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8년 무신정변(戊申政變)의 꿈과 좌절

조선 후기에 백성들의 안위와 국가의 미래 보다는 자신들의 재물 축적과 권력 장악에 더 의지를 가진 노론 벽파의 기득권은 언제부터 이 땅에 뿌리 박히게 되었을까. 이 시작은 언제였고, 노론 기득권에 항거하여 참된 백성들의 나라를 만들려고 한 세력들은 존재하였는지, 그들의 항거는 성공하였는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항거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하고 서투르게 추진했다가 실패하여 오히려 기득권에게 더 큰 권력의 명분을 주는 잘못된 결과가 나타난 것인지에 대하여 깊은 고민이 들었다. 역사에서 항거와 혁명은 잘못하면 진보보다 역으로 퇴보의 길을 걷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백성들은 기득권의 힘이 강할수록 자신들의 나라, 다시 말하면 백성들의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도 강해진다. 이 사실을 권력을 가진 이들은 무시하고자 하나,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이 엄청난 진리를 우리에게 이야기 해준다. 그래서 차분히 생각하다 이 글을 쓴다. 

영조 어진

이인좌의 난을 바라보는 올바른 시각

조선시대 백성들이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 국왕과 기득권을 상대로 항거에 들어갔다. 바로 1728년(영조 4)에 거행된 이인좌를 대장으로 하는 거대한 민란(民亂)이었다. 동학농민전쟁과 함께 조선시대 가장 큰 민중의 저항인 ‘이인좌의 난’은 단순히 영조가 자신의 형인 ‘경종(景宗)’을 시해하고 국왕이 되었으니, 이를 복수하고 다시 정통성이 있는 종친으로 국왕을 옹립해야 한다고 일어난 정변으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영조의 집권으로 몰락한 소론, 남인 세력과 영조를 지지하여 권력을 차지한 노론 세력간의 대결로 이 1728년 무신년(戊申年)의 15일간 대결을 바라본다면, 이는 민중의 진보 역사를 올바르게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이 항거는 조선 후기 새롭게 성장하는 백성들이 기존 기득권 세력들의 무능과 사회 체제에 대한 분노가 함께 녹아든 것이고, 백성들의 정치 및 사회 참여를 통해 한 단계 발전한 사회 체제를 만들고자 하는 열망이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백성들의 항거는 실제 투쟁의 형태로 발전하지 못한 정여립의 대동계와 이몽학의 항쟁을 보다 발전적으로 계승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이인좌를 중심으로 전개하였던 1728년의 충청과 영남지역의 항쟁은 우리가 새롭게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경종의 국왕 등극

1728년이면 영조가 집권한 지 4년이 되는 해였다. 그해 3월에 청주에서 세종의 5째 아들인 임영대군의 후손으로 남인(南人)의 명문가 출신 이인좌가 그를 따르는 백성들과 함께 무기를 들고 청주성을 점령했다. 어떻게 감히 충청도(忠淸道) 라는 이름을 붙게 한 그리도 큰 ‘청주성(淸州城)’을 점령 할 수 있었을까? 그 힘은 어디서 나왔을까? 이것이 바로 1728년 조선 내부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영조가 숙종의 장자인 경종의 뒤를 이어 조선의 국왕이 되고 나서 나라 곳곳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경종이 영조가 보낸 ‘간장 게장’과 ‘단감’을 먹고 독살을 당했다는 것이다. 실제 영조는 왕세제(王世弟)로 동궁에 있으면서 형인 경종을 위하여 간장게장을 선물로 보냈다. 경종은 자신의 동생인 연잉군(영조)이 보낸 간장게장과 단감을 먹고 갑작스럽게 구토를 하다가 5일 만에 죽고 말았다. 경종이 죽고 나서 왕위를 이을 사람은 영조밖에 없었다. 더구나 영조는 경종에 의해 동궁으로 책봉되었고, 효종과 현종 그리고 숙종인 세 명의 국왕의 피를 이어받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국왕 등극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고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장희빈의 죽음 이후 몰락한 남인 계열과 정권에 소외된 소론 계열의 인물들이었다. 권력에 대한 욕구가 그 어떤 국왕보다 컸던 숙종은 노론, 소론, 남인 등 각 당파를 서로 경쟁하게 하고,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했다. 그래서 수시로 각 당파에게 힘을 실어주었다가 다시 역모로 몰아 유배를 보내거나 죽이면서 다른 당파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이를 역사학계에서는 ‘환국정치(換局政治)’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과정에서 최후의 승자는 노론이었다.  

노론 세력들은 장희빈이 노론과 남인의 대결속에 사약을 받고 죽었기 때문에 왕세자가 겉으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지만 장차 숙종이 죽고 난 후 국왕이 되면 자신의 어미를 죽인 노론을 축출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론은 숙종 재위시에 동궁인 경종의 건강이 허약해 국가 운영을 할 수 없다는 명분을 만들어 동궁 교체를 추진했다. 새로운 동궁은 노론과 연대하여 정희빈을 제거하는데 크게 기여한 숙빈 최씨의 아들인 연잉군이었다. 연잉군은 노론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었고, 어머니를 닮아 타고난 건강 체질이기도 했다. 그러나 숙종이 갑자기 죽어버렸고 조선의 국왕은 노론의 의도와 달리 어쩔 수 없이 왕세자인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차지해버렸다.

연잉군의 동궁 책봉, 경종의 죽음

국왕이 된 경종은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을 하였지만 권력의 핵심은 경종을 지지한 소론이 차지했다. 노론은 미래의 권력으로 당장의 소외를 극복하고자 했다. 그러다보니 무리수를 쓰게 되었다. 노론의 중심 인물인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 4명은 경종이 국왕이 된 지 1년 만에 그를 설득해서 대궐 밖에 있는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게 했다. 조금 심하게 이야기하자면 신하들이 국왕을 협박해서 만든 작품이었다. 당시 왕비인 어대비가 17세에 불과하였는데 노론 신하들은 국왕이 왕자 생산이 불가능하니 동생인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이는 너무도 무례한 일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왕세제 책봉 이후 두 달 만에 터졌다.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을 성공한 이들은 더욱 욕심이 났고, 아예 연잉군으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하고 싶었다. 경종은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허락하였는데 이때 소론이 이를 극렬하게 반대했다. 그런데 경종이 왕세제의 대리청정에 대해 특별한 하교가 없자 노론 4대신들은 경종의 뜻이 확고하다고 오판하고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경종의 속마음은 그것이 아니었다. 김일경과 박필몽 등 소론 관료들의 대리청정 반대가 강하자, 경종은 자신의 본마음을 드러내어 노론 4대신 등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하던 노론 세력들에게 사약을 내리거나 유배를 보내면서 소론의 권력을 강화시켰다. 이것이 그 유명한 ‘신임사화(辛壬士禍)’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종이 재위 4년 되는 해에 특별히 건강이 호전되지 않자 왕세제인 영조가 경종의 입맛을 돋게 한다고 간장게장과 생감을 올렸다. 원래 민간에서도 간장게장과 생감을 함께 먹으면 호흡곤란이 온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었는데, 이를 경종에게 먹였으니 조정과 백성들 사이에서 경종 독살설이 나올 만 했다. 

노론의 권력 장악

문제는 이러한 경종의 죽음이 영조의 왕권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영조가 국왕이 되고 노론의 대신들을 죽게 하였던 소론 강경파들이 유배를 가거나 죽음을 맞이했다. 노론이 다시 권력을 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영민한 영조는 노론이 권력을 잡아 소론을 내치게 되면 다시 사대부들의 전쟁이 시작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영조는 즉위 1년(1725, 을사년) 1월 3일에 탕평에 대한 특별 교서를 발표하였다.  

“붕당(朋黨)의 폐단이 요즈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로 시작되는 교서는 그간 당파싸움으로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그 가족들의 원한이 지속할 것이기에 나라가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고 하였다. 결국 당파를 초월하여 탕평을 하자는 눈물 어린 국왕의 호소가 있었다. 하지만 신하들은 영조의 호소를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다. 자신들 집단의 관직 채워주기가 가장 중요한 문제였는데, 소론과 연합을 하게 되면 관직 자리가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지금으로치면 협치는 생각하지도 않고 오로지 자신의 측근들로 모든 관직을 차지하려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처럼 탕평의 교서를 내렸음에도 영조는 자신의 정통성을 각인시키기 위해 즉위 다음 해 3월에 노론 4대신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며 이들을 신원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경종을 옹호했던 김일경(金一鏡), 목호룡(睦虎龍) 등은 원로 대신에서 추악한 역신(逆臣)이 되었다. 이러한 ‘충역시비’는 소론에게 충격을 줄 수 밖에 없었다. 노론은 전 정권에서 역적이었다는 오명을 완전히 거두어들이면서 새로운 시대에 자신들의 권력을 꿈꿨다. 

이러한 상황에서 몰락한 남인과 소론 세력들의 정권 탈취 투쟁이 벌어진 것이다. 여기에 더해 자연재해 등으로 궁핍해진 백성들이 역모를 추진하는 세력들과 자연스럽게 결합하게 되었다.  영조 초반에 전염병으로 죽은 이들이 무려 30만 명에 이를 정도였기에 백성들의 국왕과 조정에 대한 반감은 컸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이인좌로 대표되는 반왕(反王) 세력들이 백성들의 마음에 불을 지른 것이다.

무신년 정변의 주체들

그렇다면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 집권층들과 전쟁을 통해 새로운 집권을 하려고 했던 이들은 누구일까? 일단 1728년에 일어난 ‘정변(政變)’은 전국적 규모의 반란이었다. 호서, 호남, 영남의 삼남 지방은 물론 경기‧평안도 까지 반란 조직이 결성되었다. 중종 반정과 인조반정이 일부 소수세력들이 일으킨 것과 달리 무신년(戊申年) 정변은 전국적이었다. 그래서 더욱 정변 이후 정국 변화가 컸다.

정변의 주모자는 호남의 박필현, 호서의 이인좌, 영남의 정희량 3인이었다. 박필현은 본관이 반남으로 1707년(숙종 33)으로 소론 명문가의 자제였다. 아버지 박태춘은 소론 급진파의 한사람이고, 김일경과 함께 노론 4대신을 탄핵한 박필몽의 6촌 형제였다. 한마디로 박필현은 소론 급진세력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정변의 이름까지 ‘이인좌의 난’이라 불리게 만든 중심 인물인 이인좌는 남인의 영수 이운징의 손자였다. 그의 할머니는 숙종 15~20년까지 남인 정권을 영도한 영의정 권대운의 딸이었고, 자신은 북벌론을 부르짖다 죽은 남인의 이론가 윤휴(尹鑴)의 손녀 사위였다. 윤휴는 숙종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은 인물이었다. 그는 ‘주자성리학’만을 고집하는 노론과 달리 조선의 주체적 학문 정립을 주장했다가 공자와 주자를 배신한 역적으로 낙인찍혀 죽었다. 청나라에 대한 북벌과 주자성리학에 대한 조선의 독자적 학문관을 주장했던 인물이니 조선 사회에서는 너무도 과격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집안의 피가 이인좌에게 흐르고 있었으니 그 인물 또한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이인좌는 필자가 생각할 때 전봉준과 비슷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오척 단구이지만 강한 추진력을 갖고 있었고, 충청도 백성들로부터 엄청난 존경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인물이 새로운 국왕 영조가 경종을 시해하고 국왕이 되었으니 선대 국왕인 경종에 대한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주장하자 백성들이 그를 따른 것이다. 

이들은 영조의 등극 직후부터 정변을 추진했다. 이인좌는 지방에서 먼저 거병하고 서울에서 호응하는 전략을 세우고 3월 15일에 청주성을 점령하여 그 기세로 서울로 올라가기로 했다.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역모 소식은 경기도 일대로 퍼져 나가 한강 나루가 피난민으로 발디딜 틈이 없었고, 조정 대신들은 누가 반군과 함께 하는 세력인지 알지 못해 두려워했다. 충격적인 것은 금군별장 남태징이 반란군에 참여했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 소문으로 조정은 충격에 빠졌다. 실제 무관 최고위직의 한명인 남태징은 이인좌와 함께 칼을 들었다.   

이인좌의 청주성 점령  

이인좌는 3월 15일 청주성을 점령하기로 결정했다. 환한 대낮에 무기를 들고 청주성으로 들어갈 수 없어 ‘장례(葬禮)’를 핑계로 상여 안에 무기를 감추고 성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이인좌의 인품에 반한 기생 월례가 청주성 비장 양덕부를 자기편으로 만들어 수문장으로 하여금 성문을 열어주게 하였다. 청주 목사 이봉상은 성안에 반란군이 있다는 보고를 받고도 무시하고 기생들과 유흥을 즐기고 있었다. 기생들 역시 이미 이인좌에게 포섭된 여인들이었기에 이봉상을 즐겁게 하며 군사를 동원시키지 못하게 하였다. 

청주 상당산성.
청주 상당산성.

무방비 상태에서 공격을 당한 이봉상과 관군은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백성들이 관군을 물리치고 그 거대한 청주성을 점령했으니, 백성들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아마도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했을 때와 거의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이인좌는 경종이 독살되었고,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닌 노론의 책사 김춘택의 아들이라고 선전하였다. 이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이지만, 당시에 민간에 상당히 많이 유포되고 있는 소문이었다. 이인좌는 여기에 더해 청주성 안에 경종의 위패를 받들고 제사를 지내면서 백성들의 민심을 모으려 하였다. 

이러한 남인과 소론 급진파의 생각과 달리 항거에 참여한 백성들은 또 다른 생각을 꿈꾸었다. 질곡에 빠진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켜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남인과 소론 급진파의 권력 장악보다는 기존 권력자들로부터 고통받는 자신들의 삶은 해방시키는데 주력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1728년 정변은 혁명성이 담겨 있는 것이다.

영조의 공격

영조는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백성을 위해 정치를 한다고 노력을 했는데, 백성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영조는 정변에 대해 신속하게 대응했다. 김중기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타고 갈 말이 없다며 청주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총사령관이 타고 갈 말이 없다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기강의 문란은 극심했다. 정말 타고 갈 말이 없었다면 영조의 국정운영은 무능해도 한참 무능한 것이었겠지만, 김중기는 정변 세력들이 한양 도성을 점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오명항의 초상
오명항의 초상

이때 소론인 병조판서 오명항이 자청하여 총사령관으로 임명해 달라고 하였다. 영조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합리적 인물로 평가받는 박문수를 종사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관군을 거느리고 수원을 거쳐 직산으로 간다고 하고 안성으로 진격했다. 자신의 군사 중에 이인좌의 세력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거짓 정보를 흘린 것이다. 이 거짓 정보에 이인좌는 속고 말았다. 그래서 안성의 죽산으로 진격하였다. 이미 오명항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안성 죽산의 청룡산 높은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칠흙같이 어두운 밤에 엄청나게 많은 이인좌의 군사들이 횃불을 들고 소리를 지르며 안성의 너른 죽주 들판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반군의 이동 소리를 들은 관군은 두려움에 떨었다. 그러나 오명항은 차분이 대응했다.

은밀히 매복해 있던 관군은 아무것도 모른 채 진격해오던 반군을 향해 총과 대포를 쏘며 공격했다. 오로지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죽창을 들었던 ‘민군(民軍)’은 정규 군사훈련을 받지 않아 위급 상황에 대한 대처를 할 수 없었다. 그러자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는 갑작스럽게 사라지고 일거에 무너졌다. 참으로 어이없는 순간이었다.

이인좌는 대피를 하였으나 뒤이은 전투에서 생포 당하였다. 이인좌를 돕기 위하여 출병하기로 했던 호남과 영남 세력들은 모두 제 때에 병력을 출격시키지 못해 모두 잡히고 말았다. 이로써 정변 반군은 청주성을 점령하는 위세를 보였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소론과 남인을 통해 소론과 남인을 제압하려는 영조의 결단력과 오명항의 탁월한 전술이 결합되어 1728년 정변 세력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경기도 안성의 죽주 들판.
경기도 안성의 죽주 들판.

백성의 나라, 시민의 나라

만약 이 항거가 성공했다면 과연 백성들의 나라를 만들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양반사대부들의 나라인 조선 사회에서는 기득권들이 온갖 이유와 거짓 윤리를 들어 자신들이 권력을 갖는 나라를 만들었을 것이다. 다만 기득권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권력을 조금 양보하여 백성들의 삶이 약간 나아지게 할 수는 있었을 것이다. 과거시험을 평민들에게도 개방한다든가, 지역 차별을 없앤다든가, 세금 문제를 대대적으로 혁신한다든가, 신분제 문제를 합리적으로 개선하는 정책이 나오긴 했겠지만 백성들이 주도적으로 만드는 나라는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거대한 변혁의 물결은 분명 있었을 것이다.

백성들의 나라를 만들겠다고 야심차게 출발했던 정변은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시위를 당겨 오히려 패배하고 말았다. 그 패배로 인하여 노론 기득권들은 변혁의 기운을 차단하는데 더욱 주력하였다. 

우리가 역사에서 배우는 매우 중요한 사실은 바로 준비되지 않은 혁명은 오히려 독이 되고 역사의 후퇴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항거는 더욱더 강고한 시민 연대와 차분한 준비가 바탕이 되어야만 성공할 수 있다. 

어쨌든 역사는 영조의 승리로 마감되었다. 그나마 영조는 이 정변을 통해 탕평의 절실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기득권은 탕평 군주 영조를 겉에 내세우고 자신들의 기득권은 철저히 유지했다. 노론 기득권은 탕평이라는 이름으로 저항 세력에게 약간의 당근을 나누어 주어, 그들의 분노를 희석시키고 그들이 흡사 자신들과 함께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참으로 무서운 사람들이다. 

300년 전 백성들이 들었던 죽창은 300년 후 오늘 시민의 나라를 만들려는 광장의 촛불이 되었다. 힘들지만 시민은 기득권 세력들과 싸워 이길 것이다. 항거의 힘은 위대하기 때문이다.

김준혁은 역사학자다. 정조(正祖)가 건설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경제적 기반인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화성의 복원 등에 참여하였고,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을 지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 한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리더라면 정조처럼> 등 정조 관련 다수의 저서가 있다. 오랫동안 수원에서 시민운동을 하였고, 촛불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 기사와 뉴스버스 취재를 자발적 구독료로 후원합니다.
후원금 직접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신한은행 140-013-476780 [예금주: ㈜위더미디어 뉴스버스]

뉴스버스 기사 쉽게 보시려면 회원가입과 즐겨찾기를 해주세요.

저작권자 © 뉴스버스(Newsvers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