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너미 시리즈6

표제음악 선구자 베를리오즈 &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 파가니니 (1)

사실 음악에 분류가 무슨 필요가 있으랴, 그냥 들어서 좋으면 그것으로 그만인 것을. 엘비스 프레슬리는 이렇게 말했다. “제 음악을 알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들으면 돼요. 그럼 알게 될 테니까.”

서울대 교수 박인수가 가수 이동원과 ‘향수’를 함께 불렀다고 근엄한 클래식 음악계로부터 클래식 음악을 욕보였다는 질타를 받던 것이 불과 30여년 전이다.

그러나 학문적 틀로 연구를 해야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분류는 필수적인 작업이 된다. 통상 예술음악과 대중음악이라는 분류가 일반화해 있지만, 오늘날 예술음악으로 불리는 상당수의 음악들은 과거 그 음악들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목적상 대부분 대중음악이었다. 다만 그 연주가 귀족들을 위한 작은 곳에서 이루어졌느냐 대중을 위해 교회나 오페라극장에서 이루어졌느냐 정도가 달랐을 뿐이었다. 20세기 말엽부터 세상의 거의 모든 교향악단들이 비틀즈를 연주하고 있지 않은가.

막연히 예술음악일 것으로 분류되는 음악은 다시 표제음악과 절대음악 혹은 순수음악으로 분류될 수 있다. 일찍이 피타고라스는 음악에 대하여 우주의 수를 소리로 표현한 것이라고 정의했고, 중세의 대학들에서는 음악을 철학과 수학, 기하학과 더불어 4개의 주요 필수과목(Quadrivium)으로 가르쳤다.

절대음악(Absolute music) 혹은 순수음악이라는 개념은 오로지 음악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음악행위의 결과로 받아들여져 왔다. 음악형식, 번호, 음계 등의 음악적 기호로만 작품이 표기된다. 성악곡은 원칙적으로 시를 바탕으로 작곡되기 때문에 문학과의 연계로 인해 절대음악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은 그런 의미에서 설득력을 갖는다.

그 반대편에 있는 표제음악(標題音樂, Program music)이란 음악 외적인 이야기를 음악적으로 묘사하는 예술음악의 한 종류이며, 절대 음악과는 반대되는 개념이다. 소재 또는 제목을 가지고 그것을 통해 표기된다. 

이 구분에도 틈새는 있다. 이를 테면 우리가 오늘날 '운명 교향곡'이라고 부르는 작품은 원래 베토벤의 ‘교향곡 제5번 C단조’이며 엘비라 마디간이라고 부르는 작품은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21번 C장조’다. 하이든의 놀람 교향곡은 교향곡 제94번 G장조이고, 슈베르트의 미완성 교향곡은 교향곡 제8번 B단조다. 이런 별명을 가진 음악들은 대개 후대에 별명을 붙인 것들로서 작곡자는 작품을 쓴 동기나 기분을 말했을 뿐인데, 그것이 별칭으로 굳어졌다.

특히 베토벤 작품들의 별칭은 일본인들에 의해 붙여진 것들이 많다. 기악곡들 가운데 표제음악의 선구적 작품으로 알려진 것은 비발디의 ‘사계’로 사계절을 노래한 소네트와 함께 출판되었다. 그 이후 한동안 표제음악이라고 할 만한 것은 적어도 기악곡 사이에서는 보기 어려웠다.

질풍노도의 시대와 함께 찾아온 낭만음악의 시대는 표제음악과 함께 도래했다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음악사는 대개 ‘웰링턴의 승리’라는 확실한 표제음악을 작곡한 베토벤의 사망연도인 1827년을 고전음악 시대의 종료로 잡지만, 그렇게 기록한 음악사학자마저 위대한 바흐의 죽음처럼 확연한 것은 될 수 없다는 데 동의한다. 그리고 표제음악을 낭만시대의 대세로 만든 사람과 기념비적인 작품은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이었다. 그리고 낭만음악의 여명기에 인간의 감정이 그렇게도 폭넓고도 변화무쌍함을 화려한 연주로 세상에 알린 낭만음악의 전도사는 파가니니였다. 이번 달의 프레너미는 낭만음악을 앞에서 끌었던 그들의 이야기다.

젊은 시절 파가니니의 초상화.
젊은 시절 파가니니의 초상화.

고전의 끝에서 낭만을 시작한 파가니니

니콜로 파가니니(Niccolò Paganini 1782~1840)는 모차르트가 한참 비엔나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시기인 고전시대 전성기에 이탈리아의 제노바(Genova)에서 사업에 실패한 무역상 아버지 안토니오와 서민 출신 어머니 테레사 사이에서 6자녀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당시 이탈리아 내에서 베네치아와 더불어 공화국으로 남아있던 그곳에서 부친 안토니오는 부두 하역일 외에 만돌린 연주로 가족의 생계를 꾸릴 수 있었다. 천사와 같은 빛의 움직임을 보았다는 어머니의 태몽이 전해오는 꼬마 니콜로는 4살에 병으로 의사에게 사망 선고를 받았으나 신앙심이 깊었던 어머니 테레사의 기도로 깨어났다. 이후 건강 문제가 일생동안 따라다니게 된다.

도박에 빠져있던 아버지는 5살 니콜로에게 만돌린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아이는 7살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듬해 아이는 최초로 바이올린 소나타를 작곡했다. 파가니니의 재능을 눈치챈 그의 부친은 제2의 모차르트를 꿈꾸던 베토벤의 부친처럼 아들에게 하루에 12~14시간씩 혹독한 연습을 시켰다. 아버지의 욕심과 어머니의 천사 환상은 아이에게 자극이 되었다.

파가니니와 리스트의 스승 파에르의 초상화.
파가니니와 리스트의 스승 파에르의 초상화.

9살 아이의 뛰어난 재능은 금방 소문이 나서 세르베토(Giovanni Servetto)와 코스타(Giacomo Costa) 등 제노바 지역의 바이올리니스트들이 그를 가르쳤다. 11살 때 성악가 마르케시(Luigi Marchesi)와 베르티노티(Teresa Bertinotti)의 공연에 찬조 출연하여 재능이 알려지자 첫 후원자도 생기는 등 장학금도 모아져 음악수업은 어렵지 않았다. 파르마(Parma)에 연주하러 간 니콜로는 롤라의 소개로 기레티(Gasparo Ghiretti)와 파에르(Ferdinando Paer)에게 작곡법을 배울 기회를 얻는데, 파에르는 나중에 리스트의 스승이기도 했다. 수업은 1년으로 길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니콜로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1796년 혁명중이던 프랑스군의 침입으로 제노바 공화국은 점령당하고 파가니니 가족은 피난을 가는데, 이때 머무른 로마이로네(Romairone)에서 니콜로는 클래식 기타를 배워 이후 그의 콘서트에 기타를 자주 등장시킨 배경이 되었다. 이듬해 15세에 이른 파가니니는 처음으로 공식 연주여행을 하게 되어 밀라노와 볼로냐, 피렌체, 피사, 파르마, 레그호른을 돈다. 놀라운 기량에 청중들은 놀랐고 아버지 안토니오는 수확의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아들은 폭군 아버지로부터의 자유를 갈망하게 된다. 그는 연습할 때와 잘 때에만 아버지의 감시로부터 놓여날 수 있었기에 더욱 연습에 집중했다. 그 다음 연주여행에서 니콜로는 몇 살 위의 형 루이지와 가겠다고 제안했고 부친은 받아들였다. 1800년에 이르러 부친은 다시 해운 일을 시작했고, 한결 자유로워진 파가니니는 이듬해 산타 크로체(Santa Croce) 축제 연주의 대성공으로 루카 공화국(he Republic of Lucca)의 수석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어 처음으로 월급을 받는 처지가 된다. 루카 정착과 동시에 그의 도박과 여성편력도 시작되었다. 그러나 너무 빠른 성공에 도취된 파가니니는 방탕과 도박에 빠져들었으며 결국 건강을 해치고 거액의 빚을 지게 되었다. 이 때문에 자신이 아끼던 명품 바이올린 과르네리(Guarneri)까지 팔아야 했다.  

파가니니가 처음 직장을 가진 이탈리아 토스카나주의 루카.
파가니니가 처음 직장을 가진 이탈리아 토스카나주의 루카.

이후 1801년부터 1804년까지 한 귀부인과 토스카나에 있는 그녀의 성에서 동거를 했는데, 이 기간 동안 연주회도 열지 않고 사람들과 만나지도 않았기 때문에 애인 살해죄로 투옥되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 기간에 건강을 회복하면서 하모닉스나 중음주법, 스타카토 등의 새로운 바이올린 주법을 연구하고 있었다. 건강이 회복된 그는 다시 고향 제노바로 되돌아갔다.

이듬해인 1805년 그는 다시 루카로부터 부름을 받는다. 프랑스의 속령이 된 루카의 바치오키 (Felice Baciocchi) 공작은 나폴레옹의 여동생 엘리사와 결혼했는데, 그가 파가니니를 바이올린 교사 겸 궁정가극장의 제2수석 바이올리니스트로 초빙한 것. 엘리사의 영지는 2년후 피렌체까지 커졌고 활동반경도 넓어졌으나 1809년 파가니니는 루카의 직을 사임하고 다시 정처 없는 프리랜서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진정한 명성은 1813년 10월 밀라노의 스칼라 극장(Teatro alla Scala)에서의 독주회 성공으로 불붙기 시작했다. 이 공연 이후 그의 활동영역은 전 유럽으로 넓어졌다.

질풍노도 속에 성장한 청년 베를리오즈

베를리오즈의 어린 시절 초상화.
베를리오즈의 어린 시절 초상화.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는 고전음악이 절정을 넘어 낭만주의의 여명이 으스름하게 비치는 시기 파가니니보다 19년 뒤에 프랑스 제2의 문화도시인 리옹 근교의 마을(La Côte-Saint-André)에서 의사인 아버지 루이와 어머니 마리-앙투아네트 조세핀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6자녀중 여동생 낭시(Nanci)와 아델레(Adèle)만 살아서 성장했다. 부친은 유럽에서 최초로 침술을 도입해 책을 쓸 정도로 진보적 지식인이었으며 마을의 유지였다. 10살때까지 부친의 홈스쿨링 아래 배우던 엑토르는 이후 학교에 진학해 철학, 수사학, 해부학에 관심을 보였다.

음악이 교양이었던 시기에 의사 집안이라면 귀족은 아니어도 가난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음악을 배우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소년 엑토르는 플루트와 기타만 조금 배우고, 피아노는 웬일인지 배우지 않았다. 그가 작곡가로서는 아주 특이하게도 피아노곡과 피아노를 포함한 실내악곡을 단 한곡도 쓰지 않은 것은 피아노라는 음악의 가장 기본적인 악기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는 후일에 “피아노를 배우지 않은 것은 건반음악의 관행이라는 폭군으로부터 나를 구해낸 것”이라고 평가했다. 

12살에 엑토르는 첫사랑을 경험한다. 상대는 옆집에 사는 6살 연상의 소녀 에스텔 드뵈프(Estelle Dubœuf)였는데, 이 첫사랑의 강렬한 감정은 그의 일생을 지배한다. 그는 이 어찌해볼 수 없는 열정을 작곡에 쏟아부었다. 라모(Rameau)의 화성학 책을 보며 독학한 후 몇 개의 실내악곡을 썼다. 그는 후에 이 곡들이 부끄러웠는지 악보를 모두 없애버렸다.

1821년 그는 그르노블(Grenoble) 대학의 바칼로레아 시험에 합격해 대학 진학을 위해 파리로 갔다. 당시의 모든 아버지들이 그러했듯, 돈벌이도 시원치 않고 사회적 지위도 형편없는 음악가의 삶 대신 의사가 되기를 강요받았고, 엑토르는 일단 파리 대학의 의대에 진학했다. 그러나 그에게 원치 않았던 의대는 지옥과도 같았다. 오늘날에도 의대에 진학한 젊은이들이 해부학 교실에서 파라핀 용액 속에 떠다니는 사람의 눈알을 보고 기절한다거나 구토를 하는 일이 허다한 상황인데, 당시의 의학학교 환경이라는 것은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피가 흥건하고 시체 썩는 냄새가 풀풀 풍기는 실습실의 열악한 환경에 질려버린 소년 엑토르는 마침내 히포크라테스의 길을 포기했다.

베를리오즈 당시의 의대 해부학 수업을 그린 그림.
베를리오즈 당시의 의대 해부학 수업을 그린 그림.

멀리 있는 아버지는 그것을 모른 채 학비와 생활비를 보냈는데, 이 못 말리는 감성을 가진 소년은 약간의 음악 공부에 더불어 파리에 2개 있던 오페라극장을 다니며 그 돈을 써버린다. 당시 오페라 극장은 오페라와 발레만 하는 것이 아니어서 엑토르는 거기서 다양한 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파리 도착 3주만에 접한 글룩의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아>(Iphigénie en Tauride)에 그는 전율했다. 이 작품이 그를 의학에서 음악으로 전환시킨 분수령이었다.

그는 파리음악원 도서관을 찾아 글룩의 모든 악보를 대출하고 사보하며 음악 공부에 매달렸다. 파리에 온지 1년이 조금 넘은 1822년 말, 그는 로열 채플(Royal Chapel)의 음악감독이자 파리음악원 교수인 르쉬르(Jean-François Le Sueur)를 사사하며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하게 된다.

파리음악원의 현재 모습.
파리음악원의 현재 모습.

이듬해 그는 신문에 투고해 로시니 오페라에 대항하여 글룩과 스폰티니(Spontini), 르쉬르의 프랑스풍 오페라를 옹호하는 글을 썼다. 당시 그는 이미 <에스텔과 네모랭>(Estelle et Némorin), <홍해 도하>(Le Passage de la mer Rouge) 등 수곡을 작곡해둔 상태였으나 악보는 오늘날 전해지지 않는다.

1824년 엑토르는 파리대학 의대를 명목상 졸업하긴 했지만, 이미 의사의 길은 포기했다. 뒤늦게 이를 알게 된 부친은 머리 끝까지 화가 났지만, 분노를 참으며 의학이 싫으면 법학이라도 해보라고 권했다. 아들이 말을 안 듣는 것을 확인한 그는 유일한 아들에게 모든 지원을 끊어버렸다. 이후 엑토르는 자기 고집대로 파리음악원에 들어갔고, 몇 년간 경제적 어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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