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심의 민란(民亂)과 정조, 정약용의 포용

왜 항거의 역사인가

첫편을 어떤 주제로 쓸까 고민하다가 “김준혁이 전해주는 항거의 역사”로 하기로 했다. 불우한 시대에 가난한 이들의 항거는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항거가 없으면 미래는 없다. 지금의 항거는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니다. 바로 역사속에 민초들의 수많은 항거가 있었기 때문이다. 

항거는 군주에 대한 항거일 수도 있고, 관료에 대한 항거일 수도 있다. 힘없는 여인의 남자에 대한 항거일 수도 있고, 노비가 주인에 대한 항거일 수도 있다. 단재 신채호 선생님이 그리 이야기 하지 않았나? “역사는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다” 라고.

나는 이 말씀이 바로 정의(正義)가 불의(不義)에 대한 항거, 진보가 수구에 대한 항거, 약자가 강자에 대한 항거라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이 글을 이어갈지 모르겠지만, 매주 한국 사회의 비극적 현실을 역사와 연결하여 항거의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그 첫편이 바로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생각하며, 이들과 전혀 소통하지 않고 일방의 이야기만 하며 탄압하려는 윤석열 대통령, 원희룡 장관과 대비되는 정조와 정약용의 민란(民亂) 대응을 이야기하려고 한다.

정약용 초상화.
정약용 초상화.

정약용 곡산부사로 임명되다

1797년(정조 21) 6월 정조는 천주교 문제로 동부승지를 사직한 정약용을 황해도 곡산부사로 임용했다. 황해도 곡산은 평안도와 함경도 경계에 있는 지역이다. 황해도는 연백평야 등 평지에 농토가 많아 물산이 풍부한 땅이지만 곡산만큼은 산악지대여서 농토가 부족하고 살기가 여간 어려운 지역이 아니었다. 18세기 말 곡산은 12개면 72리로 이루어졌으며, 호구 수는 3,733호 2만6,837구였다. 지력이 척박한 곳이어서 논은 30여결(1결은 약1ha)에 지나지 않고 밭은 3,000결 정도였던 반면 산지가 많은 탓에 화전은 약 211결(5,272일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곡산이 도호부라는 비교적 높은 위상을 지닌 것은 바로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왕비인 신덕왕후 강씨가 바로 이곳 곡산 출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백성들이 살아가기엔 그리 좋은 곳이 아니었다.

정조가 정약용을 굳이 이곳으로 보낸 이유는 바로 민란(民亂)을 정리하라는 뜻이었다. 정조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개혁군주이자 위민군주인데, 이런 임금이 다스릴 때 어찌 민란이 일어날까 하는 생각이 들수 있다. 그러나 정조가 아무리 백성을 사랑하고 시대의 발전을 위해 노력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탐욕스러운 관리가 없을 수는 없다. 정조시대에도 여러 차례의 민란이 일어났다.

이계심 민란을 일으키다

정약용이 임용되기 전 수령이었던 이지영은 엄청난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조선시대 군역의 의무를 이수하기 위해선 1년에 군포 1필을 관아에 납부해야 했다. 군포 1필의 가격이 오랫동안 200전이었는데, 이지영 곡산부사는 백성들에게 900전을 징수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200전의 무려 4.5배가 되는 900전을 납부하라고 하니, 힘없는 백성들이라고 이를 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곡산 도호부의 백성중에서 가장 바른말 잘하는 이가 바로 ‘이계심’이란 농민이었다. 분노에 찬 백성들은 이계심을 중심으로 모였다. 1,000 여명의 백성들이 이계심과 함께 관아로 가서 수령에게 잘못된 세금 부과를 항의했다. 하지만 이지영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백성들이 수령을 겁박한다고 아전들과 관아의 포졸을 동원하여 이들을 구타하고 감옥에 넣으려고 했다. 분노한 백성들은 벌떼처럼 이계심을 옹위하고 관아의 계단을 밟고 올라가며 함성을 질렀다. 다산의 글에는 그 소리가 하늘을 진동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계심과 농민들은 관아를 부순 후 산으로 숨어 들어갔다. 조선시대 백성들이 군역의 세금 문제로 민란을 일으켜 정3품 고위직인 수령과 크게 다투는 사례는 거의 없는 일이었다.

이계심이 일으킨 곡산의 민란은 조정에서 큰 사건이 됐으나, 진실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이지영의 거짓 해명이 진실처럼 알려지게 되었다. 조정에서는 이계심을 체포하기 위하여 황해도 지역의 오군영(五軍營) 군사들을 동원하였다. 조선시대 고을의 민란을 제압하기 위해 군사들이 동원되는 일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황해도 지역에서 한 인물을 체포하기 위하여 군사들이 동원된 것은 명종대 임꺽정 체포와 숙종대 장길산 체포 정도였다. 임꺽정과 장길산! 역사에 이름이 나 있는 인물과 이계심은 동격이 된 것이다. 그러나 곡산부 백성들이 그를 얼마나 꽁꽁 숨겨주었는지, 도저히 체포할 수 없었다. 정약용이 곡산의 수령으로 가게 된 건 이 때다. 

정약용이 조정에서 임명장을 받고 출발하기 전에 그의 스승격인 남인의 영수 채제공도 이계심을 체포하여 역모죄로 처리하라고 하였고, 정약용의 지인인 김이소도 이계심은 대역부도의 죄인이라고 하였다. 진실이 알려지지 않았기에 백성을 위하여 항거한 이계심은 어느 순간 조선 최고의 대역죄인이 된 것이다.

정조 군복 어진.
정조 군복 어진.

정약용과 정조의 판결

정약용이 곡산부 경계로 들어서자 이미 역모꾼으로 인정되고 있는 농민들과 함께 이계심이 나타났다. 그는 수령들과 아전들이 백성들을 괴롭히는 내용을 적은 ‘민막(民瘼) 10조’를 들고 있었다. 정약용을 호위하던 군사들은 이계심을 체포하려했지만, 정약용은 이계심과 대화를 위하여 그를 체포하지 않은 상태로 관아로 데려갔다. 그리고는 이계심의 이야기를 들었다. 이계심의 행동은 올바른 것이었다. 그는 역적이 아니었다. 

정약용은 이계심과의 대화를 마치고 이렇게 이야기 했다. “관리가 밝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백성이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폐단이 있어도 관아에 대들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에서 천금(千金)으로 사들여야 할 것이다”

정약용은 조금 전까지 대역죄인으로 몰려있던 이계심을 무죄로 판결하고 그를 석방했다. 그리고 그는 국왕 정조에게 이계심의 민란을 해결하였다는 장계를 올렸다. 그 장계에 이계심은 의로운 백성이고, 이 사람을 곡산도호부의 아전으로 임명하여 백성을 위하여 일을 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정약용의 장계를 본 조정의 고위 관료들은 잘못된 판결을 한 정약용을 파면하고, 이계심을 잡아와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열을 올렸다. 그러나 정조는 정약용의 의견을 존중했다. 백성들이 자신들의 억울한 일을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인정하고, 정약용에게 이계심을 곡산부 아전으로 임명하라고 하였다. 정의로운 이계심이 곡산부 아전으로 임용되어 백성들에게 공평한 세금 부과를 실천하였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백성들이 관료들의 탐학에 대항해서 항거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봉건시대 백성들은 어려운 처지에 있어도 국가를 상대로 항거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항거하지 않으면 탐관오리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생각하지 않은 채 계속 백성들을 수탈하려고 한다. 이것을 막는 것은 영명한 군주나 올바른 관리들도 있겠지만, 결국 백성들 스스로가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이계심과 곡산부 백성들은 용기있게 수령과 아전들에 항거를 하였고, 비록 역적으로 몰렸지만 현명한 정약용과, 백성들의 권익을 옹호하려는 국왕 정조에 의해 사면을 받고 더 나아지는 삶을 살아가게 된 것이다. 항거하면 무조건 죽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백성들의 나라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화물연대 파업과 서울지하철노조 파업, 코레일의 파업에 대하여 윤석열 대통령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정조나 정약용과 같은 소통과 대화를 하고, 그리고 더 나은 삶을 위한 대안을 마련할 순 없을까. 언감생심 거기까지는 못미치더라도 최소한 항거하는 국민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이들을 국가 경제를 망치는 죄인 취급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소통하지 않고 그들을 죄인으로만 취급할수록 자신들이 역사에 죄를 지을 수 있다는 점도 깨달았으면 한다. 

10.29 참사가 일어난 지 한달이 지났는데, '책임 지고 자리에서 물러나는 고위 관료가 단 한명도 없느냐'고 국민들이 묻지만 들은체 만체다. 평범한 사람들이 원하는 지도자는 바로 소통의 리더십을 가진 사람이다. 소통을 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자신의 말만 들으라는 일방통행식 권력을 지금의 대중은 원하지 않는다.

김준혁은 역사학자다. 정조(正祖)가 건설한 세계문화유산 수원 화성의 경제적 기반인 대유평(大有坪)에서 초중고교를 다녔다. 이런 인연으로 ‘정조’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2003년 수원시 학예연구사로 화성의 복원 등에 참여하였고, 수원화성박물관 학예팀장을 지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 한신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정조, 새로운 조선을 디자인하다>, <이산 정조 꿈의 도시 화성을 세우다>, <리더라면 정조처럼> 등 정조 관련 다수의 저서가 있다. 오랫동안 수원에서 시민운동을 하였고, 촛불 시민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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