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너미 시리즈4- '흙수저 슈베르트 & 금수저 멘델스존' (1)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의 공화국 시대에 꽃피웠던 직접 민주주의는 얼마 가지 못해 시들었다.

그리스에서는 참주가 나타나 독재정치를 했고,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4개의 계급을 논하며 이상과 통치이념을 가진 철학자가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로마에서는 정복이 계속되며 속지가 넓어지자 군사력을 손에 쥔 시저가 포함된 과두정치로 넘어가고 결국 아우구스투스 때 제국으로 변모했다.

물론 그리스와 로마가 공화정일 때도 시민권자와 노예의 구분은 명확했다. 고대 공화정들이 무너진 후 세계는 확실한 신분제 사회가 되었다. 동방의 중국에서부터 서방의 영국까지 계급은 이동이 불가능한 제도였고, 그러한 사회는 안정적이었다.

계급권력의 최초 균열은 1215년 영국에서 귀족계급이 구성한 의회가 국왕의 독단적 세금 부과를 막으려는 데서 나온 마그나 카르타(Magna Carta)였다. 국왕의 권력이 국민의 대표인 의회를 넘볼 수 없도록 못박은 것은 이후 463년이 지난 1688년 명예혁명에 이르러서야 가능했다. 대표적인 제국 러시아에서 농노해방령이 공포된 것은 1861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에 의해서였다.

오늘날 인권의 척도인 노예의 폐지는 1794년 프랑스 대혁명 와중에 국민공회가 프랑스와 모든 식민지에서의 노예 폐지를 선언한 것이 최초다. 1804년 카리브해에 위치한 아이티가 독립하면서 노예 없는 두 번째 나라가 되었다. 노예무역으로 번성했던 영국은 1807년 노예무역 폐지에 이어 1833년 노예제도 자체를 폐지했다. 이를 따라 1840~50년대 유럽국가들은 거의 노예제를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미국은 남북전쟁을 치르고 나서야 1865년에 노에제를 완전히 폐지할 수 있었으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은 계속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894년 갑오개혁 때에 비로소 노비해방이 이루어졌다.

사회가 실질적으로 민주적인가 아닌가는 2차 대전 이후 차별 없는 교육과 민의의 반영, 계층이동의 기회 여부를 기준으로 삼는다. 고정된 사회는 일견 안정적이지만 하부 계층의 불만이 쌓여 오히려 전체적으로 불안해진다는 것이 정치학과 사회학에서는 당연한 이야기가 되었다. 계층이동이 가능한 유동적 사회는 오히려 사회 불안 요소가 줄어 지속가능한 것이라는 역설이 나온다.

2010년대 대한민국은 난데없는 수저론으로 들끓었다. 강남의 부자들이 자식들에게 어린 시절부터 사교육을 쏟아붇고 부동산과 주식을 물려주어 부와 권력이 대물림되는 불평등과 불공정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런 계층의 자식들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다’고 표현하자,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한 청년들이 은수저, 나무수저, 흙수저를 논하며 자신의 환경을 한숨과 좌절의 배경으로 삼았다. 아무리 노력해봐도 장벽에 막혀 계층이동이 불가능한 이 나라를 ‘헬조선’이라 불렀다.

클래식음악계에도 금수저 흙수저는 있다. 특히 아직 신분제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졌던 시기 귀족들과 신흥 부르주아들이 금수저를 독점하던 시기에 활동하던 낭만시대 초기에는 더욱 그러했다. 금수저의 대표 격이었던 멘델스존과 흙수저의 대표 격이었던 슈베르트는 20년 선후배로 많은 걸작들을 인류에게 선물해 주었지만 그들의 삶은 확실히 달랐다.       

슈베르트의 10대 시절 초상화.
슈베르트의 10대 시절 초상화.

흙수저 소년 슈베르트의 음악수업

성악의 시대였던 르네상스 음악을 지나 기악 독립의 거센 물결이 넘치던 바로크 시대 성악은 모노디라는 형식을 개척하며 생명력을 유지했다. 모노디(monody)란 화음 반주를 가진 단일 멜로디의 성악양식이다. 오늘날까지 가장 성공적인 음악양식 중 하나인 오페라는 모노디로부터 기원했다. 오페라와 미사, 칸타타가 바로크와 고전 시대의 대표적 성악장르로 자리잡고 있을 때, 모노디는 발상지인 이탈리아에서 숨을 죽인 채 조용히 진화하고 있었다. 

17세기부터 이탈리아에서 모노디와 아리아의 전통을 따라 소박한 형식의 고전 가곡(Arie Antiche)들이 만들어졌다. 이들은 서정적인 가사와 우아한 멜로디로 꾸준한 생명력을 보였다. 지금 우리나라의 인기 TV쇼 <팬텀 싱어>에서 경선곡으로 가장 사랑받는 이탈리아 칸초네들은 모노디와 고전가곡들로부터 내려오는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장기간 유럽에서 음악의 종주국은 이탈리아로 여겨졌던지라 19세기 말까지도 학자뿐 아니라 음악가들도 이탈리아 음악을 배웠다. 유학을 다녀오거나 이탈리아 출신 음악가들에게 작곡법과 스타일을 배우곤 했는데, 이들을 통해 가곡도 전해졌을 것이다. 이탈리아 바깥의 가곡은 그렇게 오페라와 소나타로 가득했던 예술음악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다. 모차르트도 베토벤도 가곡들을 썼지만 가곡이 예술음악으로 대접받는 건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 단편적이고 작곡하기가 쉬워 그다지 진지한 장르로는 꼽히지 않던 가곡을 일약 아름다운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작곡가가 바로 가곡의 왕으로 불리는 프란츠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31.~1828.11.19.)였다. 베토벤이 음악과 문학의 결합을 시도한 것이 1824년작 교향곡 제9번이었다. 슈베르트의 가곡은 베토벤보다 이른 시기에 19세기 낭만시대에 나타난 지극히 개인적 감정이 담긴 낭만주의 서정시(괴테, 하이네, 뮐러 등)와 결합했다. Lied는 독일어로 단순히 '노래'라는 뜻이지만 타 언어에서 가곡이라는 장르를 가리킬 때 흔히 '리트'라고도 한다.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는 빈 교외인 리히텐탈(Lichtental)에서 초급학교 교장인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르(Franz Theodor Florian Schubert 1763–1830)아래에서 16명 자녀중 13번째로 태어났다. 원래 독일 슐레지엔 자작농 출신이었던 아버지와 요리사 출신인 어머니는 음악을 좋아했는데, 아이들 9명은 당시의 의료상황에 때문에 일찍 죽었다. 6살에 아버지가 설립하고 교장인 학교에 들어갔는데, 당시 학교는 운동장을 갖춘 현대적 학교 개념이 아니라, 다세대주택과 같은 곳에 방 두 칸이 딸린 집이자 학교였다. 프란츠는 형 이그나츠(Ignatz)에게 5살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8살에 아버지에게 바이올린을 배우는 등 일찌감치 음악적 재질을 보였다. 7살부터 지역 교회의 합창단장인 미하엘 홀처(Michael Holzer)로부터도 교습을 받았다. 또한 가족 현악 4중주에서 형 이그나츠와 페르디난트(Ferdinand)는 바이올린을, 아버지는 첼로를, 프란츠는 비올라를 맡아 연주하기도 했다. 이렇게 어려서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이 뛰어남이 드러났으나 아버지가 음악을 가르친 이유는 단순히 취미였을 뿐, 슈베르트를 음악인으로 키우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소년 프란츠는 탁월한 미성 덕분에 1804년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가 행한 순회 오디션에서 6등으로 입상하며 그의 눈에 띄었다. 살리에리의 추천에 힘입어 11살 때 슈타트콘빅트(Stadtkonvikt·궁정 신학원)에 장학생으로 입학해 오늘날의 빈소년합창단인 빈 궁정예배당 소년합창단에 뽑혔다. 누구나 부러워하던 빈의 황실 직영 엘리트 학교에서 양질의 일반교육과 체계적인 음악교육을 받는 행운을 누리게 된 것이다. 슈베르트는 여기서 자신의 음악성을 알아보고 지지해 준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또 모차르트와 하이든 형제, 베토벤의 음악을 접하게 되었는데 그는 특히 모차르트를 좋아하고 베토벤을 존경하였다. 당시 황실의 궁정 악장 살리에리는 그의 재능을 아껴 레슨비 없이 지도를 베풀어 주었을 뿐 아니라 틈틈이 약간의 경제적 도움까지 아끼지 않았다.

하이든과 슈베르트가 다녔던 빈의 궁정신학원 슈타트콘빅트.
하이든과 슈베르트가 다녔던 빈의 궁정신학원 슈타트콘빅트.

프란츠는 슈타트콘빅트 학생 오케스트라에서 현악 악장을 맡으며 독창회에 나가 아름다운 노래로 갈채를 받기도 했다. 이 기간 줌슈티크(Johann Rudolf Zumsteeg)의 가곡들을 접하고 이 곡들을 당시 기준으로 현대적으로 바꾸는데 관심을 갖는다. 이 인연으로 평생의 친구 슈파운(Joseph Freiherr von Spaun 1788~1865)을 만난다. 

그러나 13세(1810년)에 변성기가 일찍 도래하면서 특유의 미성은 사라졌고, 이에 따라 빈소년합창단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황실 기숙학교의 규칙상, 이러한 상태에서는 퇴실해야 했지만 일반 과목에서 성적이 월등히 나았기 때문에 장학금을 받아 간신히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2년 후에는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연락에 급히 집으로 뛰어간다. 하지만 어머니 엘리자베스는 이미 숨진 뒤였고, 궁정신학원에서의 평가를 들은 아버지는 그제서야 아들에게 음악가가 돼도 좋다는 허락을 해주었다. 하지만 때가 좋지 못했다. 하필이면 근년 들어 수학과 라틴어 성적도 나빠서 결국 궁정신학원 자체를 나올 수밖에 없었다.  

금수저 소년 멘델스존의 천재교육

펠릭스 멘델스존(Jacob Ludwig Felix Mendelssohn-Bartholdy, 1809.2.3.~1847.11.4)은 음악가들 가운데 가장 금수저이자, 모차르트보다 더 천재였을 것으로 음악사학자들 사이에서 평가되는 인물이다. 독일 계몽시대 철학자이자 라이프니츠 볼프 학파의 한 사람으로, 유대인 계몽주의 운동인 하스칼라의 선구자이기도 한 모제스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 1729~1786)은 그의 할아버지로 오늘날 사랑의 화신으로 알려져있다. 

펠릭스 멘델스존의 할아버지 모제스의 초상화
펠릭스 멘델스존의 할아버지 모제스의 초상화

그는 천재적인 지성을 타고났으나 동시에 작은 키에 못생긴 얼굴 그리고 곱사등이라는 장애까지 있었다. 젊은 날 함부르크의 한 상인을 찾아갔다가 그집의 아름다운 딸 프롬체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되자 모제스는 용기를 내어 그녀의 방으로 올라가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싸늘했다. 모제스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배우자는 반드시 하늘에서 정해준다는 말을 믿나요?” 그녀는 “믿어요. 당신도 믿나요?” 라고 반문했다. 모제스도 끄덕이고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신은 남자아이들이 태어나기 전에 장래 배우자가 누구인지 가르쳐 준다고 합니다. 나도 세상에 나오기 전 어느 여자와 결혼할 것인지 들었습니다. 그 여자가 곱사등이라고 하시기에 저는 애원했습니다. 차라리 저를 곱사등이로 만드시고 나의 신부에게는 그 고통대신 아름다움을 주십시오! 그 기도가 이루어져 저는 곱사등이로 태어났답니다.” 프롬체는 모제스의 말과 간절한 눈빛에 깊은 감동을 받고 드디어 마음을 열고 결혼에 응했다. 프롬체의 가문 역시 성공적인 부르주아 상인 집안이었고, 지성으로 명성이 높았던 모제스와 결혼하자 함부르크의 그 집은 지식인들과 상인들이 드나드는 곳이 되었다. 

펠릭스의 아버지인 아브라함 멘델스존 바르톨디(Abraham Mendelssohn Bartholdy)는 1804년에 베를린에 위치한 맏형 요제프의 은행에서 일하게 되는데, 거기서 레아 멘델스존 바르톨디(Lea Salomon Mendelssohn Bartholdy)를 만나 결혼하게 된다. 부유한 제조업 가문 잘로몬 출신으로 아마추어 음악인이자 영문학/불문학/이탈리아 문학가이기도 했던 레아는 같은 해 아브라함과 결혼하여 베를린에서 함부르크로 거처를 옮긴다. 

멘델스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는 가깝지 않았는데, 종교 때문이었다. 할아버지 모제스는 주류사회로의 동화를 추구한 하스칼라의 선구자이긴 했지만 유대인인 본인의 혈통 자체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 아브라함은 유대교 전통을 구시대적인 것으로 여겨 개신교로 개종하고 성까지 아내의 성인 바르톨디(Bartholdy)로 갈아치울 중도로 열렬한 동화주의자였다. 멘델스존의 정식 이름에 바르톨디가 붙어있는 이유다. 펠릭스뿐 아니라 파니, 레베카, 파울 등 아브라함 멘델스존의 모든 자녀들은 1816년 3월 21일에 개신교 목사로부터 가정 세례를 받으며 야코프 루트비히라는 세례명을 갖게 된다.

1811년 아브라함 일가는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 다시 베를린으로 이사하고 아브라함의 은행업은 크게 번창한다. 4살 위 누나인 파니(Fanny Mendelssohn 1805~1847)가 음악 재능을 드러내자 아브라함은 음악을 배우게는 했지만, 당시 여성이 아무리 음악가라 해도 직업을 갖는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통념을 벗어나지 못했다. 덕분에 6살 펠릭스도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게 된다. 

아브라함 멘델스존의 베를린 저택 살롱은 늘 지식인, 사업가, 예술가, 과학자들로 북적댔다. 그중에는 과학자 훔볼트와 수학자 디리흘렛도 포함되어 있었다. 펠릭스는 자연스레 지적인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펠릭스는 초기에 가문의 피아노 교사인 베르거(Ludwig Berger)에게 배우다 1819년부터는 첼터(Carl Friedrich Zelter)에게 작곡법을 배우게 된다. 여기에는 위대한 바흐의 아들인 빌헬름 프리데만 바흐의 제자이자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의 후원자였던 숙모 사라 레비의 추천이 있었다. 숙모는 재능있는 건반 연주자로 멘델스존 가문이 후원자인 베를린 징아카데미(Berliner Singakademie)에 있는 첼터의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하기도 했었다. 그녀는 당연히 바흐 가문의 주요악보들의 컬렉션을 가지고 있었고, 징아카데미에서 연주하도록 했으며, 첼터는 이렇게 해서 바흐음악의 신봉자가 되었다. 펠릭스가 후에 바흐음악에 대해 가졌던 지대한 관심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어린 멘델스존이 지휘봉을 잡은 멘델스존가의 크리스마스 음악회. 디 벨트 지 칼럼에 실린 삽화.
어린 멘델스존이 지휘봉을 잡은 멘델스존가의 크리스마스 음악회. 디 벨트 지 칼럼에 실린 삽화.

멘델스존의 첫 대중연주회 데뷔는 9살에 살롱음악회에서 호른 소나타의 반주자로 이루어졌다. 12살이 되자 아버지 아브라함은 생일 선물로 어린 아들이 단장인 작은 오케스트라를 만들어주었다. 흥미가 생긴 펠릭스는 여기에서 연주할 곡들을 신나게 작곡했는데, 12~14살의 3년간 적어도 이들이 연주할 12곡의 현악 심포니를 포함한 여러 곡들을 만들어 연주했다. 펠릭스의 첫 작품은 피아노 4중주로 13살에 출판되었다. 1824년 15살의 펠릭스는 관현악 풀 편성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교향곡을 처음 선보였다. 

첼터는 1821년 12살의 펠릭스를 이미 70대에 접어든 대문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에게 소개했다.

독일우체국이 발행한 멘델스존의 스승 첼터의 기념우표
독일우체국이 발행한 멘델스존의 스승 첼터의 기념우표

태어날 때부터 가문의 배경 아래 따로 학교를 다니지는 않았지만, 철학, 미술, 음악, 언어, 문학을 망라한 분야별 최고의 교육을 받았던 펠릭스는 5개 국어를 구사했으며, 괴테와의 만남에서도 인문학 전반에 탁월한 수준을 보여줬다. 이미 멘델스존 가문과 친분이 없지 않았던 괴테는 감탄해 "모차르트의 천재성이란 멘델스존에 비하면 유치한 어린아이 수준"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파우스트> 2부의 초판본을 펠릭스에게 선물했다. 펠릭스는 이후에도 괴테의 시에 곡을 붙인 악보를 여러 번 보냈다. 반면 괴테는 슈베르트가 자신의 시에  곡을 붙인 악보를 보내자 보지도 않고 돌려보냈다.

1824년 펠릭스는 베토벤의 제자였으나 묻혀진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이그나츠 모셸레스(Ignaz Moscheles,1794~1870)에게 배우지만 그는 이미 가르칠 게 없다고 한다. 둘은 친구가 되어 오래 우정을 나눈다. 1825년 16살이 되자 이미 작곡가로서의 스타일이 확립된 것으로 인정받는 현악8중주 Eb장조와 이듬해 전체를 완성한 셰익스피어 연극의 부수음악 <한여름밤의 꿈> 서곡을 작곡한다.

가장 유명한 ‘축혼행진곡’은 1843년 새로 작곡해 추가된 것이다. 1827년에는 펠릭스의 오페라 <카마초의 결혼 Die Hochzeit des Camacho>이 초연되는데, 뜻밖의 실패를 경험한 펠릭스는 이후에 발표도 하지 않은 <병사들의 연애 사건>(1820~30)과 <낯선 이의 귀환> Op.89(1829) 외에는 오페라에 손을 대지 않았다.

반면 어두운 면도 없지는 않았다. 워낙 부잣집 귀한 도련님으로 자라다 보니 성격 면에서는 어릴 때부터 그리 좋지는 않았다는 소문도 있다. 어린 시절 펠릭스가 화를 내면 어머니 레아 외에는 아무도 말릴 수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도 잠들 때까지 침대 맡에서 손을 잡고 기다려 재우는 방법만이 어린 도련님의 분노를 그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고 전해진다. 

김용만은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문화예술TV 프로듀서를 역임한 뒤 콘서트와 컨벤션 등을 기획 연출하는 일을 했다. (사)5·18서울기념사업회의 상임이사 등 사회활동에도 몸담았다.그는 음악전문지의 편집장과 공연예술전문지의 발행인을 지냈고, 다수의 셰익스피어 희곡, 영화, 방송 번역 경력도 쌓았다. 오랜 기간 클래식 음악에 대한 칼럼을 쓰고, 강의, 방송 출연 등도 해왔다. 현재는 한국장애인신문에서 저널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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