는 떨고 있는 방태여의 머리카락 한 올을 베어서 영조에게 갖다 바쳤다. 방태여의 머리를 베어오라고 명령을 하였는데 선전관이 홍화보가 머리카락 한 올을 베어서 바쳤으니 영조는 너무도 화가 났다. 그래서 홍화보 역시 유배를 보내고 방태여의 머리를 다시 베어 오라고 명령하였다.

이 때 홍화보는 당당하게 영조에게 자신이 왜 머리카락을 베어 왔는지를 이야기하였다

“전하! 우리 조선에서는 상투를 머리와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투가 잘리는 것은 곧 머리가 잘리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합니다. 상투를 자르는 것은 머리를 자르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상투 전체를 자르나 상투의 머리카락 한 올을 자르나 모두 같습니다. 상투의 머리카락 한 올을 잘라도 조선의 선비들은 치욕을 느낍니다. 그러니 상투의 머리카락 한 올을 자르는 것은 머리를 베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머리 대신 상투 한 올을 자른 것입니다” 

영조는 이 말을 듣고 너무 화가 나 홍화보를 유배 보내는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다음 날 영조는 홍화보의 유배형을 취소했다. 만약 화가 난 기분대로 하였으면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의관을 죽이는 일이 생길 수 있었는데, 홍화보의 용기있는 행동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조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다.

방태여를 살린 이후부터 홍화보는 영조의 총애를 받기 시작하였다. 이후 사복내승(司僕內乘)·도총부 도사(都摠府都事)·훈련원정(訓鍊院正)·내금위장(內禁衛將)에 임명되었다. 내금위장이면 국왕 호위무사의 대장인 것이다. 이처럼 영조의 신임을 받은 그는 외직의 수령으로 임명되어 장연·죽산의 부사와 벽동군수, 영종·파주의 방어사(防禦使) 등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그의 사위 다산 정약용이 곡산 부사로서 훌륭한 역할을 하고 훗날 <목민심서>를 지을 수 있었던 것도, 장인 홍화보로부터 배운 바가 컸다고 생각한다.

경기 남양주시에 자리잡고 있는 다산 정약용의 묘.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홍화보는 을미년(1775, 영조 51)에 일반 무관들이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동부승지(同副承旨)에 특별히 제수되었고, 임금의 경연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겸하게 하였다. 임금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승정원의 승지는 총 6명 밖에 없는데 이 중의 한 명으로 임명을 한 것은 정말 너무도 파격적인 일이었다. 이 자리는 문과에 급제해야만 얻을 수 있는 관직인데 학문이 깊고 문장이 좋아 임명된 것이다. 영조는 이후 전라좌도 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로 임명하였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임명됐던 그 자리였다.

정조의 최측근 홍국영을 탄핵하다

홍화보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주는 또 한 번의 사건이 있었다. 물론 홍화보에게는 시련의 순간이었다. 1776년(영조 52) 3월에 영조가 승하하였는데, 이때 정조의 측근인 홍국영(洪國榮)이 권력을 쥐고 안팎으로 휘둘렀다. 새로운 국왕 정조를 국왕으로 만든 장본인이니 권세를 휘두를만 했다. 

정조 역시도 홍국영을 매우 총애하여 대부분의 조정 관료들이 그에게 굽신거렸다. 관직도 도승지, 훈련대장, 병조판서, 이조판서 등 주요 요직은 혼자 다 차지하고 있어 조선의 국왕이 정조인지 아니면 홍국영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러나 홍화보는 평소에 홍국영을 가볍게 보고 전후로 외군(外郡)을 역임하면서도 뇌물을 바친 적이 없었다. 홍국영은 이런 곧고 기백있는 홍화보를 미워하기 시작했다. 실제 이 두 사람은 같은 풍산 홍씨 집안이었다. 홍화보가 출세를 생각했다면 같은 집안인 홍국영에게 아부하여 좋은 관직을 얻을 수 있었겠지만, 홍화보는 그런 것을 하찮게 생각하였다.

홍국영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정조도 홍화보를 핍박할 수 밖에 없었다. 하루는 정조가 홍화보에게 전(殿)의 계단을 뛰어오르라고 하였다. 홍화보는 나이가 이미 50여 세가 되어 체력이 떨어져 못하겠다고 하였다. 홍화보는 무인이지만 어려서부터 건강한 편이 아니었다. 그래서 잔병이 많은 사람이었고 더구나 나이가 많이 들어 뛰어 올라가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정조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이 뛰었으나, 인정전의 반도 뛰어 올라오지 못하였다. 정조는 이 행동이 홍화보가 자신을 속이고 일부러 능멸하는 것이라고 하고 곤장을 치게 하였다. 즉위 초 정조는 거의 모든 정사를 홍국영에게 맡겼고, 그의 의견만을 들을 때였다. 그러니 홍화보에 대한 홍국영의 악질적인 이야기만 듣고 잘못된 행동을 한 것이다.

홍국영은 남몰래 관찰사 이보행(李普行)을 시켜 홍화보를 모함하였다. 이보행은 홍화보가 욕심이 많고 방종하여 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거짓 보고를 하였다. 정조는 이 보고를 듣고 그를 함경도 운산(雲山)으로 귀양을 보냈다. 막 귀양길을 떠나려 할 적에 홍화보를 안쓰럽게 여기는 사람이 홍국영에게 사과의 편지와 뇌물을 마련하여 사례하면 유배를 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홍화보는 그를 비웃으며, “자네는 덕로(홍국영)를 태산(泰山)처럼 보는가 본데, 그는 빙산(氷山)에 지나지 않네” 라고 하였다. 빙산이란 거대해 보이지만 태양빛이 가득하면 녹아서 사라지는 것이니, 홍화보는 홍국영의 권력이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거대한 권력에도 굴하지 않고 진정 올바른 것이 올바르다고 판단하는 홍화보의 진면목을 보여준 것이다. 

이때 귀양길을 떠나는 홍화보를 위로하기 위해 자리에 모여든 손님들이 10여 명쯤 되었는데, 크게 놀라 혀를 내두르면서 홍화보가 더욱 위태롭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3년이 되지 않아 홍국영은 역모를 꾀하다가 강릉으로 유배를 갖다가 끝내 화병으로 죽고 말았다. 홍국영이 머지않아 빙산이 되어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 본 홍화보의 말이 맞자 모두가 놀라고 말았다. 

정조가 즉위한 경희궁 숭정문
정조가 즉위한 경희궁 숭정문

권력에 대해 용기있는 항거로 백성들의 영웅이 되다

홍화보는 유배간지 몇 년이 지나 사면되어 돌아와 다시 승지(承旨)에 제수되었는데, 관찰사로 임명되는 신하가 있을 때면 정조는 특별히 홍화보에게 명하여 '교서(敎書)'를 짓도록 하였다. 이 역시 문과에 급제한 학사(學士)의 직책이다. 

정조 역시 할아버지였던 영조가 홍화보에게 문과 급제자의 자리인 동부승지를 제수한 것과 같이 교서를 짓는 학사의 자리를 주어 역량을 더욱 발휘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정조는 홍화보와 자주 만나 병법을 논하기도 하고 혹은 운(韻)을 불러 시를 짓게도 하였는데, 모두 본인의 뜻에 맞아 여러 번 상을 내려 주었다.

홍국영이 죽은 뒤에 정조는 홍화보를 다시금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제수하였는데, 또 어사에게 모함당해 평안도 서부의 숙천으로 귀양갔다. 하지만 조금 있다가 사면되어 돌아왔고 다시 승지에 임명되었다. 

채제공

1785년(정조 9) 겨울에는 강계부사(江界府使)에 제수되었는데, 그때 온 세상이 남인의 영수 채제공(蔡濟恭)을 공격하여 친지(親知) 가운데서도 그를 배반하는 자가 많았다. 채제공을 제거해야만 권력을 장악할 수 있다고 판단한 노론의 공작이 진행된 것이다.

당시 젊은 남인들의 천주교 문제가 생기면서 이들을 보호하는 수괴인 체제공을 관직에서 내쫓고 유배를 보내자는 상소가 빗발쳤다. 요즘으로 치면 정약용을 비롯한 남인 소장세력들이 '친북 좌파 빨갱이'로 둔갑된 것이고, 채제공은 이러한 '빨갱이'들을 보호하는 진보좌파의 우두머리 쯤 되는 것이다. 이때 홍화보는 자신의 이익과 관직을 위해 그간의 의리를 저버리는 인간들에 분노하고 끝까지 채제공과 의리를 지켰다. 그리고 그 의리를 지킨다는 자신의 뜨거운 마음을 시(詩)로 지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었다.

어느 뉘 양 임하를 저버리지 아니했나 / 何人不負楊臨賀
그런 뒤에야 대장부라 할 수 있으리 / 然後方稱大丈夫

자신은 권력으로부터 불이익을 당할지언정, 권력과 안위를 위하여 오랜 인연을 배신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이익을 위하여 사람을 배신하면서 영달을 얻으려 하는 사람들은 절대 대장부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척단구에 늘 허약한 몸을 가진 장수였지만, 홍화보는 삼국지의 관우와 장비보다 더한 대장부였다. 그가 불의에 항거하고, 올바른 정의를 지키려 하였기 때문에 삶은 늘 곤궁하고 힘들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위급한 순간마다 자신의 안위를 뒤로하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선택하고, 아무리 국왕이라고해도 올바르지 않은 행위에 대해 용기있게 반대했던 백성들의 진정한 영웅이었다. 

김준혁은 역사학자다. 정조(正祖)가 건설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경제적 기반인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화성의 복원 등에 참여하였고,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을 지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 한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리더라면 정조처럼> 등 정조 관련 다수의 저서가 있다. 오랫동안 수원에서 시민운동을 하였고, 촛불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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