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양행궁에서 울리는 여인의 한맺힌 울음소리

에고, 에고, 에고!
세조 14년(1469) 2월 어느 날 새벽에 온양행궁 정문의 앞 마당에서 한 여인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울렸다. 온양행궁 내전에서 새벽에 일어나 간밤에 들어온 조정의 일을 확인하던 세조는 갑자기 들려오는 여인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임금이 온양행궁에 행차하여 피부병을 치료중인 것을 온양 백성들이 모를 릴 없을텐데, 감히 새벽에 임금의 잠을 깨우는 여인의 울음을 세조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온양행궁 전도
온양행궁 전도

세조는 새벽 근무를 담당하고 있는 관리를 불러 이 여인이 왜 이렇게 구슬프게 우는지 알아보라고 하였다. 담당 관리인 수직주서는 곧바로 여인을 만나 임금의 명을 전하고 그녀에게 사연을 물어보았다.

그녀는 충청도 홍산현(지금의 부여군 홍산면)의 양인 나계문(羅季文)의 처 덕령(德寜)이라고 했다. 덕령의 아버지는 성균관 사성을 지낸 윤상은(尹尙殷)인데, 덕령은 그의 서녀였다. 

그녀는 자신의 억울함을 수직주서에게 이야기 하였다. 그 사연은 참으로 비극적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당대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는 홍윤성의 노비에게 맞아 죽었다. 그녀의 남편을 죽인 노비의 이름은 김돌산(金乭山)이었다. 

김돌산은 노비의 신분이었지만 주인인 홍윤성의 위세를 믿고 충청지역에서 엄청난 횡포를 부렸다. 김돌산은 세조 13년(1468) 12월에 홍산현의 길에서 덕령의 남편을 만났는데, 자신을 무례하게 대했다는 이유로 엄동설한의 겨울에 언 땅 위에서 나계문의 옷을 발가벗기고 역노(驛奴) 윤동질삼(尹同叱三)(똥세) 등 6명을 불러 무수히 구타를 하였다. 덕령의 남편은 아무 잘못도 없이 김돌산의 구타에 의해 비명횡사하고 말았다.

홍윤성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해치는 악질 노비를 두고 그를 옹호하는 홍윤성(洪允成)은 어떤 인간인가? 홍윤성은 세조가 김종서와 황보인을 제거하는 쿠데타인 계유정난(癸酉靖難)의 핵심 인물이다. 홍윤성은 문과에 급제한 사대부이지만 타고난 힘이 장사이고, 무예도 뛰어나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 자기편으로 끌어들였다. 

세조는 자신의 측근 권람(權擥)으로부터 홍윤성을 추천받기 전부터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충청도에 살고 있던 홍윤성은 과거를 보러 갈 때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 말을 타고 한양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걸어서 한강까지 갔다. 당시 양반사대부들은 가난해도 말을 빌려서 한양으로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데, 홍윤성은 너무도 가난하여 말을 빌려갈 수 있는 처지가 못되어 평민들처럼 걸어서 한양까지 갔던 것이다. 

당시 수양대군이던 세조가 한강가에 있는 제천정(濟川亭)에 나와 놀고 있었다. 이때 수양대군의 종 10여 명이 홍윤성이 한강을 건너기 위해 탄 배에 올라 탔다. 수양대군의 못된 종들은 홍윤성이 한강을 건너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배를 붙잡고 움직이지 못하게 하였다. 작은 힘이라도 있으면 남을 괴롭히면서 위세를 부리려는 못된 놈들의 작태였다. 

<세조실록>은 홍윤성의 외모에 대하여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홍윤성은 용모가 웅위(雄衛)하고, 체력이 남보다 뛰어나다.” 이처럼 남들보다 덩치가 크고 웅장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데, 가난하여 말도 못타고 걸어서 한양까지 왔으니, 수양대군의 종들이 일부러 약을 올리고 장난질을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패악질은 곧 자신들에게 고통으로 왔다. 홍윤성은 배에 있는 작은 삿대로 수양대군의 종들을 모두 때려 물속으로 빠뜨렸다. 그리고는 홀로 배를 저어 한강을 건넜다. 당시 이 모습을 수양대군이 유심히 살펴보고, 자신이 놀고 있는 제천정으로 불러 예우를 하고 인연을 맺어 두었다. 수양대군은 훗날 자신이 거사를 하는데, 홍윤성을 무인(武人)으로 쓰고자 하였을 것이다. 

경기 남양주시 진
경기 남양주시 진

홍윤성의 과거 합격

홍윤성이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들어왔을 때 한양에서 가장 점을 잘 치는 사람이 ‘홍계관(洪繼寬)’이란 소리를 듣고 그를 찾아갔다. 조선시대 사대부들 치고 점을 치지 않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조선시대 점을 치는 일은 일상화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홍윤성이 홍계관에게 자신의 운명을 물어보자 그는 뜻밖에 공손하게 꿇어앉아 대답하였다. 
“공은 신하로서는 극히 귀한 운명입니다.” 
“모년 모시에 공이 반드시 형조 판서가 될 것이오. 그때 소인 계관의 아들이 죄를 얻어서 옥사에 연루되어 죽게 될 것이니, 모쪼록 소인을 위해서 살려 주소서.”

그리고는 이어 그의 아들에게 말하기를,  “네가 아무 때에 옥에 갇힐 것이니, 그때 나의 아들이라 하면 될 것이다.”  홍윤성은 너무 놀라 홍계관의 청에 대해 승낙하지는 않았다. 하도 희한한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홍윤성은 문종이 즉위하던 해인 1450년에 문과에 합격하고, 승문원 부정자(承文院副正字)로 임명되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가 무재(武才)가 있다 하여 특별히 사복직(司僕職)을 겸하였다. 

그 뒤 10년도 못되어 관직의 직급을 몇단계 건너뛰어 형조 판서가 되었다. 수양대군과 계유정난을 성공시키고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어느날 큰 옥사를 국문하던 중 한 죄수가 소리를 높여서, “저는 곧 소경 점쟁이 홍계관의 아들이옵니다.”고 하였다. 이때 홍윤성은 10년 전의 일을 생각하고 홍계관의 아들을 석방시키기도 했다. 

이 내용은 《부계기문(涪溪記聞)》이란 기록에 나와 있는데, 참으로 황당한 이야기같지만 사실이다. 어쨌든 홍윤성은 힘만 자랑하는 무인이 아니라 문과 합격자에다가 문종대에 병법서 저술에 참여할 정도로 학문적 능력도 지니고 있었다. 

홍윤성
홍윤성

계유정난 참여

이처럼 문무(文武)가 겸비된 홍윤성을 세조는 극히 신뢰했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국왕이 되자 수양대군은 노골적으로 권력을 얻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김종서(金宗瑞)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수양대군은 김종서를 죽이던 날 저녁에 먼저 홍윤성으로 하여금 공사(公事)를 보고한다는 핑계로 김종서를 찾아가게 하였다. 이때 홍윤성은 정6품의 훈련 주부(訓練主簿)라는 낮은 직급의 관원이었다. 당시 김종서는 조선의 하늘 아래 가장 권력이 쎈 사람이었다. 하급 관료가 최고 권력자를 사저로 찾아간다고 행동하는 것은 배포가 있는 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한편으로는 홍윤성의 이름이 한양 도성에 널리 퍼져 김종서도 그를 잘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집에 오는 것을 허락했을 것이다.

김종서는 안방에서 장침(長枕)에 기대고 세 첩을 거느리고 홍윤성을 자기 앞으로 오게 하여 자신의 활을 당겨 보게 하였다. 
“네가 힘이 세다 하니 나의 강한 활을 시험조로 당겨 보라.” 이때 홍윤성은 김종서의 활을 당겨 두 개나 부러뜨렸다. 김종서는 홍윤성이 장차 자기를 죽일 것이라 생각하지 못하고 힘이 장사인 것을 확인하면서 역으로 크게 즐거워하였다. 
“번쾌(樊噲)라도 이와 같지 못하리라.” 
그리고는 자신의 첩으로 하여금 큰 그릇에 술을 부어 홍윤성에게 마시게 하니, 무려 세 사발을 마시고 나왔다. 그리고는 밤에 다시 들어가 김종서를 죽였다.

탐욕스럽고 폭력적인 홍윤성

계유정난에 성공한 홍윤성은 탐욕스럽고 폭력적인 본성을 드러냈다. 계유정난 성공으로 수양대군은 홍윤성에게 엄청나게 많은 물건을 하사하였다. 홍윤성은 수양대군이 하사한 물품과 돈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힘을 이용하여 재물 모으기에 힘써 거만금의 돈을 모았다. 곡식은 그 배나 되었고, 물건을 실어서 집에 들이는 거마(車馬)가 길을 메우고, 문밖에 솥을 벌려 놓고 먹는 문객이 거의 만 명이나 되었다.

크게 저택을 세우고 못가에 당(堂)을 세웠는데, 세조가 친히 ‘경해(傾海)’라는 두 글자를 써서 주었다. 명사(名士)들을 초청하여 잔치를 베풀지 않은 날이 없었다. 엄청나게 많은 음식이 차려지고, 시끄러운 풍악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다. 좌객(坐客)들이 그의 위세가 두려워서 권하는 대로 다 받아마시고는 말을 거꾸로 타고 집으로 돌아가기가 일쑤였다. 홍윤성은 일부러 자신에게 찾아오는 이들을 엄청나게 취하게 만들어 보낸 것이다.

홍윤성이 이조판서가 되었을 때 그의 숙부가 자신의 아들의 벼슬을 청원하였다. 홍윤성은 숙부에게 논 이십 마지기를 준다면 벼슬을 주겠다고 하였다. 그의 숙부가 홍윤성이 곤궁하던 시기에 자신이 30여 년간 돌봐주었는데, 지금 재상이 되어 땅을 뇌물로 달라고 하는것에 대해 질책을 하자, 홍윤성은 그 말이 퍼질까 하여 즉시 그 자리에서 숙부를 때려죽이고 후원에 묻어두었다. 남편의 기가막힌 죽음을 알게 된 숙모가 고소장을 올렸으나, 형조에서는 접수하지 않고 사헌부에서는 듣지 않았다. 권력의 힘이 참으로 대단한 것이었다.

홍윤성은 자신이 세운 공을 믿고 멋대로 사람을 죽였다. 자신의 저택 밖에 있는 시내〔川〕에서 어떤 사람이 말을 씻기니 즉시 사람과 말을 함께 죽였고, 자기 집 앞으로 말을 타고 지나가는 자는 귀천을 따지지 않고 모두 죽였다. 

일찍이 남의 논을 빼앗아서 미나리를 심었는데, 그 땅의 주인인 늙은 여인이 울면서 “이 늙은이가 혼자 살면서 한 목숨 붙이고 사는 수단이 이 논뿐이다. 그대로 순응하면 굶어 죽을 것이요, 반항하면 피살될 것이니 어차피 죽음은 마찬가지라. 차라리 그의 문전에 나가서 하소연하여 만에 하나라도 요행을 바라는 것이 어떨까.” 하고는 곧 땅문서를 갖고 나아갔다. 그러나 홍윤성은 한 마디 말도 묻지 않고, 곧 그 할미를 바위 위에 엎어놓고 모난 돌로 쳐서 죽이고는 그 시체를 길 가에 두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감히 어떻게 할 수 없었다. 참으로 악인이 아닐 수 없다. 요즘으로 치면 사이코패스 중의 사이코패스였다. 주인이 이렇게 악행을 저지르는 사이코패스였으니, 그의 노비들 또한 악행을 수시로 저질렀고, 이들의 악행에 대하여 관아에서는 어떠 처벌도 할 수 없었다. 

세조와 덕령의 대화

홍윤성의 신도비.
홍윤성의 신도비.

악인(惡人) 홍윤성은 계유정난과 세조의 즉위 이후 조선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세조가 한명회, 권람 등 책사들의 지모(智謀)도 활용했지만, 홍윤성의 무력(武力) 없이는 김종서와 황보인 등 권력자들을 죽이고 조선의 국왕이 될 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엄청난 폭력과 살인 그리고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았음에도 불구하고 홍윤성에게 죄를 묻거나 그의 노비들에게 죄를 주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한겨울에 두들겨 패서 죽였다는 말을 들은 세조는 덕령을 자신에게 데리고 오게 하였다. 덕령은 갸름한 얼굴에 총총한 눈이 단정하였는데, 몸 전체에 서러움이 가득 밴 가련한 모습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나지막하면서도 또렸하였고, 임금 앞에서 통절한 원한을 조리있게 말하였다.

그녀는 남편이 홍윤성의 노비에게 맞아 죽은 이후의 이야기도 하였다. 그녀는 남편이 죽고 나자 고을 현감인 최윤(崔倫)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김돌산 등에게 형벌을 내려달라고 하였다. 그러나 현감 최윤은 홍윤성의 위세에 눌려 하수인인 윤똥세 등 3명을 고을 감옥에 가두었을 뿐, 주모자인 김돌산은 불문(不問)에 부쳤다. 

곧이어 홍윤성의 노비 귀현똥세(貴賢同叱三) 등이 홍산 관아의 감옥으로 와서 윤똥세 등을 빼내 돌아갔다.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죽였음에도 나라의 최고 실세 권력 덕분에 홍윤성의 노비들은 어떤 죄도 받지 않고 거리를 호령하고 다니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너무도 화가 난 덕령은 현감 최현에게 윤똥세 등이 감옥에서 유유히 나간 것을 알렸다. 이에 다시 윤똥세 등을 감옥에 가두게 하였으나, 충청도 관찰사 김지경(金之慶)은 홍윤성의 말을 듣고 감옥에 있는 자들을 모두 석방하였다. 그리고는 덕령의 형부인 한산현(韓山縣) 향교의 교수인 윤기(尹耆)와 죽은 남편인 나계문의 종형 나득경(羅得經)이 국가의 대신인 홍윤성을 모해하기 위해 허위로 죄를 조작하였다고 하여 공주목(公州牧) 감옥에 가두었다.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이다. 요즘 시대의 권력이 있는 자들은 엄청난 죄악을 저질러도 무죄가 되고, 힘없는 자들은 죄가 없어도 죄인이 되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허수아비 같은 국왕 세조

세조
세조

세조가 홍윤성의 횡포를 몰랐던 것은 아니었지만, 가련한 여인 덕령으로부터 기막힌 이야기를 들으니 분노가 치솟았다. 자신도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잡았지만 어쨌든 국왕으로서 백성들의 민생을 나아지게 하기위해 노력을 하였는데, 국왕의 권력을 믿고 고관들이 권력을 남용하는 것을 정확히 알게 된 것이다. 실제 나라의 권력은 국왕인 자신이 아니고, 계유정난을 성공시키고, 단종을 퇴출시킨 공신들이었다. 자신은 이들의 꼭두각시였던 것이다. 세조는 홍윤성을 비롯한 권력자들을 올바르게 다스리지 않으면 자신의 왕권은 허울뿐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세조는 충청감사와 홍산 현감을 불러 직접 심문하였다. 충청감사 김지경과 홍산 현감 최윤은 변명만 늘어놓았다. 오히려 김지경은 국왕인 세조에게 자신은 권력자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로지 임금만을 위해 일해왔다고 거짓말까지 늘어놓았다. 국왕인 세조가 아무리 열받았다 하더라도 공신들과 관련된 죄에 대하여 어떠한 형벌도 내리지 못할것임을 김지경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조는 거의 허울만 국왕이었이었다. 수양대군 시절 김종서 황보인만이 아니라 자신의 동생인 안평대군, 금성대군을 죽이고,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과 단종 복위에 참여했던 백 여명이 넘는 사대부를 죽이면서 공포의 국왕으로 인식되던 세조도 사실은 관료들에 의해 조종되는 국왕일 뿐이었다.

세조는 아무리 홍윤성의 권력이 세다 하더라도 아무 잘못도 없는 백성을 죽이고, 사람을 죽이고, 그 살인사건을 은폐하고 여기에 더해 억울함을 호소하는 피해자의 형에게 날조된 죄를 씌워 감옥에 가둔 것은 정말 악질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충청감사와 홍산 현감을 감옥에 가두고, 신숙주와 이조판서 성임, 사헌부 집의 이극돈에게 수사를 맡겼다. 

충남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에 있는 홍윤성의 묘.
충남 부여군 은산면 경둔리에 있는 홍윤성의 묘.

투사가 되어가는 덕령

세조는 덕령을 다시 만났다. 덕령은 이제 자신의 남편의 억울한 죽음 만을 이야기 하지 않았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간 충청도 지역에 있었던 홍윤성의 악행 전부를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만약 그녀의 남편이 홍윤성의 노비들에게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주 조용히 사는 여인으로 살다가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녀는 투사가 되어 가기 시작했다. 국가의 잘못이 평범한 여인을 강인한 투사로 만들어 온양행궁에 거처하는 국왕에게 목숨을 걸고 곡(哭)을 하며 진실을 밝히려는 과감한 행동을 하게 한 것이다. 이제 덕령은 한 남편의 여인에서 사회적 여인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사헌부와 사간원에서는 홍윤성의 잘못을 지적하고, 홍윤성이 아무리 공신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죄를 주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그러자 홍윤성은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어도 자신의 권력으로 모든 것을 무마하고, 혹은 사건을 조작하여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어 감옥에 까지 보냈는데, 이번 나계문의 처 덕령의 강력한 행동으로 자신이 벌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홍윤성은 덕령에게 두 번이나 편지를 보내 타협을 청하였다. 그리고 관료들을 보내 쌀 10석, 포(布) 3필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이는 상당한 금액이 되는 물품이었다. 그러나 덕령은 홍윤성이 주는 쌀과 옷감을 받지 않았다. 너무나 억울하게 죽은 남편의 원한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있는 그녀에게 이깟 재물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홍윤성은 덕령이 재물을 받지 않자 이제는 협박을 하기 시작했다. 대신을 공갈하여 조정을 어지럽히고 있으니 머지않아 큰 화를 당할 것이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홍윤성의 협박은 덕령에게 통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미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의 용기는 이제 홍윤성이 아니라 국왕 세조와도 싸울 준비가 되었다.

충청도의 작은 지방의 가난한 한 여인이 상상도 할 수 없는 당대 최고의 권력과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여인이 ‘한(恨)’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지 않던가! 권력자들은 이러한 여인의 ‘한’을 하찮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러한 여인의 ‘한(恨)’은 하찮은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분노와 함께 거대한 해일이 되어 권력이라는 엄청난 항공모함도 바다에 가라앉히게 할 수 있다.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세조 광릉.
경기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는 세조 광릉.

덕령의 승리 

결국 거대 권력과 싸운 덕령의 항거는 덕령의 승리로 끝이 났다. 덕령의 남편을 죽인 김돌산은 능지처참형, 윤동질삼 등은 머리를 베는 참형(斬刑), 덕령의 친족들을 ‘모해대신(謀害大臣)’으로 무고한 호장(戶長) 이효생 등은 곤장 1백대, 이들의 온 가족은 강원도로 옮겨져 관노가 되게 하였고, 충청감사 김지경과 홍산 현감 최윤은 한양의 감옥으로 구속하였다. 세조는 다만 홍윤성의 죄는 인정하되, 아무런 형벌을 주지 않았다.

홍윤성에게 죄를 주지 못했으니 어쩌면 덕령의 반쪽 승리일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의 국왕인 세조와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홍윤성을 일개 지방의 여인이 진실을 밝히고 악행을 저지른 자들의 잘못을 밝히기 위해 투쟁을 해서 이와 같은 성과를 얻은 것은 조선 500여 년 역사상 최고의 성과일 것이다. 아쉽지만 조선시대라는 봉건시대를 생각하면 이는 진짜 쾌거이다.

가난한 여인 덕령의 항거는 500여 년이 지난 오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이름없는 여인이 사회적 여인으로서 거대한 국가 권력과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어쩌면 오늘 우리 사회의 비극적 상황과 하나도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누가 그들을 투사로 만드는가?

10.29 참사로 희생된 가족들에 대한 기득권의 냉대와 조롱, 분향소 파괴 그리고 이들에 대한 정부와 서울시의 조직적 방해가 너무나 평범했던 희생자들의 어머니, 누나, 여동생들을 투사로 만들고 있다. 이들이 언제 투사가 되고자 했던가? 거대한 권력이 이 가련한 여인들을 투사로 만들고, 그녀들을 이 엄동설한에 거리에 나서게 만들었다.

백성을 이길 권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일시적으로 거대한 창과 칼 그리고 총과 대포의 힘으로 백성들을 누를 수는 있으나, 그 힘은 영원하지 않다. 오히려 영원한 것은 백성들의 분노와 눈물이다. 이 분노와 눈물이 거대한 대포가 되어 기득권과 권력의 심장부에 포탄을 투하할 것이다.

그러니 당신들이 오히려 제대로 살고자 한다면 역사에서 배워야 한다. 가난한 여인의 눈물은 곧 분노가 된다는 것을! 그러니 권력자들이여! 진실을 숨기고 죄지은 자들을 감추려 하지 마라. 

500여 년 전 힘없는 여인 덕령의 항거를 기억하기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이태원의 거리에서 목놓아 울부짓는 가련한 여인들이 광화문 광장에서 투쟁의 대오를 이끌어 갈 것이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진짜 혁명이 시작된다.    

김준혁은 역사학자다. 정조(正祖)가 건설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경제적 기반인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화성의 복원 등에 참여하였고,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을 지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 한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리더라면 정조처럼> 등 정조 관련 다수의 저서가 있다. 오랫동안 수원에서 시민운동을 하였고, 촛불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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