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능한 선조와 기득권 세력을 향한 백성들의 분노와 저항

”나는 사면을 거부한다“

윤석열 정부의 이명박 전 대통령 꼼수 사면에 들러리 서기 싫다고 김경수 전 경남지사는 사면을 거부했다. 아직도 형기가 15년이 남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사면 복권과 만기출소 5개월 남은 김경수 전 경남지사의 '복권없는 사면'은 형평성에서 문제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다음주 월요일인 27일 윤석열 정부의 첫 사면복권의 대상이 누가 될지는 모르지만 사면·복권이라는 대통령만의 특별 권한은 정파적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국민 전체의 화합과 국가 미래를 위해 행사되어야 한다. 

조선시대 국왕 역시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특별사면을 단행하였다. 국왕의 등극이나 왕세자 책봉 등과 같은 축하할 일이 있을 때 역모죄를 저지른 죄인들을 제와하고, 상당수의 백성들을 민생 경제와 화합 차원에서 풀려났다. 이와 더불어 정말 특별한 정치적 이유로 조정 관료들의 건의에 따라 사면을 단행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국왕만의 고유 권한으로 사면을 단행한 역사와 달리 백성들의 저항에 따른 요구로 사면을 한 특별한 사례가 있다. 바로 임진왜란 극복의 주역이자 어진 재상의 대명사로 알려진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사면·복권이다.

유성룡이 태어난 경북 안동의 하회마을 전경. 낙동강이 마을을 감싸안고 흐르고 있다.
유성룡이 태어난 경북 안동의 하회마을 전경. 낙동강이 마을을 감싸안고 흐르고 있다.

무능한 국왕 선조

유성룡에 대해 우리는 흔히 오랫동안 영의정을 역임하였으니 선조와 조정의 대신들에게 존경만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도 정치라는 비정함속에서 선조와 주류 정치파에 의해 ‘토사구팽(兎死狗烹)’ 당하는 비애를 겪었다. 하지도 않은 일들로 모함을 받고, 명예 살인을 당하기도 하였다.

현재의 정치나 과거의 정치나 무능한 이들이 집권을 하면 국가의 안위보다 자신만의 이익을 위한 정치를 하여 나라는 절단나고 인재들은 사라지게 된다. 허깨비같은 자들이 실세로 군림하며 온갖 포악한 짓도 서슴지 않는다. 그 과정에 무능한 지도자가 상징으로 나타난다.

서애 유성룡을 시기하고 탄핵한 군주는 ‘선조(宣祖)’다. 선조는 자신보다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인물에 대해 받아들이지 못했다. 좀스럽고 쩨쩨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머리가 좋아 학문적 능력은 탁월했던 선조는 자신의 공적을 드러내기 좋아했고, 자신의 허물은 철저히 감추는데 급급한 인간이었다. 오늘날에도 공부를 잘해 검사, 판사가 되어 사회의 주류가 되었지만 힘없고 가난한 이들의 고통을 모르는, ‘측은지심(惻隱之心)’이 없다면 '선조형 인간'일 뿐이다. 선조는 특히 자신보다 잘나고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이들을 끔찍이 싫어했다.

그로 인하여 대동세상을 꿈꾼 정여립과 백성들의 영웅인 의병장 김덕령이 선조의 손에 의해 역적으로 죽어 나갔다. 그리고 임진왜란 극복의 주역인 이순신도 사실상 선조 때문에 스스로 죽음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백성들이 이들을 지지하는 것을 선조는 자신에 대한 모독으로 여겼을 것이다. 목숨을 부지하느라 야밤에 도성을 버리고 도망하는 자신의 가마에 돌을 던진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라면 역적이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자식과도 같은 백성을 버리고 자기만 살겠다고 도망가는 임금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임금의 가마에 돌을 던지고 경복궁에 불을 지른 것은 기득권에 대한 백성들의 저항이었다. 백성을 버린 임금을 인정하지 않고,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따르고 존경하는 것 역시도 백성들의 또 다른 저항이다. 

조선시대 임진왜란 극복의 주역 유성룡은 탁월한 조율 능력의 리더십으로 망하기 직전의 조선을 살렸다. 국왕인 선조가 무능의 극치를 보일 때 탁월한 정세 분석과 이순신 등 전쟁에 필요한 장수들의 활용을 통해 일본의 침략에 효과적인 대응을 하였고, 마침내 이땅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그럼에도 유성룡은 선조와 권력의 중심축인 서인(西人)과 북인(北人)들에 의해 배척을 당하고, 엄청난 치욕을 겪으며 조정에서 쫓겨나야 했다. 비정한 정치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치욕의 불명예는 백성들에 의해 회복될 수 있었고, 완전히 몰락하던 그는 백성들의 저항에 의해 국왕 선조로부터 사면복권 될 수 있었다. 특별하면서도 너무나 당연한 역사가 그 시대에 존재했다. 

대한민국 현실과도 유사한 그 드라마틱한 역사를 만나보도록 하자.

유성룡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동의 병산서원(만대루). 
유성룡이 제자들을 가르치던 경북 안동시 풍천면 병산동의 병산서원(만대루). 

명나라의 거짓 모략

전쟁이 끝난 이후 명나라 고위 관원들 사이에 문제가 생겨 조선의 국왕 선조를 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1598년(선조 31) 6월에 명나라 황제 만력제(萬曆帝)의 측근인 정응태(丁鷹泰)와 조선 파병군 장수인 양호(楊鎬) 사이에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일본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자랑하는 양호에게 만력제의 신임이 갈 것을 두려워한 정응태는 양호와 선조를 동시에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 내용은 바로 선조가 명나라 영토인 요동(遼東)을 얻기 위하여 일부러 일본군을 끌어들여 명나라와 싸우게 했다는 것이다. 

정응태는 전쟁중에 조선으로 파견을 나가 평안도 정주에 머무르면서 조선과 일본이 비밀리에 교섭하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 사실이 《해동기략(海東記略)》이라는 책에 자세히 실려있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대마도와 남해안의 여러 섬에서 조선과 일본이 교류를 하였고, 그 핵심 내용은 바로 조선과 일본이 합심하여 명나라를 물리치고 요동땅을 확보하자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조선이 만력제가 등극하고 나서 은근히 중국을 경시하고, 중국 황제를 우습게 알았다고 하였다. 그는 또한 조선이 오랫동안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싶어 하였기 때문에 일본을 끌어들였는데, 일본이 조선의 뒤통수를 쳐서 조선마저 집어삼키려 하였고, 이는 조선이 자초한 일이라고 조선을 저주하였다. 정응태의 상소가 교묘한 것은 조선이 중국에 사대(事大)하면서도 황제처럼 종묘에 고할 때 ‘조(祖)’와 ‘종(宗)’의 묘호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조선 건국 후 아무 문제가 없는 ‘조종(祖宗)’의 묘호를 쓰는 것이 마치 중국을 무시하고 역변을 준비하기 위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선조는 명나라 황제 만력제에 올린 정응태의 상소에 분노하면서도 정응태의 말이 절대 사실이 아니라는 해명을 만력제에게 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당대 최고의 문장가인 월사 이정구에게 해명서를 쓰게 하고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기로 하였다.

서인과 북인세력의 유성룡에 대한 모략

서인과 북인들은 정응태의 잘못된 상소가 유성룡 때문에 만들어진 일이라는 억지 논리를 만들었다. 일본군과 끝까지 싸워 이길 수 있었는데, 유성룡이 일본과 화해하자고 하여 전쟁이 마무리 되어 명나라가 오해를 하게 된 것이라고 하였다. 전쟁이 끝나자 가장 크게 공헌한 이를 내치고 권력을 잡기 위한 모략을 만들어 낸 것이다. 비정함을 넘어선 인면수심의 정치였다. 

선조는 정응태의 상소 내용이 조정에 알려진 때부터 자신의 전각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조회도 열지 않고 조정의 업무는 세자인 광해군에게 처리하게 하고, 중국 사신들도 세자가 만났다. 국왕으로서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신하들 탓만 하기 시작했다. 이때 영의정 유성룡은 백관을 거느리고 선조에게 찾아가 국왕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해달라고 간곡하게 요청하였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온갖 어려운 일을 다 겪은 늙은 대신의 간곡한 부탁에도 선조는 듣지 않고 임금의 자리를 내놓겠다고 신하들을 겁박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병이 깊어 평안도 평산의 온천에 가서 치료나 하겠다고 엉뚱한 소리를 늘어놓았다. 

당시 서인과 북인들은 유성룡으로 인하여 일본과 화해가 된 것이 오히려 명나라에 오해를 사게 되었으니, 명나라 사신단 책임자로 유성룡이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조 역시 유성룡이 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유성룡은 자신이 가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다. 유성룡이 일본과 화해를 하여 전쟁을 종식시킨 것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반드시 해야 할 중요한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응태가 이러한 사실을 왜곡하였기에 본인이 가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이는 유성룡의 판단이 올바른 것이었다. 

그러나 남인의 영수인 유성룡이 영의정에 있으면서 국정운영의 중심에 있는 것을 좋게 여기지 않은 북인과 서인들은 유성룡이 나라의 안위는 내팽개치고 자신만을 위하여 명나라 사신으로 가려 하지 않는다고 모함했다. 대표적으로 세자의 최측근인 이이첨이 유성룡이 가려 하지 않으니 임금이 경시당하는 것이라며 자신을 파직하라고 선조에게 간청했다. 이는 자신을 파직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유성룡을 협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결국 선조는 유성룡 대신 이항복을 명나라에 진주사(陳奏使)로 보내어 해결에 나섰다.

유성룡이 임진왜란의 원인 전황 등을 수기로 기록한 책 징비록.
유성룡이 임진왜란의 원인 전황 등을 수기로 기록한 책 징비록.

유성룡을 파직하라

그러나 이항복을 진주사로 보내는 것으로 결정나서 정응태의 상소 문제가 일단락 되는 듯 하더니, 이때부터 유성룡에 대한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다. 이항복이 진주사로 정해진 당일인 9월 1일 병조좌랑 윤홍이 유성룡을 탄핵하였다. 이에 대하여 유성룡은 진주사로 가지 않은 것은 전쟁의 마무리와 전쟁으로 인한 국가의 손실과 백성의 고통스런 현실을 수습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더불어 자신의 건강이 몹시 쇠약해져서 도저히 갈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윤홍의 탄핵에 대하여 도의적 책임을 지고 영의정에서 물러나겠다고 선조에게 파직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선조는 유성룡의 요청에 간단하게 사직하지 말라고만 하였다. 그러나 서인과 북인 관원들의 공격은 집요하였다. 성균관 유생 이호신이 유성룡이 임금의 억울한 일을 해결하려는 정성이 부족하다며 충격적인 발언을 하였다. “유성룡은 본래 사특한 사람으로서 교활한 말과 행동으로 일세를 감쪽같이 속여서 조정의 기강을 마음대로 농락하고 흉억(胷臆)을 자행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말이다. 이호신은 애국자를 교활하고 흉악한 인간으로 만들고 있었다. 일개 성균관 유생이 어찌 조정의 일을 다 알 수 있겠는가? 이호신이야말로 서인과 북인들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였다. 젊은 성균관 유생의 말도 안되는 모욕적인 발언을 들은 유성룡은 더이상 조정에 있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영해(嶺海) 밖이 신(臣)이 죽을 곳이요, 조정의 재상 지위는 이미 신이 있을 자리가 아닙니다” 라며 사직을 청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선조는 유성룡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하며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날 부제학 김늑과 응교 홍경신 그리고 수찬 심액이 유성룡을 옹호하는 상소를 올렸지만, 이미 선조의 속마음은 유성룡을 조정에서 내보내는 것이었다. 곧이어 대사헌 정창연 등이 유성룡 파직을 강력하게 건의하자, 선조는 마지못한 듯 파직은 너무 심한 것이고, 영의정의 자리에 대한 직위해제로 정리하였다.

유성룡은 부정축재자다

10월 2일 유성룡이 사직 상소를 올렸음에도 다음 날부터 유성룡을 파직하라는 상소가 지속적으로 올라왔다. 사헌부도 공식적으로 유성룡을 파직시키라고 하였다. 이날부터 시작해서 단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한달 가까이 유성룡을 파직하라는 상소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것으로 유성룡에 대한 공격이 끝나지 않았다. 이들의 목적은 단순히 유성룡의 영의정 자리를 빼앗는 것이 아니라 유성룡을 부정축재자로 만들어 그의 정치생명을 끊고 인격을 모독하고자 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 젊은 성균관 유생들을 동원했다. 성균관 생원 정급은 선조에게 유성룡 탄핵의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는 이전의 내용과 달리 유성룡이 간악한 패륜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유성룡이 조정의 권력을 움켜쥐고 영동(嶺東)과 영남(嶺南) 여러 고을의 모든 역(驛)에 친척들을 배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른바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훈련시킨다는 것으로 칭탁하고 이익을 모두 취하여 베·곡식·물고기·소금·축산·가죽·뿔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적으로 친한 사람을 시켜 관리하게 하였습니다. 서울에 있는 집이 겉으로는 비록 소박한 것처럼 보이지만 남모르게 뇌물이 오가고 안동(安東)의 사저에는 선물 꾸러미가 줄을 이었으니 교활한 작태는 포피(布被) 보다 더 심합니다.”

조정의 중신으로 정책의 오류를 범해 나라에 해악을 끼쳤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사악한 부정축재자로 몰아 공격하는 것이다. 대장동 사건을 빌미 삼아 정적을 제거하려는 것과 흡사하다. 정치판에서 모함과 모략으로 공격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정치인들의 술수다. 

11월 1일 정언 문홍도는 “유성룡이 간사하여 자기보다 나은 자를 시기하고 국사를 그르치고 백성을 괴롭히는 죄상이 있는데도, 조정에서는 보복을 두려워하고 감히 그의 간사함을 공격하지 못하였다”고 선조에게 상소를 올렸다. 유성룡을 진짜 악마화 하는 작업을 진행하는 것이다.

결국 11월 19일 선조는 유성룡을 파직시켰다. 자신은 유성룡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조정의 대소신료들이 너무도 유성룡의 비리를 고발해서 어쩔 수 없이 파직을 허용한다는 것이다. 참으로 선조다운 행동이었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 수리에 자리잡고 있는 유성룡 묘.
경북 안동시 풍산읍 수리에 자리잡고 있는 유성룡 묘.

유성룡을 삭탈관직하라

선조가 유성룡을 파직시킨 다음 날 홍문관이 파직만으로 모자란다며 유성룡을 ‘삭탈관직(削奪官職)’ 해야 한다고 요청했다. ‘삭탈관직’은 지금까지의 모든 정치 활동, 즉 문과에 급제하여 관료로 입문하면서 성장한 모든 직위의 일을 삭제하고, 양반 사대부의 명단에서 지우라는 것이다. 유성룡의 생애 전체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만약 유성룡이 다시 조정에 나와 국정 운영에 참여하면 남인들이 조정에 나와 자신들과 권력 다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유성룡이 속한 남인을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서도 유성룡의 존재 자체를 사라지게 하겠다는 것이다.

선조는 유성룡을 이미 파직시켰는데, 어찌 삭탈관직까지 시켜야겠느냐면서 속마음을 감추었다. ‘명분쌓기’를 하고자 한 것이다. 어느 정도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선조는 유성룡의 정치 생명을 끊기 위해 12월 6일 삭탈관직을 명령하였다. 자신보다도 백성들에게 더욱 존중 받는 유성룡의 제거에 성공한 것이다. 

선조와 서인, 북인들의 속셈은 어느 정도 성공하는 듯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백성들과 분리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뇌물을 받아 은밀히 재산을 형성하는 부정축재 파렴치범으로 모는 것이다. 유성룡이 겉으로는 청렴하고 당파에 치우치지 않는 공정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였지만, 실제 그가 재물을 탐하고 돈을 은밀한 곳에 감추어 둔 사람이라고 하면 백성들은 유성룡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저버리고, 그가 속한 남인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선조와 권력자들은 자신들과 경쟁하는 남인을 죽이기 위해 유성룡을 비리 행위자로 만들기로 한 것이다.

백성들의 분노와 저항

그러나 그들의 실수였다. 백성들은 자신들이 늘 보던 유성룡이 부정축재자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오히려 유성룡을 파렴치범으로 만들고자 하는 서인과 북인 세력들을 나쁜 정치인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백성들은 무능한 선조와 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오로지 권력 장악에만 혈안이 된 기득권 세력들에 분노를 느꼈다. 백성들의 저항이 시작된 것이다.

백성들은 공공연하게 국왕과 유성룡을 모해하는 기득권 관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성룡은 잘못이 없다”. “유성룡은 청백리다” 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백성들의 저항에 서인들은 위기 의식을 느꼈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고 생각했던 백성들의 저항이 거대한 폭풍이 되어 조정 관료 모두를 적으로 돌리고 국가 전복의 민란(民亂)으로 전환될 조짐이었다. 유성룡 이후 영의정에 있던 이항복은 이러한 백성의 저항이 더 거세지기 전에 백성들을 무마하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항복은 서인이지만 합리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진주사로 명나라에 가 있는 동안 유성룡이 파직되었고, 그는 이것에 대하여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백성들의 저항을 위무하지 않으면 큰 일이 날 수 있음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는 이 중요한 사실을 선조에게 이야기했다.

경북 안동 하회마을의 초가.
경북 안동 하회마을의 초가.

유성룡의 사면복권, 백성들의 승리

백성들을 우습게 생각하던 선조는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출구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유성룡의 삭탈관직을 없던 일로 하기 위한 명분쌓기를 시작한 것이다. 선조는 조정의 관료들에게 이미 삭탈관직 당하고 고향 안동으로 내려간 유성룡을 칭찬하기 시작하였다.  "유성룡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 수 없다만 그가 떠나간 후로 국사가 날로 엉성해지고 더욱 해이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전일에 이미 삭직했다고 해서 어찌 끝내 복관(復官)하지 않겠는가!“

선조는 신하들에게 유성룡의 복관을 은근하게 떠보았다. 이미 눈치 빠른 서인 세력들은 선조의 의도를 알아챘다. 아니 자신들이 살기 위해 선조의 타협안을 받아들여야 했다.  

선조는 결국 유성룡을 삭탈관직 한지 5년 뒤인 1603년(선조 36) 12월에 유성룡을 사면하고 복관시켰다. 요즘으로 치면 사면복권을 시킨 것이다. 만약 유성룡의 명예를 회복시키지 않았으면 백성들이 진짜 나라를 전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조는 유성룡에게 다시 조정에 들어오라고 요청했지만, 유성룡은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국왕 선조와 백성들의 삶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권력 만을 얻고자 하는 서인 기득권 세력에 대한 노(老) 대신의 저항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바로 유성룡을 지켜준 백성들의 저항이었다.

백성들의 힘이 국왕과 조정 관료들을 움직여 명예 살인 당한 유성룡을 살려낸 것이다. 백성들의 저항이 백성과 나라를 위해 희생한 정치인을 회생시킨 것이다. 백성의 저항은 참으로 무섭고 고귀한 것이다.

윤석열 정부도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명확히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선조와 서인 세력들이 백성들의 저항을 두려워하였듯이, 국민들의 저항을 두려워하고 국민 화합을 위한 방향의 사면복권을 단행해야 한다.

국가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지 않고 정적만을 제거하려는 낮은 수준의 정치를 해서는 안된다. 올바른 정치인은 아무리 죽이려 해도 국민들이 그를 살리고 나라를 위해 일을 하게 할 것이다. 역사의 진리이자 교훈이다.

김준혁은 역사학자다. 정조(正祖)가 건설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경제적 기반인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화성의 복원 등에 참여하였고,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을 지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 한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리더라면 정조처럼> 등 정조 관련 다수의 저서가 있다. 오랫동안 수원에서 시민운동을 하였고, 촛불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 기사와 뉴스버스 취재를 자발적 구독료로 후원합니다.
후원금 직접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신한은행 140-013-476780 [예금주: ㈜위더미디어 뉴스버스]

뉴스버스 기사 쉽게 보시려면 회원가입과 즐겨찾기를 해주세요.

저작권자 © 뉴스버스(Newsvers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