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하고 급박한 세상 문제의 시그널을 보내는 작가
축제에 참가했던 160명 가까운 젊은이들이 거리 골목에 서서 끼여 죽는 참사가 발생했다. 첨단 무기를 동원한 국가간 전면적인 단일 전투에서도 발생하기 힘든 사상자 규모이다.
1년 가까이 이어지는 차르 푸틴이 통치하는 러시아와 미국 패권을 대신한 우크라이나간의 전쟁에서 핵무기 사용이 공공연히 거론되는 한편, 중동의 부국 카타르에서 열리는 월드컵에 세계인은 열광하고 있다.
지구촌에는 추위와 더위 속에서도 생존을 위해 삶의 터에서 탈출한 3천여만명의 난민들이 삶의 기로를 헤맨다.
참사의 애도마저 통제하는 게 시대의 풍경이 되었다. 상여 행렬도 없었으며, 만장(輓章)은 나부끼지 않았다.
‘한국화’(동양화)라고 하면 여전히 ‘음풍농월’(吟風弄月)의 산수화가 연상되던 2006년, 대학원생 고영미는 미사일과 폭탄이 날아드는 전투 장면을 표현한 작품을 발표해 화단에 충격을 주었다.
고영미는 색채와 형식에 구애 받지 않는 민화의 자유분방한 양식을 차용해 한지에 채색으로 작업하였다. 색채가 들어간 산수 풍경에 전투기와 나체 여인이 등장하는 게 그런 특징을 잡고 표현한 것이다.
작가들은 종종 중국화 중심의 동양 미학과 구분하고 한국성을 강조하기 위해 민화 양식을 차용한다.
고영미는 동양화가 갖고 있는 오리무중의 지엄한 전통, 정신성 중시, 기술의 정점 쌓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한편으로는 구성과 구도에서 자신이 배운 전통 회화와 차별을 하고 싶었다.
<찬란한 봄날, 2005년> 작품 시리즈는 문구점에서 파는 조립용 플라스틱 장난감에 빗대어, 일상의 어느 날 느닷없이 전쟁이 다가올 수 있음을 암시한다. 전시의 주제였던 전쟁 풍경화는 10여년을 건너뛰어 2019년 서울대미술관 <재난> 전시에도 주요 작품으로 등장한다. 강렬한 주제 의식을 가진 작품은 시간을 관통한다.
군 복무중 동생이 한쪽 눈을 실명했으나 작가는 폐쇄적인 군에 책임이나 보상을 요구할 수 없었다. 이 땅은 1953년 한국 전쟁 휴전 이후에도 여전히 전쟁의 기운이 꿈틀거린다. 국민 개병제를 근간으로 하는 병영 국가 체제에서 삶을 영위하는 소시민들은 명분 없는 자기 희생에 대해 무력하기만 하다.
고영미는 거대한 권력 앞에서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조하면서 그림으로 시대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동생은 국가유공자로 처우를 받게 되었으나 이후 북한의 핵 위협뿐 아니라 전쟁으로 치닫을 수 있는 국제정치 문제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미·중 전략 경쟁이 점점 심화될수록 중·일간 영토 분쟁 지역 댜오위다오(센카쿠 열도)의 군사적 긴장이 높아진다는걸 알게 되었다.
고영미가 묘사하는 찬란한 풍경의 끝은 눈물 머금은 슬픔이다. 그 뒤에는 죽음의 영역으로 넘어가는 또 다른 ‘슬픈 두려움’이 있다. 시공간을 교차한 풍경 너머에는 어두운 경사진 길을 걸으며 만나는 그 세계의 나그네가 있다.
소위 ‘전쟁 작업’은 작가의 가족에게서 시작된 트라우마와 세상 밖 풍경이 뒤섞여 시작되었다. 전쟁 풍경은 종말의 서막(the begining of the end)을 알리는 미장센이다.
고영미는 2008년 전시 <인생은 이름다워>에서 평면과 영상, 평면과 설치라는 매체 조합을 시도했다.
2012년~2015년 애도 작업프로젝트는 고영미 작업의 맥락에서 다소 벗어날 수도 있으나, 작가가 품었으나 생명을 잃었던 시기의 감정과 겹친다. 매일 다녔던 경기도 파주 자유로에서 로드킬로 생명을 잃어야 했던 작은 동물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고 싶은 마음으로 드러났다.
만물이 만개하는 매화 향 가득한 평화로운 봄 밤, 화려한 치장을 한 한 쌍의 새가 자리잡은 둥지에 뱀이 스멀스멀 침투한다. 화폭에는 긴장감이 흐른다. 노래하지 않는 새들은 위험을 감지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비극의 발생이 예견되는 불편한 풍경은 사태가 평화로이 해결되기를 기원하는 관객들의 갈망을 불러 일으킨다.
동물의 세계는 인간 세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가족과 가정의 평화를 깨는 사악한 기운은 삶에 다양한 방식으로 드리운다.
성서에 나오는 뱀을 도상으로 등장시킨 작품 <봄 밤>, <판도라의 상자>는 윌리엄 세익스피어 원작의 희곡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을 차용 또는 오마주 한걸로도 보인다. 희곡은 밤과 낮의 대비에 따라 환상과 현실의 공간을 넘나들며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가 펼쳐진다. 희곡의 ‘극중 극’은 회화적 이미지로 각인된다.
작품 속 배경은 마티에르를 드러내지 않는 한지 꼴라주를 활용한 진하거나 흐릿한 먹 색의 대비로 환상과 현실을, 인간과 동물의 세계를 오가는 듯 몽환적인 공간 상황을 연출한다.
<아름다운 겨울에서 슬픔을 보다, 2007>, <인생은 아름다워, 2008>, <한 여름 밤의 꿈, 2009>에서 보듯 전시 타이틀은 한결같이 은유적이고 반어법적이다.
영상작업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2010)는 이상 탄생 100주년 해에 시를 바탕으로 작업했다. 아해를 자신의 작업에 등장하는 나체의 여인으로 바꿔 제작했다.
고영미 작법(作法)인 ‘잔혹 동화’ 형식에서 ‘동화’는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동화’(童話·fairy tale)와 동화’(東畵·oriental painting)이다. 전자는 겉으로 보이는 인간 세계의 상징성을 말한다. 후자는 동양화적인 이상향과 형식의 그림을 일컫는다.
작가의 30대는 화폭에 머물 수 없었다. 자신의 신앙과 새로운 생명에 대한 갈구와 신념, 자신의 몸과 싸웠다.
최근 몇 년 사이 현대 미술의 거장이 되어버린 바버라 크루거(Babara Kruger, 1945~ )는 여성을 향해 'Your body is a battleground(당신 몸은 전쟁터다)'고 일갈한 바 있다.
크루거는 동시대 사회의 메커니즘과 대중 매체 속에서 읽을 수 있는 권력, 욕망, 소비주의, 젠더, 계급 등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는다.
고영미는 여섯 번의 유산을 경험하였다. 온전한 생명으로 자라지 못한 채 사라져간 존재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그리움 끝에 건강한 아이 둘을 얻었다.
지난한 시간 동안 매번 존재들을 떠나 보내는 이별 의식은 슬프고 고독했다. 잔잔한 밤의 강에 비애의 배를 띄우고 그들끼리 부대낄 수 있도록 촛불을 켜 물결과 바람 따라 피안의 하구로 떠나 보냈다.
고영미는 “여성에게 임신과 출산은 양동이에 물을 받아 머리에 이고 100미터를 달리는 거와 같다.”고 한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절을 다 바쳐서라도 건강한 아이를 낳는 게 목표가 되었다.
고영미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분홍의 붉은 색은, 전쟁, 유혈, 모성을 상징한다. 모성은 희생을 바탕으로 한다.
왜 자신에게 유산이 반복해서 일어나는지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과학으로 해결 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작업을 하면서도 독성이 강한 화학적 재료를 사용하지 않았기에 몸에 섭취되는 식품으로 관심이 갔다.
들여다 보니 먹고 사는 일상이 전쟁터 아닌가. 바다에 떠 다니는 미세 플라스틱을 먹은 물고기, 유전자 조작으로 집단 재배된 곡물 등.
이러한 관심은 주제 <계획된 우연-최후의 만찬>으로, 잔혹하고 불편한 사물들이 등장하는 낯선 다이닝 테이블의 우드 조각 오브제 작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유명한 작품 <최후의 만찬>은 성경에서 유래했으며, 인간의 배신과 거짓, 욕망, 나약함을 상징한다.
제법 격식을 갖춘 레스토랑에서 볼법한 화려한 요리, 먹다 남은 흔적의 접시, 꽃병, 먹음직한 디저트와 음료, 잔들은 겉모양을 딴 우드 조각에 채색되어 입체(부조)로 제작되고 오브제가 되어 벽면에 설치된다.
맛있을 것 같고 예쁘게 정렬된 음식들 사이로 분명 식용은 아닌 뱀, 틀니, 눈알, 손가락으로 보이는 소시지, 편지, 칼, 총, 가위, 깨진 안경, 열쇠 등이 등장한다. 자신에게 닥친 불운의 근원을 거슬러 가 보았다.
작가는 이미지를 조합하거나 설정하여 일상에서 갑자기 다가왔던 사건의 경험들을 다이닝 테이블 위에 배열된 사물들로 빗대었다. 불안한 욕망을 딛고 사는 인간과 이익 사슬 구조로 엮인 사회의 이면을 암시한다.
작가는 부조리하고 또는 모순적인 상황, 신성한 의미에서 전시장에서 베일을 쓴 채 오브제를 작업한 후 완성되면 바로 벽면에 붙여 디스플레이를 완성해가는 퍼포먼스(2019)도 진행했다.
인간은 절망의 늪에 빠지면 대부분 자신의 영혼을 신앙에 기대며 절대자에 의탁한다. 가톨릭 신자인 고영미는 성경 공부 3년여 동안 말씀 묵상과 기도, 하느님께 바치는 최고의 제사인 미사에 참례하며 미사보(베일)를 쓰고 자신의 영혼을 온전히 맡겼다.
십자고상, 배일 등 성물(聖物)은 하느님께 이르는 매개이다. 성전에서 베일은 악도 선도 가리는 자신에게 내면의 공간을 제공한다. 자신을 들여다 보며 깊은 곳에 이르러 고요해 지기를 기다렸다.
15~16년 이상 가족과 자신과의 전쟁을 겪은 고영미는 작가로서 더 이상 밀릴 수 없다는 심정으로 2023년 개인전을 기다린다.
전쟁 풍경화에서 시작한 작가의 현실 비판은 식탁 위 성찬의 음식 속 불편한 사물들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현대 사회의 피할 수 없는 거대 담론에 이른다.
필자는 '작가는 자신이 살아가는 동시대를 기록할 의무가 있다'고 본다. 사회 비판은 이러한 작가로서의 임무에 대한 인식의 바탕 위에서 가능한 일이다.
(한국의) 전통 회화의 매체적 특성을 살리고, 무시할 수 없는 현실에서의 현대 미술을 포괄하면서 내재적으로는 한국사회를 응시하는 작업은 참으로 지난한 일이다.
고영미는 삶의 흐름 속에 직접 경험한 일련의 사건 사고들, 혹은 삶의 일부로 와 닿는 미디어에서 다루는 사회이슈(특히 전쟁)에 민감하다.
고영미는 사회가 점점 개인주의와 이념의 양극화로 치닫고 있다고 본다. 갈수록 인간성 상실의 심각성을 느낀다. 아이들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예측이 되지 않는다. 자신이 상업적인 (예쁜)그림을 그릴 수 없는 이유이다.
이 시대 작가의 미션은, 너무도 긴급하고 급박한 세상의 문제를 작업을 통해 사회에 시그널을 보내야 하는 것으로 본다.
심정택은 쌍용자동차, 삼성자동차 등 자동차회사 기획 부서에서 근무했고 홍보 대행사를 경영했다. 이후 상업 갤러리를 운영하면서 50여회의 초대전, 국내외 300여 군데의 작가 스튜디오를 탐방한 14년차 미술 현장 전문가이다. 2000년대 초반부터 각 언론에 재계 및 산업 칼럼을 써왔고, 최근에는 미술 및 건축 칼럼으로 영역을 확장했다. 저서로는 '삼성의몰락', '현대자동차를 말한다', '이건희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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