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숙이고 살아가는 진성대군

호색(好色)이라는 표현할 정도로 여인을 좋아했던 성종이 비교적 젊은 나이인 38살에 세상을 떠나고 왕위는 장자인 연산군이 이어받았다. 연산군은 종친과 외척들이 정치에 관여하는 것을 너무도 싫어했고, 또한 이들도 연산군이 무서워서 정치에 관여하지 못했다. 

7살에 아버지인 성종을 잃은 진성대군(중종)은 형인 연산군을 무서워서 대하기 어려워했고, 일찍부터 자신의 생모인 윤비가 폐서인되어 사약받고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연산군은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차갑게 대하였다.

경기 가평군에 있는 중종의 태봉 석함.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경기 가평군에 있는 중종의 태봉 석함.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진성대군(중종)은 성종의 둘째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이다. 이름은 역(懌)이고 자(字)는 ‘낙천(樂天)’이다. ‘역’이라는 이름의 뜻은 기뻐한다는 것이요, 자는 하늘을 즐긴다는 것이니 아마도 임금 될 운명을 타고났는지도 모른다. 

1488년 3월 5일에 성종이 연산군의 생모인 윤비를 폐위시키고, 윤호의 딸인 정현왕후 윤씨와 다시 국혼을 하였는데, 진성대군(중종)은 정현왕후에게서 태어났다. 왕자였던 그는 진성대군(晋城大君)이라 불려지며, 1499년(연산군 5) 신수근의 딸인 단경왕후 신씨와 결혼했다. 단경왕후가 1487년에 태어났으니 중종보다 1살 많은 13살의 나이에 결혼 한 것이다.

대궐 밖의 대군 처소에 있었던 중종은 자신의 형인 연산군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리고 있었다. 이런 생활을 통해 중종은 어린 시절부터 살아남기 위한 처세를 몸으로 배웠다고 할 수 있으며, 연산군 재위 시절의 이 훈련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왕이 되었을 때 기득권 신하들에게 마음을 숨기며 예우하는 척하다가 향후 제거해가는 잔인한 행위를 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반정(反正)으로 국왕이 되다

진성대군 시절, 나이는 어느덧 19살이 되었다. 12살, 13살의 꼬마신랑 신부는 어느덧 19, 20살의 꽃다운 나이가 된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두 부부 사이에 자식이 태어나지 않고 있었다. 진성대군 부부는 정말 서로를 사랑했고, 그래서 진성대군은 소실도 두지 않고 신씨에 대한 사랑만을 가득 담고 살아가고 있었다.

19살의 진성대군이 아직도 형인 연산군의 눈치를 보고 있던 그해 9월 1일 ‘반정(反正)’이 일어났다. ‘반정’이란 올바른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 아니다. 반(反)이라는 말은 ‘돌아간다’는 뜻이니, ‘반정’이라 함은 올바른 것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폭군 연산을 제거하고 다시 올바른 국왕이 다스리는 나라로 돌아간다는 의미인 것이다.

처음 반정이 일어나던 날, 진성대군은 무서워했다. 앞서 왕위를 둘러싸고 형제들끼리 참혹한 죽음이 계속 있었던 사실을 알고 있기에 중종은 한 무리의 군사가 늦은 밤에 횃불을 들고 자신의 집으로 향해 오자 틀림없이 형인 연산군이 자신을 죽이려 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한 중종은 자신의 사랑하는 부인에게 구차하게 사느니 차라리 깨끗하게 자결하자고 말하였다. 

남편보다 조금 더 사리가 깊었던 아내 신씨는 군사들의 말머리가 자신의 집을 향해 있는 것이 아니라, 대문 밖에 궁궐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고, 자신들을 죽이러 온 것이 아니라 반정이 일어나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찾아온 것을 알았다. 자결을 생각하던 남편에게 왕이 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고, 오히려 그 공포의 밤을 아름다운 밤으로 지새웠을 것이다.

어쨌든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 없었지만 국왕이 되어 하늘 아래 가장 높은 지위가 되어 버린 중종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그렇지만 행복은 그리 길지 않았다. 신하들이 자신을 시험하는 첫 번째 시련을 맞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시련은 바로 자신이 사랑하는 부인 신씨를 내쫓아야 하는 것이었다.  

경기 양주시 장흥면에 있는 단경왕후의 온릉.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사랑하는 아내를 내치다

 9월 1일 반정이 일어나고 9월 2일 왕과 왕비로 등극했던 중종과 단경왕후 신씨는 7일 만에 헤어져야 했다. 예전에 드라마 ‘7일의 왕후’의 모티브가 바로 이 사건이다. 단경왕후 신씨가 왕후에서 쫓겨난 이유는 바로 그녀의 아버지 신수근 때문이었다. 

신수근의 누이동생은 바로 연산군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왕비로써 대소신료들과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다. 남편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가 남편이 파렴치한 행동을 하며 왕실의 재정을 낭비할 때 반찬 가지수를 줄이며 검소한 생활을 했고, 왕실의 법도를 지키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래서 자신의 아들인 세자를 아버지인 연산군처럼 되지 않게 하려고 임금의 도리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오라비인 신수근은 연산군의 하수인이 되어 갖은 악행을 다하였다. 신수근은 정권욕에 가득 차 자신의 딸을 연산군의 동생인 진성대군에게 시집을 보내었다. 진성대군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형수가 처고모이고, 단경왕후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시아주버니가 고모부가 되는, 요즘의 상황에서 보면 조금 웃기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중종반정 공신들은 연산군의 충복인 신수근을 당연히 죽여 버렸다. 죽이고 나서 보니 신수근의 딸이 중전이 되어 버린 것이다. 중전이 처음에는 공신들의 위력이 세기 때문에 아무 소리도 못 하겠지만, 훗날 남편인 중종을 추동하여 아비의 원수인 자신들에게 칼을 들이댈 수도 있다고 공신들은 생각하였다. 그래서 공신들은 왕비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후환을 제거하는 정치의 비정함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공신들은 공식적으로 왕비의 폐서인(廢庶人)을 요구했다. 중종은 공신들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부인을 궁궐 밖으로 내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중종은 아내를 살리기 위한 마음으로 내보낸다고 스스로를 위로하였다. 공신들의 주장을 거부한다가 왕비와 본인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라의 왕을 쫓아낸 사람들이 자신들에 의해 만들어진 왕을 한번 더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극단적일 수 있겠지만 당시 공신들의 힘은 왕권을 능가하는 것이었고, 왕이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인을 버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아마도 중종은 훗날 자신이 힘이 생기게 되면 어떻게든 신씨를 다시 복위시키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녀를 영원히 궁궐로 불러들이지 못했다.

힘을 키우는 중종

공신들의 힘에 의해 왕비를 폐서인하게 된 중종은 신료들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서서히 힘을 기르기 시작했다. 이들에 대한 은밀한 항거를 시작한 것이다. 중종이 왕이 된 지 8년이 되는 1513년에 반정 3공신 중의 하나였던 성희안이 죽었다.

이로써 박원종(1510년), 유순정(1512년)의 사망과 더불어 성희안의 죽음으로 반정 3공신 모두가 죽게 된다. 새로운 세력으로 교체를 할 수 있는 때가 온 것이다. 반정의 주체인 3공신이 죽어 없는 상황이기에 반정공신들의 힘이 약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다. 

중종은 정광필·신용개·남곤 등의 훈구파를 등용하여 나머지 반정공신을 제거하고 서서히 왕권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훈구파라는 말을 듣는 순간 뭔가 보수의 냄새가 난다고 느꼈을 것이다. 이들 훈구파는 조선 창업의 공신의 후예로 대대로 권력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반정공신이나 훈구파나 결국은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반정 후 훈구파는 공신들의 위세에 밀려 잠시 한직으로 밀려났다. 그러나 반정공신들은 자신들만으로는 정국운영이 원활히 이루어지지 않아 일부 훈구파를 기용하여 동거 시대가 시작됐다. 그러나 훈구파는 예전의 기득권을 회복하고 싶었고 그러던 시점에 반정 3공신이 모두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기회는 왔다. 어느 정도 노련해진 중종이 훈구파를 등용하자 훈구파들은 반정공신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하였다. 중종의 의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문제였다. 이들도 서서히 권력의 중심부에서 왕권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성장해 나갔기 때문이다. 중종의 입장에서 보면 반정 3공신 등이 존재했던 시절보다는 왕권이 강화되었지만, 국가 운영 자체를 자신의 뜻으로 이끌어나가고자 하는데 훈구파들은 목에 걸린 가시와도 같았다. 이들을 제거하기 위한 개혁이 필요한 때가 다가온 것이다.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 위치한 조광조의 적려유허비. 조광조는 이곳에 유배당한 뒤 사약을 받았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전남 화순군 능주면에 위치한 조광조의 적려유허비. 조광조는 이곳에 유배당한 뒤 사약을 받았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개혁의 칼을 빼든 중종 

개혁! 왕조시대에서의 개혁. 그 시대의 개혁은 지금과는 다르다. 조선시대에 왕권이 강화된 시기는 한편으로 백성들이 조금이라도 편한 시대였다. 즉, 왕은 백성들을 잘살게 하기 위해 왕권을 강화하는 것이 개혁이라고 판단했고, 신료들은 자신들의 참된 성리학적 주장이 실천되는 것이 개혁이라고 생각했다.

어쨌든 중종은 훈구파를 위축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고 사회를 개혁하기 위해 조광조 등 신진 개혁 세력을 등용했다. 중종은 왕이 된 지 13년이 되는 해인 1518년에 사림파의 구심점으로 자리 잡고 있던 37살의 조광조를 과거에 합격한 지 2년 7개월 밖에 안됐음에도 불구하고 정3품 당상관인 홍문관 부제학으로 발탁하였다.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실 수석비서관쯤 되는 자리로, 왕의 정국 운영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자리에 앉힌 것이다. 

조광조 등 사림세력의 등장은 보수적 훈구세력들을 제거하고 중종이 왕권을 강화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써 중종은 명실상부한 조선의 왕이 된 것이다.

하지만 조광조의 개혁은 속도가 너무 빨랐다. 아니 속도가 빨랐다기 보다도 왕의 속내를 읽지 못했다. 절대 권력자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그 밑에서 권력을 휘두르면 그가 어떤 행동을 하든지간에 가만히 내버려두는 속성이 있다. 반면 아무리 예쁜 강아지라도 주인의 손을 깨물면 주먹이 나가는 법. 자신이 아무리 총애하는 신하라 하더라도 그 도를 지나쳐 왕을 능멸하려 한다면 그것은 죽음밖에 없는 것이었다. 조광조는 자신의 권위가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혹은 그가 중종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치기로 작정했으니, 중종 역시 자신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조광조의 그런 생각은 오산이었다. 목숨을 담보한 오판이었다.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지난 10여 년간 절치부심 했던 중종이 이제 반정공신과 훈구파 신하들을 모두 내치고 진정한 권력의 주인인 왕으로 자리매김 하고자 하는데 조광조는 성리학적 이상세계에만 몰두하여 중종의 기분을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소격서 혁파를 위해 중종을 잠도 못자게 하고, 반정 당시 가짜 공신들이 많았으니 공신의 일부를 국가의 공식 명부인 ‘공신록(功臣錄)’에서 삭제하자는 조광조의 주장은 그것이 아무리 옳더라 하더라도 왕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행위였다. 

조광조를 죽이고 김안로를 측근으로!

이제 중종은 반정공신과 훈구파 대신들을 제거하는데 앞장섰고, 개혁을 부르짖은 조광조와 그의 동료들을 더 이상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쫓아냈던 훈구파인 남곤·심정 등을 다시 기용하여 1519년에 피도 눈물도 없이 사림파를 제거했다. 그리고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것이 그 유명한 ‘기묘사화(己卯士禍)’다. 

유배지 전남 화순의 능주에서 사약을 가지고 온 금부도사를 유배지에서 풀어주기 위해 온 금부도사로 생각할 정도로 조광조는 중종을 믿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중종은 그렇지 않았다. 이제 그는 반정 초기 유약한 왕이 아니라 비정한 절대 군주 그 자체가 돼 있었다. 훈구파를 제거하기 위해 개혁 사림을 등용했다가, 이들의 쓰임이 다 끝나자 완벽한 변심을 통해 개혁 세력들을 토사구팽한 것이다. 

훈구파의 재등장으로 중종의 근심은 덜어지고 왕권은 강화되었으나 훈구파 역시 자신들의 기득권을 강화하고자 몸짓을 불리기 시작했다. 이 때 중종의 왕비 문정왕후와 총애하는 후궁 경빈 박씨 등이 서서히 궁궐내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하였다. 왕비와 실세 후궁이 권력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은 참으로 비상식적이지만, 당시 관료들은 왕비에게 줄을 서기 시작했다. 여러 세력들을 서로 다투게 하여 자신을 넘보지 못하게 하고자 했던 중종에게 왕비와 훈구파 세력 확장은 골칫거리였고, 궁중 여인들의 암투는 피곤한 것이었다. 그는 앞서 자신이 취했던 새로운 세력의 등용으로 훈구파를 견제하고자 했다. 그가 바로 희락당(喜樂堂) 김안로다.

두 번째 왕후로 세자를 낳다 죽은 장경왕후의 소생인 효혜공주의 장인인 김안로는 중종 후반기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인물이다. 효혜공주와 그의 남편 연성위 김희는 중종으로부터 남다른 사랑을 받는 처지였다. 김안로는 외로운 세자(인종)의 후견인을 자처하면서 권력의 핵심부에서 중종을 위해 나머지 세력들을 억누르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중종은 즉위한 지 19년 되는 해인 1524년에 김안로를 이조판서에 임명하여 인사권을 쥐어줘 자신의 의도대로 정국을 이끌었다. 그러나 김안로는 중종을 믿고 과도한 사치와 부정부패에 빠져들었고, 결국 남곤·심정 등 훈구대신의 탄핵을 받아 경기도 풍덕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물론 중종은 김안로를 총애했고, 그의 귀양을 막으려 했다. 하지만 중종은 왕으로서 자신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알고 있었고, 비록 자신이 총애한다고 하지만 자신의 권위에 해가 되는 그를 귀양보냈다. 중종이 훈구대신들 때문에 힘이 없어서 김안로를 귀양 보낸 것이 아니라 정국을 자신의 뜻대로 주도하기 위해 읍참마속을 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고 할 수 있다. 아마도 김안로는 자신이 귀양을 가게 될 때 중종이 눈물을 뚝뚝 흘릴 것이라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종은 눈물을 흘리는 그런 임금이 아니었다. 이미 중종은 노회한 왕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 근정전. 

개혁의 변심, 훈구파를 다시 제거하다   

남곤·심정 등이 어느덧 세력을 확장하여 점차 왕권에 도전하는 형국을 띠게 되자 중종은 또다시 이들을 제거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외로운 세자를 위해서도 김안로가 다시 필요했다. 결국 중종은 1530년 유배지의 김안로를 불러올려 훈구파를 제거했다.

그러나 김안로는 중종의 의도와는 달리 지나치게 자신의 세력을 키워 여러 신하 집단의 불균형을 초래하고 정국의 불안정을 가져왔다. 나아가 왕권에 도전하려는 양상을 보였다. 역대 신하들의 오판을 김안로 역시 초래한 것이었다. 다시 조정에 들어온 지 2년 만에 김안로는 중종의 눈 밖에 나기 시작했다. 중종으로서는 자신에게 도전하고자 하는 그 어떤 세력도 용서할 수 없었다. 그가 아무리 자신이 사랑하는 딸의 시아버지라도 그것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중종은 김안로가 왕실과 연관된 척신이었지만 또 다른 척신인 세자의 외삼촌 윤임과 문정왕후의 오라비인 윤원로 형제들에게 김안로의 제거를 지시하였다. 결국 김안로는 1532년 10월에 세상의 공기를 마시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중종은 국왕의 위치에서 왕권에 제약을 가할 만큼 강대해진 신권의 존재를 좌시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준 것이다.

야비한 국왕 중종

김안로의 죽음 이후 중종은 새로운 조정의 분위기를 위해 조광조와 관련되었던 김안국 등 사림세력들을 다시 등용했다. 그러나 이들 사림세력들은 예전의 혈기왕성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저 중종의 뜻에 따르는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 이렇게 만든 중종의 노련한 정치술은 놀랍다 아니 할 수 없다. 흡사 태종 이방원이 조선 건국 시기에 정몽주를 죽이고 본인인 왕이 된 후 정몽주를 충신이라 일컬으면서 신하들에게 정몽주를 따라 배우라고 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왕 노릇 30여 년을 통해 중종은 태종을 능가하는 노련한 정치술을 갖게 된 것이다.

그의 노련한 정치술은 마지막 화려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즉위한 지 33년이 되는 1538년 10월에 세자에게 전위하겠다는 것이다. 김안로 등 간사한 신하들이 사라져 조정이 화평해졌고, 나이도 50이 넘어 연로하며, 즉위한 지도 오래되었고, 현명한 세자가 있으므로 전위한다는 것이었다. 

중종의 이 같은 선언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고, 온 신하들 모두 전위불가를 외쳐 하루 만에 취소되었다. 신하들과 세자를 떠보기 위해 불과한 행동이었다. 중종은 아마도 세자인 양녕대군에게 전위하겠다고 운을 띄운 뒤, 전위를 기대하고 찬성하던 자신의 처남들을 죽인 태종을 본보기로 삼았던 듯 하다. 실제 중종은 태종의 옛 일에 의거하여 전위하겠다고도 하였다. 이렇게 크게 조정을 뒤흔들어 놓고도 하룻 만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철회한 중종은 보통 임금이 아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왕권에 도전하는 세력이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고, 이러한 전위 소동을 통해 더욱 왕권을 공고히 하려 했던 것이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중종의 묘 정릉.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중종의 묘 정릉.

시신이 사라진 비운의 국왕    

힘없고 우유부단하고 나약한 모습으로 알려진 중종은 죽는 날까지 자신의 왕권을 위해 신하들을 교체하며 여러 정치집단에 힘을 분산하여 특정 세력이 주도권을 잡지 못하게 하였다. 그는 그렇게 39년간의 왕 노릇을 지속했던 것이다.

3명의 왕비, 6명의 후궁, 아들 아홉과 11명의 딸을 둔 중종은 재위 39년만인 1544년 11월 14일 57세의 나이로 창경궁 환경전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인생이 평범하지 않아서인지 혹은 그가 자신의 왕권을 위해 많은 사람을 죽여서인지 몰라도 죽음 이후는 평탄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그의 능인 정릉을 파헤쳐 시신을 훼손시킨 초유의 일이 발생하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 시신은 끝내 찾지 못하였다. 비슷한 시신은 찾았지만, 중종의 시신은 아니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늘에 올라 있는 그가 대기오염에 찌들어 나무도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자신의 무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자못 궁금하다. 공신들과 훈구파에 대한 저항을 통해 백성들의 삶을 나아지게 하려는 개혁을 추구하다, 끝내 자신의 권력만 얻었던 그가 하늘에서 조광조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지 그저 궁금할 따름이다. 하늘도 왕조시대가 사라지고 민주공화정 시대가 왔다면 조광조에게 뺨 한 대 얻어 맞고 있지 않을까?

항거를 정의를 위해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 항거는 진짜 항거가 아니다. 위장 항거는 항거가 아니다. 진짜 항거는 권력자를 제거하는 수단이 아니라 백성들의 민생 발전을 위한 항거다. 반정공신과 훈구파에 대한 중종의 항거는 가짜 항거다. 가짜 항거로 권력을 얻은 자들은 죽음 이후라도 하늘이 어떠한 형태로든 그 대가를 치르게 한다. 이것이 자연과 역사의 진리다. 살아있는 권력자들이여! 이 진리를 반드시 기억하기 바란다. 

김준혁은 역사학자다. 정조(正祖)가 건설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경제적 기반인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화성의 복원 등에 참여하였고,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을 지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 한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리더라면 정조처럼> 등 정조 관련 다수의 저서가 있다. 오랫동안 수원에서 시민운동을 하였고, 촛불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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