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너미 시리즈4- '흙수저 슈베르트 & 금수저 멘델스존' (4)

예술을 논하는 사람들 사이에선 '시대정신의 변화가 예술에 반영되는 것인가, 아니면 앞서가는 예술이 시대정신을 이끄는 것인가'가 오랜 논쟁거리였다. 여기서 파생된 논쟁이 '그 예술에 대한 평가는 당대에 나타나는 것인가, 아니면 후대에 진가를 알아보는 것인가'라는 문제다.  

피터 섀퍼의 연극에 기초해 만들어진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정신병원의 살리에리는 자신을 찾아온 신부에게 한참때 썼던, 빈 어디서나 울려퍼지던 멜로디를 들려준다. 그러나 신부는 알지 못했다. 살리에리가 그 시절에는 별로였던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직'을 들려주자 젊은 신부는 바로 멜로디를 따라서 불렀다. 이 장면이 후대에 인정받고 오래 살아남아 생명력을 유지하는 클래식 음악의 평가를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가.

1960년대 당시 비틀즈(Beatles)의 음악은 리버풀 뒷골목 술집에서 연주하는 새파란 보이 밴드의 록(rock) 음악이었다. 그들은 영국에서 자신들이 인정받지 못하자 독일의 함부르크로 넘어갔다가 성장하고 돌아왔고, 드디어 밴드 창설 5년만에 EMI에서 첫 음반을 발매했다.

이후 비틀즈는 전세계 젊은이들의 영혼을 훔쳤다. 21세기 들어 세상의 거의 모든 교향악단들이 비틀즈 음악의 관현악 편곡을 콘서트홀에서 스스럼 없이 연주하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는 비틀즈 음악이 클래식이 못 된다고 폄하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가 없던 시절, 오페라는 가장 대중적인 종합예술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지금도 오페라극장에서 가수가 노래를 잘 못하면 객석에서 야유를 보내거나 청중들이 대신 노래를 불러버리는 기막힌 일이 발생한다. 이탈리아 오페라의 스토리는 21세기 대한민국의 기준에서 보아도 막장 드라마로 볼 만한 이야기들이 난무한다.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음악은 계몽주의라는 시대정신, 그리고 왕정시대 사회의 규범이 허물어지고 자본주의의 새로운 규범과 충돌하던 아노미(Anomie)의 전환기를 반영하고 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은 귀족사회의 쇠락을 풍자적으로 그렸고, <마술피리>는 프리메이슨이 추구하는 가치를 설파한 것으로 평가된다.

베토벤은 교향곡 제3번 “영웅”으로 공화정을 부정한 나폴레옹을 비판했고, 교향곡 제9번 “합창”으로 인류애를 주장했다. 베를리오즈는 창작의 의도가 달랐다 할지라도 규범적인 작곡법의 틀을 벗어나 인간의 감정을 최대한으로 표현해내는 “환상교향곡”을 만들었다. 이성과 규범보다 더 강렬한 감정과 모험, 환상의 세계를 열어젖힌 것이다. 

​​​​​​​친구 슈빈트가 그린 슈베르트의 마지막 초상화
친구 슈빈트가 그린 슈베르트의 마지막 초상화

슈베르트는 베토벤이 살짝 열어놓은 낭만주의의 문 안으로 첫발을 내딛은 낭만주의의 첫 작곡가라고 할 만 하다. 멘델스존은 바로크와 고전의 토양 위에서 낭만주의 음악이 꽃피울 토대를 마련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들이 음악계에서 활동하는 사이 문학계에서는 괴테를 필두로 빅토르 위고와 뒤마, 워즈워스, 바이런, 하이네가 나타났고, 미술계에서는 인물화와 역사화의 시대가 저물고 풍경화의 시대가 도래했다. 낭만주의 초기에 그들은 모두 귀족과 부르주아들의 살롱에서 서로 만나 교류하며, 저마다의 분야에서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갔다.   

슈만과 멘델스존이 재평가를 이끌어낸 슈베르트

1823년 로시니가 런던에서 명성과 부를 누리고 있을 때, 슈베르트는 뮐러의 시를 읽고 감명을 받아 연가곡집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를 작곡하는 등 창작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매일 밤 침대에서 잠들 때마다 다음날에 눈을 뜰 수 없다면 좋겠다"고 직접 적었을 만큼 슈베르트의 생활은 쪼들렸다. 

그와 친구였고 같이 가난한 시절을 겪었다가 나중에 화가 및 조각가로서 꽤 성공한 모리츠 폰 슈빈트(Moritz von Schwint, 1804~1871)가 남긴 회고록에 그 때 찢어지게 가난했던 이야기가 나와있다. 하루는 돈을 어느 정도 벌게 된 다른 친구가 슈베르트와 슈빈트의 사정을 알았기에, 그들에게 모처럼 밥 좀 산다고 했다. 슈베르트는 그 자리에서 10분도 안 가서 큼직한 빵을 6개나 단번에 먹어버리고 차도 여러 잔을 얼른 비워버렸다. 그리고 좀 늦게 자리에 나타난 슈빈트도 그 이야기를 듣더니, 자신도 똑같이 그렇게 먹어치웠다. 다른 이들이 이 둘을 보고 놀라며 "그리도 배가 고팠나?"고 하자 두 사람은 "이틀 동안 물 빼고 아무 것도 못 먹었다네"라며 쓴웃음을 지었다고 한다. 슈빈트는 이 글을 쓰면서 자신은 그래도 나중에 꽤 성공해서 이제 굶주리는 일은 없지만, 그렇게 배고픈 상태로 죽어간 슈베르트를 너무나도 안타까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가난의 고통을 늘 체험했던 슈베르트는 돈을 벌어도 다른 가난한 예술가 후배나 친구들에게 아낌없이 식사를 같이 나누기도 하고 생활비를 도왔다고 한다. 슈베르티아데의 멤버이자, 슈베르티아데의 공간을 자주 빌려주던 존라이트너 백작이 가곡 <마왕> 악보 판권을 몰래 사주며 당시로서는 공무원의 거의 10년치 연봉에 해당되는 제법 큰 돈을 주었다고 슈베르트 연구자들은 밝히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가난한 상황의 이야기가 많은 것을 보면, 그의 가난하고 인정받지 못한 음악가 이미지를 위해 친구들이 왜곡한 게 아닌지 하는 의심 역시 아직 남아있다. 

1827년, 슈베르트는 경제적 어려움과 인정받지 못하는 불우함 가운데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 뮐러의 시에 의한 연가곡집 <겨울 나그네>를 작곡했다. 그해 그렇게도 존경하던 베토벤을 만날 기회를 가지게 된다. 베토벤이 사망하기 겨우 1주일 전이었다.

사실 슈베르트는 베토벤과 2km도 안되는 거리에 살고 있었지만 소심한 성격 때문에 이 대작곡가를 만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슈베르티아데의 멤버이자 친구이며 베토벤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휘텐브렌너의 주선으로 죽기 직전에야 어렵게 만나게 된 것이었다. 베토벤은 슈베르트가 건네준 악보 몇 장을 훑어보고 크게 감탄했다. 

"슈베르트 자네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 것을......자네는 분명 세상을 빛낼 훌륭한 음악가가 될 것이네. 부디 용기를 잃지 말게."

청각을 잃어 필담으로 대화하던 베토벤이 슈베르트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글로 적으라고 했는데,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쇠약해진 모습을 보고 괴로운 나머지 방을 뛰쳐 나가서 눈물을 흘렸다. 그 바람에 슈베르트는 존경하는 베토벤과 대화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1827년 3월 26일 베토벤은 친구들 및 지인, 휘텐브렌너를 포함한 제자와 비서 앞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베토벤 사후 슈베르트는 상심한 나머지 며칠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했다.

다행히 베토벤 사후, 집안의 형제들과 슈베르트 주변 친구들의 설득으로 아버지와의 관계도 개선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피아노를 장만할 수 있었다. 그 이전에 작곡할 때는 대개 기타로 멜로디와 화음을 쳐보면서 작업을 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음악성이다.

그러나 아버지와의 화해도 잠시. 슈베르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에 걸렸고 형과 함께 시골로 내려가 요양하며 치료를 하게 된다. 1828년 3월 자작 연주회를 열어 성공을 거둔 뒤 교향곡 9번 “그레이트”를 완성하였으며, 그가 죽은 뒤 출판된 유작집 <백조의 노래>에 수록된 가곡의 대부분이 그 해 8월에 완성되었다.

빈시립 중앙묘지의 음악가 묘역. 가운데가 베토벤 그 오른쪽이 슈베르트.
빈시립 중앙묘지의 음악가 묘역. 가운데가 베토벤 그 오른쪽이 슈베르트.

그의 병명은 티푸스, 매독 등 설들이 다양한데 확실히 밝혀진 건 아직 없다. 1828년 11월 19일 혼수상태에 빠진 슈베르트는 공무원이던 둘째 형 페르디난트의 집에서 31살이라는 한창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혼수상태에서 "묻혀지기... 싫어... 홀로 있는 건 싫어......" 라고 중얼거리자, 페르디난트가 “프란츠, 모두 걱정하여 모였으니 이젠 염려 마”고 대답했는데, 갑자기 한숨을 내쉬며 “하지만, 여긴 베토벤이 없어!” 라고 말한 후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슈베르트의 바람대로 친구들은 그가 그토록 존경하던 베토벤이 묻힌 빈 벨링크 공동묘지 중에서도 베토벤 바로 오른쪽 자리에 안장했다. 웬 ‘듣보잡’을 감히 베토벤 곁에 묻느냐며 반대도 있었다. 그러나 후원자이던 존라이트너 백작이 “20년 아니,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베토벤 못지않게 유명한 음악가가 되었을 위대한 음악가”라고 적극 옹호하고, “베토벤 씨도 잠깐 만났음에도 그를 인정했던 만큼, 곁에 묻히면 베토벤 씨도 무척 기뻐할 것”이라고 주장하고서야 묻힐 수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슈베르트가 유명 작곡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된 것은 작곡가이자 평론가였던 로베르트 슈만의 공이 크다. 슈베르트 사후 슈만은 우연히 슈베르트의 가곡 악보들을 보고 크게 놀라서 슈베르트의 작품들을 수집하고 자신이 발행하던 ‘신음악시보’를 통해 널리 알렸다. 스스로도 가곡을 사랑하고 많은 걸작을 남긴 슈만의 공에 의해 슈베르트는 가곡뿐 아니라 뛰어난 음악가로서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멘델스존이 키워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오늘날 모습.
멘델스존이 키워낸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의 오늘날 모습.

라이프치히에서 슈만을 적극적으로 밀어주던 멘델스존 역시 슈만이 높게 평가한 슈베르트의 소규모 곡들을 자신의 살롱음악회에서 자주 연주했다. 슈베르트의 풍부한 멜로디에 반한 멘델스존은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를 통해 슈베르트의 교향곡들을 연주했다. 슈베르트 사망 후 10년이 겨우 지난 시점인 1839년 3월, 멘델스존은 슈베르트의 제9번 교향곡을 초연해 성공을 거두었다. 슈만의 평론과 멘델스존의 연주에 의해 슈베르트는 사망 후 얼마 안되어 재발견이 이루어진 행운을 누렸다.

그는 짧은 생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작곡을 해서 자신보다 5년 더 살았던 모차르트의 1.8배에 이르는 목록을 남겼다. 미발표 작품이나 미완성 작품까지 하면 무려 1,500곡에 이르는 방대한 악보를 남겼다.  

작곡 만큼이나 컸던 다방면의 공헌자 멘델스존

멘델스존의 누나 파니의 초상화.
멘델스존의 누나 파니의 초상화.

멘델스존의 4살 위 누나인 파니 멘델스존(Fanny Mendelssohn 1805~1847)은 언제나 펠릭스가 보호자처럼 늘 기대고 상의할 수 있는 존재였다. 여자라는 이유로 홀대받았지만 파니도 동생과 비슷한 음악 교육을 받았고 재능 있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다. 13살 시절 파니는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을 안보고 연주할 수 있을 정도의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가 15살이 되자 아버지 아브라함은 딸 파니의 작품을 출판하는 것과 공개 연주를 금지시켰다. 여자가 남자인 동생의 앞날에 걸림돌이 되면 안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파니가 만든 6개의 가곡집은 동생 펠릭스 멘델스존의 이름으로 출판됐다. 훗날 펠릭스는 "내 누이가 나보다 뛰어난 작곡가였다" 라고 말했다. 

상심한 파니는 자신의 작품을 이해해 주는 화가인 빌헬름 헨젤과 결혼해 분가해 나갔다. 빅토리아 여왕 앞에서의 연주로 인정받은 그녀는 40세 때는 작품집을 출간하려고 계획했으나, 동생 펠릭스는 여성이 홀대받던 사회에서 누나가 손가락질을 받고 상처를 입을까봐 반대했다.

자신의 집 살롱음악회에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자신의 곡을 연주하면서 자신감을 얻은 그녀는 출판 전인 2년후에 일요일의 살롱음악회를 준비하다 가문의 유전병인 뇌졸중으로 갑자기 생을 마감했다. 파니 멘델스존의 유명한 곡으로는 <12개의 가곡집>에 포함된 '이탈리아' 가곡이 있는데, 동생 펠릭스의 '이탈리아' 교향곡과 헷갈리면 안 된다. 그녀의 초기 곡들 중 일부는 오빠 이름으로 출판되었고, 그녀의 부활절 소나타는 1970년대에 분실되어 재발견된 후 한동안 오빠의 것으로 잘못 여겨졌다가 1990년대 연구자들에 의해 다시 발굴되어 재평가를 받았다.

멘델스존의 마지막 초상화.
멘델스존의 마지막 초상화.

펠릭스 멘델스존은 부자이면서도 신실한 기독교인의 이미지가 씌워져 있고, 그의 대표작들이 경건하거나 밝고 따스한 이미지가 많아 인격도 그럴 것이라는 선입견을 가진 경우가 많다. 파니의 아들인 세바스티안 헨젤(Sebastian Hensel)이 삼촌의 사후 발표한 가족 회고록에서 그를 종종 평온하고, 행복하고, 침착한 기질로 묘사한 덕분이기도 하다.

음악사학자 R. 래리 토드(R. Larry Todd)는 멘델스존의 성격이 그에게 우호적이던 작곡가 서클의 회고록에 의해 "과도한 미화“를 겪었다고 주장했다. 자신의 냉담함 때문에 '불만족한 폴란드 백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는 사실을 멘델스존 자신이 편지에서 그 별명을 언급한 적이 있다.

바그너를 비롯한 일단의 음악가들은 멘델스존을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일례로 '음악이 지나치게 분위기가 밝기만 하고 깊이가 없다', '평범한 음악가들의 생계 문제에 신경 쓰지도 않는 거만한 도련님'이라는 독설을 날렸다.

그러나 멘델스존은 가난한 연주자들의 복지 문제에 상당한 관심이 있었고, 이것을 개선하려고 꽤 노력을 기울였다. 바흐 르네상스는 이미 알려질 만큼 알려졌고, 슈만과 슈베르트 등 저평가 또는 잊혀진 음악가들을 발굴하여 연주하고, 재평가를 받게 하는 등의 활동을 하는데 열정을 기울였다. 그러니, 멘델스존의 입장에선 바그너파의 주장은 억울한 면이 많겠다.  

선한 부자 이미지와는 상반되게 그는 자주 발끈해서 때때로 쓰러졌다. 드브리앙(Devrient)은 1830년대에 그를 만났을 때의 기억을 되살리며 "그의 흥분은 너무 무서워서..."라고 말했다. ”가족이 모였을 때...그는 앞뒤가 맞지 않는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엄한 목소리가 마침내 거친 말들을 막았고, 그들은 그를 침대로 데려갔고, 12시간의 깊은 수면이 그를 정상 상태로 되돌려 놓았다."

멘델스존 연구자들은 가문의 유전병처럼 여겨지던 뇌졸중과 관련이 있으며, 이 발작은 그의 이른 사망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멘델스존은 음악뿐 아니라 미술에서도 재능을 보였다. 연필과 수채화에서 제법 수준에 오른 작품들을 남겼는데, 여행을 할 때마다 화구를 챙겼을 정도였다. 그의 편지들은 때때로 유머러스한 스케치와 만화를 포함했다. 그림을 그리는 것은 그의 감정을 다스리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멘델스존이 직접 그린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교회 수채화.
멘델스존이 직접 그린 라이프치히 성 토마스교회 수채화.

재능과 재산 둘 다 성공한 표상으로서 작곡과 연주, 교육과 연구, 여행과 그림, 게다가 사업과 자선활동까지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 만큼 폭 넓은 삶에다 갈수록 불러대는 곳이 많다보니, 그는 엄청난 업무량에 시달렸다. 교통수단이 안락하지 못했던 시기의 잦은 여행과 과로는 결국 그의 건강을 해쳤다. 그는 괴로워하는 중에도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 와중에 누나 파니의 급작스러운 사망 소식은 멘델스존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그후 그 애통을 못 이기고 6개월이 채 안 되어 멘델스존 역시 뇌졸중으로 숨을 거두고 만다. 

유태인이지만 기독교로 개종하고 부유층으로 기득권에 들어갔기에 살아서도, 죽어서도 독일에서 위대한 음악가로 기려졌다. 본인도 독일인으로 자부했기에 그는 독일 음악가로 분류된다. 아버지 아브라함부터도 독일인이라고 자부하고 살았던 만큼, 그는 자녀들에게 조국은 독일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다보니 확실한 유태인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이스라엘에서는 그를 자국 음악가이라고 주장하지 못하고 있다.

카프카나 말러같이 국적에 대하여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유태인들을 이스라엘이 자국의 자랑이라고 홍보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낭만주의 음악의 초기에 멘델스존이 없었다면, 그 이후 '낭만 음악의 스펙트럼이 그만큼 넓어질 수 있었을까'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야말로 낭만주의 음악의 든든한 토양을 다진 공헌자라고 평가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슈베르트는 31살, 멘델스존은 38살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만일 그들이 더 오래 살았다면 초기 낭만주의의 음악은 훨씬 더 풍부해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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